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뽀 노조대표자 서울역 농성 풍경

어둠 깔린 역광장 ‘들썩들썩’

“2년째 금싸라기 땅바닥에서 여름휴가 보내” 농담속

“공안탄압 김대중정권 박살” 구호 곳곳서 ‘쩌렁쩌렁’

8월7일 오후5시. 한창 퍼붓던 비가 그치면서 시작된 민주노총 집회가 끝난 뒤에도 서울역광장은 분주하기만 하다. 단병호위원장의 단식과 중앙과 산별연맹 대표자 농성이 12일째를 맞은 이날 단위노조 대표자까지 농성에 합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배명호 부위원장을 비롯 건설산업연맹 간부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깔았고, 이어 사무금융노련 손해보험노조(위원장 박조수)의 지부장 10여명이 널찍한 곳에 깔판을 펼쳤다. 박조수위원장은 “임단협도 끝난 뒤라서 많이 결합하진 못했지만 지도부랑 이야기도 나누고, 또 현장에 가서는 실상을 제대로 알려낼 것”이라며 “우리도 이 정도 결합력은 있다”고 은근히 자랑한다. 연맹 간부와 다른 노조 위원장들도 속속 도착했다. 보건의료노조 서울본부는 그 옆에 자리를 잡는다.

녹두색 조끼를 입은 민주택시연맹도 20여명이나 참가했다. 김순근 화평운수노조 위원장은 “2년째 위원장을 하는데, 여름휴가는 한번도 못 가고 늘 농성으로 대신했다”며 “그래도 매번 여의도, 명동, 서울역 등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땅에서 한다”고 농을 쳤다. 그는 “지난 8월5일 집회에서 조직적으로 결의했고, 공안탄압이 빨리 해결되기 바라는 마음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덧붙였다.

6시. 각 조직 조직담당자들이 모여 참가조직, 집회일정을 확인하는 사이 농성대오는 늘어간다. 상업연맹은 현대백화점, 피자헛, 미도파, 뉴코아, 서울온천 등 9개 사업장에서 15명이나 참가했다. 상근자가 많은 노조는 매일 참가하고, 그렇지 못한 노조도 저녁시간 이후에 결합할 계획이다. 7시가 다가오면서 파업중인 동우공영노조에서는 조합원 25명가량이 대거 결합했고, 소화아동병원, 종로서적노조 위원장이 서울역으로 들어선다.

7시10분, 약식집회가 시작됐다. 오늘밤을 함께 지샐 ‘동지’들끼리 서로 인사하고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이수희 서울본부장과 최재풍 서울본부 중부지구협의회의장, 구건서 동우공영노조 위원장의 투쟁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방송사비정규노조(위원장 주봉희)와 한통계약직노조(위원장 구강회)도 어느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농성대오는 어느새 1백50여명으로 늘어있다.

집회가 끝나고 저녁밥도 든든히 챙겨먹은 대표자들은 삼삼오오 앉아서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사무금융노련 대표자들은 박조수 위원장의 통기타 반주에 맞춰 ‘아침이슬’을 불러제낀다. 9시부터는 조직별로 민주노총 지도부와 함께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조직별로 나뉘어 있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문선곤 사무금융노련 부위원장이 벌떡 일어나 “공안탄압 자행하는 김대중정권 박살내자”는 구호를 우렁차게 선창하자 역광장 곳곳에 앉아있던 농성대오는 어느새 입을 맞춰 따라한다.

밤 10시께 파업중인 서울지역인쇄노조 임창분회 사업장 주변에 경찰병력이 배치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홀아비 사정 과부가 안다고, 역시 파업중인 동우공영노조 조합원 10여명이 임창분회 지원을 위해 용수철처럼 튕겨 나간다. 임창분회는 오늘부터 전조합원이 단식에 들어갔고, 그 성과로 꿈쩍 않던 회사쪽과 내일 교섭이 잡혀있는 터였다.

잠시 후 중앙지도부 천막이 웅성거린다. 역시 명동성당에서 8일째 농성중인 전농 정광훈 의장이 찾아온 것이다. 농성중인 노동자-농민 양 지도부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역광장에는 사람들이 한 데 모여들었다. 호텔롯데와 사회보험노조에 경찰병력이 투입돼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틀자 단위노조 대표자들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모니터에 눈길을 고정한다. 바로 그 ‘진압’ 때문에 한 달 넘게 싸워왔으면서도, 화면을 다시 보니 새삼스럽게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가 없다.

11시가 다가오면서 농성장 한켠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김상준 힐튼호텔노조 위원장이 보인다. 42일 동안 파업을 벌인 끝에 지난 8월3일 타결을 지었지만 체포영장이 발부돼 있어 모레(9일) 다른 간부 33명과 경찰서로 출두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오늘 농성에 같이 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오늘은 민주관광연맹 사무처장 자격으로 왔다”고 활짝 웃으면서도 “롯데, 스위스그랜드호텔도 잘 해결돼야 할텐데 힐튼만 타결돼서 미안하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노조도 집회는 물론 농성에 부분적이나마 결합할 예정”이라며 “민주관광연맹 차원에서도 지원에 모든 힘을 다 쏟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제껏 중앙 임원과 산별연맹 대표자들만으로 어쩌면 고즈넉하기까지 했던 서울역이 이제는 단위노조 대표자들까지 가세한 만큼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활기를 더할 전망이다.

배종배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여름휴가 때문에 걱정했는데, 날짜 맞춰서 단위노조 대표자들이 농성에 결합해주니 든든하다”며 “이 투쟁이 휴가 다녀온 조합원에게까지 퍼져서 전조직적으로 상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강력한 대정부투쟁으로 발전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개각으로도 알 수 있듯 정권은 노동자의 목소리는 무시한 채 오로지 정권보호에만 관심이 있다”며 “이 정국을 깨지 못하면 하반기 공기업 민영화, 구조조정, 근로기준법 개악 등에 대응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만큼 단위노조대표자 농성을 통해 전열을 가다듬어 하반기 생존권 사수투쟁까지 이어나가자”고 힘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롯데 교섭을 맡고 있는 배 부위원장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해결의 가닥이 좀체 잡히지 않기 때문이리라.

다음날 아침 7시 선전전부터 다시 농성일정이 빼곡이 짜여졌지만, 대표자들은 좀처럼 잠자리에 들 줄 모른다. 한 자리에서 이렇게 넉넉한 시간을 두고 ‘동지’들과 만나는 게 흔치 않은 일이라 ‘잠’으로 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아까운 탓이다.

이황미 leehm@kct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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