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엔 국경이 없다.’

유행가 가사처럼 흔하디 흔한 말이지만 이만큼 사랑의 위대함과 불가항 력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말도 없다. 사실 말 그대로 사람들은 국경과 피부색과 언어를 초월해서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

이제 한국에서도 국제결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실제로 몇몇 사람 들은 국제결혼후 한국에 와 살면서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 다.

그러나 또 한 켠에는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거나 혼인신 고를 했더라도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아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 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 여성과 제3세계에서 건너 온 외국인 남성이 만나 가정을 이룬 경우.

사실 이런 형태의 가정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 니다. 그나마 98년 부계(父系)혈통주의의 기존 국적법이 양계(兩系)혈통 주의로 개정되면서 자녀의 한국 국적취득과 외국인 남편의 귀화를 통한 한국 국적취득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국적법의 개정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이주노동자들의 대다수는 관광비자나 초 청비자 또는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입국해 체류기간을 넘긴 불법체류자들 이다.

이들은 아예 혼인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살거나 혼인신고를 했다 하더라 도 단속과 강제추방의 대상자로서 불안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이들 불법체류자들은 강제추방이나 자진출국을 통해 일단 한국을 떠나 면 다시 들어오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실 제로 법무부에서는 1년 이상 장기불법체류 경험이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에 게 최소 1년에서 2년간 입국금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자 발급 및 연장에 관한 체류심사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혼인입증 서류와 3천만원 이상의 경제적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 혹 은 배우자의 재직증명서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불법체류를 포함한 과거 범법사실이 없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적지 않은 이주노동자 가족들이 합법적 방법을 포기하고 불법체류라는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94년 아내 박모(32)씨를 만나 현재 다섯 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는 수레 스 림부(30, 네팔)씨 역시 불법체류자로 조명회사에 다니고 있다. 생김새 도 한국인과 비슷하고 한국말도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는 커가는 아들을 볼 때마다 더욱 불안해진다고 한다.

“몇년 후면 아이도 학교에 들어갈텐데 계속 불법으로 살 수는 없잖아요 .

저도 할 수만 있다면 합법적으로 일하며 여기서 살고 싶어요.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들 불법체류자들에게 자진신고기간을 이용해 자진출국할 것을 권하고 있다.

최근에는 작년 12월 1일부터 올 4월 30일까지였던 자진신고기간을 올 6 월 30일까지로 두 달 연장하기도 했다. 법무부 체류심사과의 담당자는 ” 자진신고기간에 자진출국을 하면 범칙금이 면제될 뿐 아니라 재입국시의 불이익도 최소화된다”며 더 많은 불법체류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기 간을 연장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이윤주 사무국장은 “이런 방법은 임시 방편에 그칠 뿐, 계속 생겨나고 있는 불법체류자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 결책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설령 정식절차를 통해 합법 비자를 받고 입국한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법무부에서는 국내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에게 임시방문만이 허용되는 F1 비자를 발급한다. 따라서 노동권과 거주권이 보장되지 않으며 1년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

카트만두 여행중 네팔인 비제(28)씨와 만나 1년 전 결혼을 하고 한국에 서 함께 살고 있는 이모(28)씨는 F1 비자로 체류중인 남편을 대신해 생계 를 책임지고 있다. 남편 비제씨는 한국 귀화를 원하지만 최소한 2년 이상 거주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은 힘들다. 이씨는 한국 정부의 대응이 ‘수박 겉핥기식’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결혼은 할 수 있게 해놓고, 먹고 살 수는 없게 만들어놨잖아요. 여기 저기 찾아가서 얘기하면 ‘그러게 왜 그런 사람이랑 결혼했냐’고 해요. 여 자는 국민도 아닌가요?.”

이들이 한국에서 거주권과 노동권을 보장받고 합법적으로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2년 이상의 거주기간을 채운 후 귀화하는 것. 하 지만 이들 이주노동자들로서는 자국 국적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귀화하려면 3천만원 이상의 경제력을 입증해야 하는 조건이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고 한다.

최근에는 이렇듯 산재한 현실적 어려움을 이주노동자 가족들이 직접 나 서서 해결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4월 16일 ‘강제추방에 반대하 는 이주노동자 가족대책위’가 결성되어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았던 이주노동자 가정을 결집시키고 있다. 이들은 이날 결성식을 갖고 거리에 나가 피켓시위를 벌였다.

이 모임을 추동해낸 정금자 사무국장은 “시민권을 가진 권리자로서 스 스로 권리를 찾고 생존권을 위협받는 상황에 대응하자는 생각에서 조직을 만들게 됐다”고 말한다.

이들은 한국인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거주권과 노동 권을 보장하고 까다로운 혼인신고 절차와 체류허가 심사조건을 완화해줄 것을 요구하며 현재 가입회원을 모집하고 있다. 정금자 사무국장은 무엇 보다 이들을 가족으로 인정하고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주 장한다.

“아버지가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녀가 받을 충격을 생각 해보세요.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는 또 어떻구요. 또 가족 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 그 가정이 원만 할 수 있겠어요? 이건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입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겠습니까? 이들은 분명 존재하는 한국의 가정이며 가족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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