1996년에 나는 인권영화제에 있었다. 그 해 11월 2일부터 8일까지 이화여대에서 열렸던 인권영화제를 취재하기 위해 나는 객석 한 구석에서 메모를 하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1회 영화제의 슬로건은 ‘잊지 말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잊을 수 없는 몇몇 사람을 만났다. 개막식의 맨 앞자리에는 지금은 북으로 가신 장기수 선생님들이 앉아계셨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 분들을 모시고 왔을 젊은 청년이 있었다. 그 사람은 우리 학교 선배였다. 무력이형이라 불렸던 그는 가두투쟁이 있는 날이면 항상 전투조를 지휘하던 사람이었다. 뜻밖의 만남이었다. 노동현장으로 떠나지 못하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내게 그 자리의 선배 또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인사를 했고 선배 또한 쑥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는 감옥에 갔다온 후 한참을 헤매다 장기수선생님들의 영향으로 한의학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했다. 각자의 일이 있어 만남은 짧게 끝났다. 일이 없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외면했을 것이다.
▲ 1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한다. 소위 ‘운동의 위기론’이라는 게 쏟아지던 90년대 중반, 후일담이라는 이름 속에서 누군가는 패배주의로, 또 누군가는 자랑 같은 무용담으로, 80년대를 개인사 속에서 떠나보내던 그 때. 나의 선택은 과거의 시간, 과거의 사람들과의 결별이었다. 스스로를 격리시키며 다짐했다. 이 헤매임은 곧 끝나리라. 이 헤매임이 끝나는 날, 다시 한 번 씩씩한 모습으로 당신들 앞에 서리라. 그러나 혼자서 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길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유폐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나는 몇 년을 그렇게 혼자서 지냈다. 늦은 밤, 그리움에 왈칵 눈물이 솟을 때도 있었지만 나의 자리는 여전히 부끄러웠기에 나는 그 외로움을 견뎠다. 그리고 나는 1회 인권영화제에서 갑작스럽게 그 모든 인연들을 맞닥뜨린 것이다.
‘부드러운’ 인권 앞에 놓인 ‘고난’
‘인권’의 의미는 넓고도 심오하다. 하지만 96년의 내게 그 단어는 ‘폭압’이나 ‘탄압’이라는 공격적인 어휘들에 비해 유약하게 다가와 마치 ‘자선’과 같은 시혜 속에서만 유지될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느낌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80년대를 거치며 ‘자유’나 ‘민주’를 위해 싸워올 때 인권이라는 말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세계인권선언일’처럼 ‘오늘의 역사’ 시간에 잠깐 상기되는, 기념일 안에서만 존재하는 죽은 단어라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부드러운 느낌의 ‘인권’이라는 말을 앞에 단 1회 영화제는 고난 속에서 치러졌다.
종로구청에서는 ‘비디오’라는 이유로 영화제 개최 불가판정을 내렸고 어렵사리 물색한 이화여대의 관할구청인 서대문구청에서도 행사 중간에 ‘공연법상의 신고 의무 불이행’이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법안을 들이대며 공연중단 명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행사 기간 내내 “지금 그런 행사 허락하는 학교가 어디 있느냐?”는 교수들과 교육부의 압력으로 행사요원들은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밤잠을 설쳐야했다. 인권을 주제로 한 소박한 영화제에 그렇게나 많이 쏟아졌던 압력들은 그렇게 다시 한번 이 나라의 인권지표를 확인시켜주었다.
치열한 '운동'으로서의 영화제
영화제를 위한 영화제가 아닌,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을 가르치기 위한 치열한 '운동'으로서의 영화제. 이것은 인권영화제가 1회 때부터 지켜온 자리이다. 그래서 강산이 10년도 변하고도 남은 지금, 여전히 인권영화제를 치러내는 일은 고되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전검열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대관할 극장이 없는 것이다. 작년 대학로 마로니에에 이어 올해에는 촛불의 광장이었던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인권영화제. 그 영화제에 힘을 보태고 싶어 부끄러운 기억을 마저 마무리해본다.
그 날 나는 대학동기를 만났다. 그 애는 함께 친했던 다른 친구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해고 후 원직복직 싸움을 하다가 폭력혐의로 수감 중이라는. 한 번 가봐야지 않겠냐는 말을 어색한 웃음으로 밀어내고 서둘러 안녕을 고한 후 나는 시청 앞 화단에서 혼자 소주를 마셨다. 너를 만나러 가야 할까? 가서 내가 무슨 말을 할까? 결국 나는 가지 못했다. 추운 날씨에 급히 마신 소주가 일으킨 위경련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가야했으니까.
꼬박 하루를 앓고 나서 영화를 보았다. 고문에 못 이겨 동료를 팔아버린 과거 때문에 18년 동안 영혼까지 망가져가며 죄책감에 빠져있던 프락치 마르샤 메리노의 이야기 <배신의 시간 속에서>. 영화를 시작하며 감독은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고통없이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가”
그리고 덧붙인다. “1990년대의 칠레는 망각이라는 이상한 병에 걸려있다”고.
1996년에도, 그리고 지금 2009년에도 이 두 문장은 여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는 여전히 그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로 고통스럽게 과거를 회상하고 있고 2009년의 이 도시는 너무나도 많은 죽음들을 쉽게 잊고 있다.
그 망각들을 인권영화제는 화들짝 깨뜨린다. 내 앞에 펼쳐진 세상만이 전부라고 믿고 싶은 안일한 내게, 인권영화제는 빨간 약과 파란 약을 펼쳐 보이던 모피어스처럼, 진짜 세상을 보라고 말해준다. 덕분에 나는 살아남았고 해마다 인권영화제에 보내고 싶은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 1회 영화제 때의 그 속삭임을 지금도 나는 가끔 되뇌어본다. ‘잊지 말자’, 그래 “잊지 말자”고. (류미례)
1996년 제1회 인권영화제 : 영화 속의 인권, 인권 속의 영화
날짜 : 1996년 11월 2일-8일
장소 : 이화여대 법정대 강당
주최 : 인권운동사랑방, 이화여대 총학생회
서울 인권영화제를 가진 이후 약 두 달 동안 14개 지역 도시에서 개최했다. 1백여 인권사회 단체와 6백 여명의 개별 시민 후원을 통해 모두 32편의 영화를 무료로 상영했다. 약 3만여(서울에서만 1만 5천명) 관객이 영화제를 다녀갔다.
'표현의 자유'라는 대의를 위하여 사전심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영화를 대중 상영한 것은 국내에서 '제1회 인권영화제'가 최초이며 유일한 것이었다. 인권영화제의 이러한 정신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상영장 대여 불가 압력 등 당국의 탄압 속에서도 시민의 큰 호응 덕분에 제1회 인권 영화제는 큰 어려움 없이 축제 분위기 속에 막을 내렸다. (출처: 인권영화제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