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정영태(인하대학교 사회과학부)
이제 대통령밖에 없다
새천년을 앞둔 지금 우리나라는 수출과 외국인투자가 늘어 외채위기도 극복하고 경제도 되살아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나 건실하냐 하는 문제도 있지만 심각한 사회문제들이 누적되고 있다. 외세 맹신주의적 시장개방과 개혁(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인한 외국인투자가의 한국경제 지배, 순수한 비용절감형 고용구조조정으로 인한 임시직 내지 계약직 등 비정규직의 급증과 그로 인한 고용불안의 증가, 빈부격차의 심화와 빈곤층의 급증, 실업자와 공공근로수당과 금융 구조조정비용을 대기 위해 마구잡이로 발행한 국채와 그로 인한 나라빚 급증, 경쟁과 효율만을 강조하는데서 오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편법주의의 만연 따위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기존 정당들은 상대방을 흠집내기 위해서 부패와 비리를 폭로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개별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밥줄’을 챙기기 위해서 무분별한 지역개발사업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그 결과 국가적 민족적 문제에 대해서는 기존 정당과 정치인 그 누구도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꼴이다. 이처럼 시민사회에서의 집단간 갈등이나 문제를 최종적으로 조정 해결하는 임무와 권한을 가진 정당과 정치인들이 자신의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보니, 현재 격렬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노동관계법개정과 구조조정을 둘러싼 노 사 또는 노 정 대립에서 보는 것처럼, 시민사회에서의 갈등당사자들은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는 통치불능의 지경에까지 치닫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자신의 밥줄 챙기기에 급급해 있는 기존의 국회의원들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시장'(市場)인가? 지금은 세계화시대이니 IMF와 같은 국제기구인가? 그러나 이들은 우리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배후세력이 아닌가? 그렇다면, 남은 것은 현재로서는 대통령 뿐이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다른 어느 OECD회원국 원수보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행정부의 수반인 동시에 집권당의 총재이다.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국회의 견제를 거의 받지 않은 채 장차관 등 고위급 공직자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집권당 총재로서 당내 어떤 사람이나 집단으로부터 견제를 받지 않고 주요 당직자에 대한 인사권과 주요 선출공직후보에 대한 공천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가진 우리나라 대통령의 역할은 다른 어느 나라의 최고지도자보다 중요하고, 그만큼 대통령의 리더쉽 스타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현 대통령의 리더쉽 스타일은 민주적이지 못한 것을 넘어서 ‘봉건적인’ 것 같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사례는 적지 않다. 우선, 관련 부처장이나 집권당 간부에게 정부나 집권당의 잘못된 행동이나 정책(예-개혁입법부진·비리사건)에 대해서 해명이나 교정을 요구하면 대통령의 눈치만 본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에 대해 수용적이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 그런 의견을 낸 참모를 아예 소외시키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이 결코 민주적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의 리더쉽을 짐작할 수 있는 다른 사례는 대통령이 자신의 참모를 임명하거나 국정을 운영할 때 그 직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질이나 능력보다는 자신(또는 천거인)과의 인간관계(또는 인연)를 더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김태정 전 법무장관이 연루된 ‘옷로비사건’이 터지자 김장관의 해임 여론이 빗발치듯 했지만, 대통령은 “나는 같이 일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여론몰이로 희생당한다면 장관들이 국가나 대통령에게 충성하지 않고 ‘딴데’ 눈치만 볼 것”이라면서 늦게까지 해임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자질이나 능력 또는 도덕성보다는 자신과의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런 인사나 국정을 행하는 스타일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대통령도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이해당사자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가? 그럴 경우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무정부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남은 방도는 단 하나, 새로운 정당과 정치인의 등장이다. 그런데 새로운 정당과 정치인이 새천년의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느냐 마느냐는 내년 총선을 치르고 난 뒤에나 결정된다. 그때까지는 다른 주체가 제도권에서 그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 주체는 다름 아닌 대통령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통령은 혼자서만 결심하면 적어도 집권당과 국무의원 등 임명직 공직자들은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김대통령은 자민련 재벌 보수언론 등 반개혁세력의 눈치를 보는 것을 중단하고 당내민주화와 자질 능력에 근거한 인사를 실시함은 물론 선거법과 노동관계법 그리고 국가보안법의 전향적 개정 등 민주주의와 깨끗한 정치풍토를 위한 개혁을 과감히 추진함으로써, 민주화투쟁에 몸을 받치고 외환위기를 극복한 그간의 업적이 더욱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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