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당황했습니다. 언론사 사장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겁니다.”

민경중 CBS노조 위원장은 아직도 그 날의 울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한나라당에 나가있던 후배 기자들에게 급하게 전화가 왔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부끄러워서 더이상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해주세요.”

그날은 새천년 민주당 당직자 임명일, 권호경 CBS사장은 임명이 확정된 김옥두 사무총장에게 ‘축 총선승리’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축하화분을 보냈 다. 이에 한나라당은 대번 반격에 나섰다. 이사철 한나라당 대변인은 긴급히 기자회견을 열어 권 사장의 화분사건에 대해 “CBS는 언론사로서 자제하라”고 따끔한 일침을 놓았던 것이다.

* 권호경 사장 퇴진운동 거세…위자료 청구 소송까지

결국 노조와 직원들이 선택한 길은 권호경 사장의 퇴진운동이었다.

“권호경 사장의 정치권 줄대기 행태로 인해 CBS는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안게 됐습니다. 잘못 앉힌 사장 때문에 45년 동안 공들여 쌓아온 CBS의 명예가 한순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화분사건 이후 민경중 노조위원장은 본인의 사표를 내며 같이 권 사장에게 명예롭게 같이 사퇴하자고 제안했다. 권 사장이 쫓겨나듯 사퇴하는 모습이 보기 안좋다면 노조위원장인 본인과 함께 CBS의 발전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권 사장은 이를 거부하고 민 위원장의 사표를 반려했다.

이에 노조는 사장의 판공비 내역을 밝히고, 지난해 파업 당시 작성됐던 회사측의 노조대책문건을 폭로하는 등 사장 퇴진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노조에 따르면 권 사장은 IMF 이후 지난해 4월까지 월급을 반납했지만, 매달 800만원 가량의 활동비와 1,000만원의 별도 판공비를 지원받는 등 1년 동안 2억원의 판공비를 쓴 것으로 드러났다. 또 지난해 4월 파업당시 회사 측이 ‘조합원 계파별 성향분석’ ‘징계로 인한 사태확산 우려’ 등 5개문건을 작성해 집행부 사퇴 유도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이 기재돼있다.

이어 지난 17일 노조는 권 사장이 94년 재직시부터 여야 의원 30여명에게 수천만원대의 정치후원금을 제공해 온 사실과 지난해 8월 아들 결혼식에서 CBS 사장의 직위를 이용해 기자들을 통해 정관계 인사 및 주요 부처 장관에게까지 청첩장을 돌렸다고 밝혔다.

이같은 폭로에 이어 같은 날 CBS직원 9명은 서울지검을 찾아 권 사장을 상대로 “권호경 사장의 행태로 CBS 직원들은 씻을 수 없는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각각 1,00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CBS 사태는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 권사장 퇴진운동의 씨앗은 오래전부터

이번 CBS 사태는 화분사건으로 촉발되긴 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의 불만을 눌러오다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 4월 노조가 전면 총파업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권 사장의 부실경영에 대한 불만에 비롯됐다. IMF 이후 회사측은 경영난을 이유로 직 원 100여명을 정리해고하고, 남아있는 직원들도 상여금 전액을 반납했다.

당시 체불임금은 35억5,000만원에 이르렀고, 최소한의 경비로만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노조(당시 위원장 이열범)는 회사 부실의 원인을 “권 사장이 CBS 건물을 무리하게 짓느라고 지게 된 빚 때문”이라며 권 사장의 경영능력 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사장 퇴진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권 사장 퇴진 대신 부채상환 대책을 제시하고, 노사 공동으로 ‘사장 경영평가’를 갖기로 했으나, 아직 하나도 성사된 게 없다.

지금도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빚 때문에 CBS는 허덕이고 있는 실정. CBS는 IMF 당시 서울과 부산에 80억원에 달하는 건물을 짓는 등 전체 부채가 520억원에 이르고 있어 CBS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올해부터 결재자금이 본격적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또한번의 고비가 남 아있다.

이에 대해 노조는 “IMF 당시 회사경영 사정이 어려운 점을 감안해 직원들은 상여금 전액을 반납, 6∼7년차의 직원이 1년에 1,600∼1,700만원정도의 봉급으로 생활했다”며 “그럼에도 지난 1월에는 정 아무개 전무의 임금을 31%나 기습 인상했다”며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 CBS가 21세기에 살아남기 위한 길

현재 노조는 이같은 문제보다는 권 사장의 언론사 사주로서 부적절한 정치적 행태에만 집중시키고 있다. 민경중 위원장은 “CBS는 지난 45년간 어떤 언론보다도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독립적이었다”며 “그만큼 사회의 부조리를 향해 과감히 매운 소리를 할 수 있었던 CBS의 역사적 자부심이 직원들에게 는 강했다”면서 이번 사건으로 그만큼 상처가 컸음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 방송구조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습니까? 위성방송, 디지털 방송하며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이번에 CBS는 TV 방송허가권을 따는데 실패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으로만 21세기를 살아남아야 할 판입니다. 그러나 권 사장은 아무런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본인의 정치권 줄대기로 물의를 일으켜 CBS의 위상만 실추시키고 말았습니다.”

이에 노조의 권 사장 퇴진운동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 그동안 퇴진운동이 있어왔지만, 이번만큼은 “권 사장이 퇴진해야만 투쟁을 끝내겠다”면서 중도하차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근 노조와는 상관없이 보도국 기자들끼리 ‘공정방송위원회’를 결성, 자체 방송에 대한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있어요. 회사 간부의 이해관계에 좌지우지되는 보도를 막고, 여야 정치권의 균형보도에도 힘써 애초의 CBS의 역할을 찾겠다는 것이죠.”

이와 함께 위자료 청구소송이 더 확대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번에 소송을 제기한 9명 중 3명은 당시 한나라당에서 부끄러운 상처를 입었던 기자들”이라며 “권 사장이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위자료 청구소송은 확대될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그것이 진정으로 CBS가 살아남는 길이라며….

[저 자] 연윤정 기자

[출 처] 매일노동뉴스

[발 행 일] 2000.02.23

[발 행 처] (주)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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