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방학에 난생 처음으로 여름계절학기수업, 소위 ‘썸머’라고 하는걸 들었다. 그러던 중, 그 수업의 교수님께서 ‘총학생회장과 학생들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라는 명목으로 하루치 수업시간을 나에게 할애하신 적이 있었다. 학생운동, 등록금투쟁, 그리고 금융노조 파업(축협노조 파업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둘 다 장소가 우리 학교였기에 파업이라는 화제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였다) 등에 대한 질문과 의견들이 예상외로 줄지어 쏟아졌다. 두 시간은 생각보다 금새 흘러갔고, ‘운동권’인 나는 그 동안 ‘비운동권’인 학우들과 대화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총학생회장인 나는 학우들과의 대화가 참으로 버겁고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벌건 대낮에 종로 한복판에서 개처럼맞으며 끌려갔다던 선배의 처절함과, 후배의 죽음을 보며 울었다던 복학생 형들의 분노와, 퀘퀘한 학생회실 구석에서 졸음 쫓아가며 밤새 대자보를 쓰고 있을 후배들의 노력과, 허울좋은 학부제 앞에서 학생회 하나 지키겠다고 수십명의 새내기들에게 몇 번이고 일일이 전화를 걸었던 과반학생회장들의 노동을 다 대변할 만한 말주변을 가지지 못했다.

운동의 대중화라는 말과 대의나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현실 속에서는 묘하게 배치되는 것을 종종 보면서 나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린다, 80년대의 방식으로 90년대의 학생들이 2000년대의 N세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학생운동이라는 말을. 운동권 학생들의 집회가 서커스 같다는 말을. 하루종일 학교에 울려퍼지는 파업가 때문에 수업을 듣기도 힘들었다는, 그 수많은 원망과 질타의 말들을.

선배들의 무용담이나 80년대 학생운동사를 읽으며 머리를 싸맸던 나와 90년대 학생운동사를 들으며 똑같이 어려워하는 후배들은 어떤 차이와 공통점을 가지는 걸까. 또한, 신입생 시절에 알지도 못하는 선배의 죽음을 보며 울었던 나와,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후배들은 어떤 차이와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 걸까. 우리와 그들이라는 삭막한 구분을 접는다면, 함께 가야 할 ‘우리’는 누구일까.

그러나 학생운동의 이름으로 엄혹했던 과거를 치열하게 살아냈던 선배들은 386을 자처하는 금뱃지들이나 자전적 소설 같은 데에서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80년대의 향수에만 젖어 있는 것도, 인터넷에 열광하는 2천년대 학번에게서 파편화된 개개인이나 절망만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개강을 맞아 다시 빼곡이 들어찬 플랭카드 속의 문구 속에도, 강의실에 들어가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라고 인사하는 학생회장들의 인사 속에도, 술잔 놓고 속내를 털어놓는 후배들의 치기어린 붉은 얼굴에도, 80년대와 90년대는, 운동권과 비운동권은 함께 있다. 어쨌든 지금 당장 우리에게는 그놈의 서커스같은 집회를 계속할 책임과, 고루하다고들 하는 학생운동을 부여잡을 의무와, 눅눅한 학생회실을 청소하고 지킬 권리가 있다. 대학의 가치가 아직은 진보에 있다고 믿는 이들과 무언가를지키고자 하는 이들, 그게 함께 가야 할 ‘우리’다.

<정나리/연세대 총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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