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내체결 합의…노동기본권·생존권 헌납, 경제적 무장해제

“강성노조가 힘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심하고 투자하시오.”
지난 9월22일부터 사흘 동안 일본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그곳에서 한 얘기다. 모리총리와 일본의 자본가들이 “한국의 노사관계 때문에 대한투자가 주저된다”고 문제를 제기하자 김대통령이 이렇게 화답한 것이다. 두 나라는 정상회담에서 한일투자협정을 연내에 체결하고, 자유무역협정에 관한 한일기업인포럼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이대로라면 굴욕적인 한일투자협정이 올해 안에 체결돼 대일 경제종속이 깊어짐은 물론 노동기본권이 말살되는 사태가 현실화할 전망이다. 이와 함께 방일기간 중 김대통령이 약속한 일본인 전용공단은 198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유덕상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현재 정부는 연내체결을 목표로 한일, 한미, 한칠레투자협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일본이 제기하는 ‘진지조항’은 특혜요구로써 노조결성 방해, 쟁의권 원천봉쇄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일투자협정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이른바 ‘진지조항’이다. 이는 상대국에 진출한 기업의 노동문제에 대해 양국 정부가 ‘진지’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번 방일기간 중 일본재계의 한 관계자는 “분쟁이 발생할 때 한국정부가 신속하고 적절한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는 진지조항을 통해 노사분쟁을 한국정부에 떠넘겨 신속하게 진압한 뒤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극대화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진지조항을 통해 일본이 얻고자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일본정부는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입주했던 수미다전기의 경우를 들어 이 조항을 요구했다. 수미다전기는 지난 1980년대 팩스 한 장으로 회사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일본원정투쟁을 벌인 바 있다. 자본이 필요하다면 노동자의 생존권 쯤은 무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얘기다. 지금도 일본계기업인 오므론이 단체협약은 물론 노동부의 행정지도마저 무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제멋대로 한국 노동자들을 착취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결국 일본기업에 고용된다 하더라도 노동자는 무노조, 무쟁의, 저임금을 강요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한일투자협정은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현재 양국의 자본기술 수준으로 볼 때 일본자본의 한국진출이 확대될 것이 분명한 데, 이는 대일종속을 심화시킬 것이다. 게다가 먼저 진출하는 자본들은 대부분 투기자본 성격을 띨 것으로 보여 한국경제의 외환위기 재발가능성을 한층 높일 것으로 보인다.
한일투자협정은 나아가 투자자에게 의무를 부과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정부가 외자유치의 긍정적 효과로 내세우고 있는 첨단기술 이전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또한 진출기업에게 국내산 원료나 부품, 국내 서비스를 쓰도록 하거나 수출입·현재판매에 제한을 두는 등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어떠한 자국산업보호조치도 금지하고 있다. 게다가 외국투자자와 한국정부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 국내법원을 거치지 않고 국제중재기구에 곧바로 제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다. 이는 특혜 차원을 넘어 사실상 일본자본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내주는 것이다.
한편 김대통령의 방일을 앞둔 지난 19일 모리 일본총리가 KBS와 가진 인터뷰 내용과 이를 둘러싼 상황전개는 투자협정 체결 이후 한일관계가 어떻게 펼쳐질 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리는 이 인터뷰에서 “다케시마(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나 국제법상으로도 명확하게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게 우리의 일관된 입장”이라는 망언을 내뱉었다. 이에 대해 KBS제작진은 한일관계를 고려해 ‘알아서’ 이 부분을 삭제한 뒤 방영했다. 모리총리의 망언에 대해 쉬쉬하던 외교통상부는 이 사실이 알려진 26일에 가서야 뒷북을 치는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
‘투자협정·WTO 반대 국민행동’, 민주노총, 민중대회위원회는 지난 21일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한일 양국 정부는 한일투자협정과 한일자유무역협정 체결 기도를 즉각 중단하라”며 “이를 강행한다면 한일 민중들의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재철 leecc@n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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