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은 : 우리가 그래도 소위 여성주의적 글쓰기 혹은 주류 바깥에서 글쓰 는 사람이라고 꼽혀서 <여성신문> 창간 12주년에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나 야 여자니까 그런 게 가능했다 치더라도. 진중권씨는 어쩌다 그런 글쓰기를 시작하게 됐어요?
진중권 : 누나들 영향으로 페미니즘 기질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얘기도 듣곤 해요. 누나 둘에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전권을 휘두르는 ‘여성우월’속에서 살았어요. 크면서 누나들이랑 참 많이 싸웠죠. 여자도 군대에 가라를 비롯해서 요즘 남자들 써먹는 거 저도 다 써먹었죠. 하지만 마르크스를 공부하면서 점점 여성의 불평등한 처지, 현실의 부당성에 눈떴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저도 어쩔수 없이 대한민국 남자라 하드웨어에 마초 근성이 깔려 있죠. 머리로는 다 알겠는데 몸이 안따라 주는 걸 스스로도 느껴요.
최 : 그렇게 자각하는 것만도 반가운 일이예요. 우리나라에선 여자들, 특히 일하는 여자들이 여성의식을 갖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요. 젊었을 때는 젊은 여자 예뻐하고 잘해주니까 차별을 느끼기가 힘들어요. 그리고 마초적인 분위기에 적응하다보니 여기자들도 마초로 길러져요. 마초 흉내라도 안내면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차별, 그건 자신이 못나서 그런거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거든. 그런데 애 낳고 아줌마되고 매력이 없어지고 뭔가 세상물정을 알게되고 남자들에게 대들고 밥그릇 경쟁이라도 할라치면 그때부터 각성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거든요. 그냥 칼이 들어오니까.
진 : 기득권을 가졌다는 남자인 제가 받는 스트레스도 못견딜 지경인데 거기에 여자라는 이유로 추가되는 스트레스가 그 정도라면 어떻게 살아요?
최 : 사는 게 아니라 전쟁이지. 이 나이가 돼도 여자이기 때문에 겪는 일이라는 것이 한이 없어요. 별일을 다 당해. 일단 만만하게 보는 거예요. 얼마 전 억대 연봉을 받는 금융계통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 사람들이 술 취해서 나한테 언니, 언니 하는 거야. 내가 왜 자기들 언니야. 참다 참다 한번만 더 언니 소리하면 죽여버릴 거야 그랬더니 오히려 그 남자가 난리를 치는 거예요. 막 치려고 해. 그래서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렸잖아. 그런데 그게 얼마나 실례인지를 모르더라고.
진 : 한국은 참 묘한 것이 왜 모든 것이 성문화하고 섞여 있는지 모르겠어요. 술을 먹어도 왜 모르는 여자 옆에 앉히고 주무르는지 모르겠어요. 모르는 여자가 옆에 있으면 불편한데 말이예요.
최 : 회사내부에서도 의사결정이나 중요한 일을 할 때 절대로 여자를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은 참 거대한 남자들만의 ‘동성애’ 사회야.
진 : 그렇다고 남자들도 편하지만은 않아요. 뻔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처자식들을 생각하면 꿈도 이상도 모험도 포기해야하거든요. 이렇게 국가주의 혹은 가족주의로 개인을 옥죄는 나라는 한국이 가장 심할거예요.
최 : 한마디로 남자에게는 감옥, 여자에게는 지옥이죠. 그건 그렇고 진중권씨도 적이 많죠?
진 : 제가 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이 저를 적으로 만들죠.
최 : 일단 진중권씨는 남자인데다가 서울대 나왔잖아. 그리고 독일에 유학까지 다녀오고. 우리 사회가 학벌 사회라 그럴때는 미워도 막대하질 못하는 거예요.
진 :우리 사회가 가만 보면 패자를 경멸하는 사회잖아요. 예컨대 나보고 욕 한답시고 넌 유학갔다 박사학위도 못따고 왔잖아 그러거든요. 그건 내 문제인데 왜 상대방이 관심있나 참 이상해요.
최 : 그래도 진중권씨가 박남철씨 사건 때 했던 거 보면 여자들한테 이쁨받아 마땅하지. 어디 대한민국 남자가 그것도 지식인이 그런 일에 발벗고 나섰겠어요.
진 : 저는 처음에 그 문제를 굉장히 단순하게 생각했거든요. 진상이 밝혀지면 나중에는 절차에 따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봤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더라고요. 의외로 공론화가 쉽지 않았어요.
최 : 나도 박남철씨한테 한 번 강간당할 뻔한 적이 있다니까. 나는 박남철씨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시에 대해 비판을 했거든요. 그랬는데 그 사람이 멱살 잡고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몇 대 때리고 강간하려는 거야. 홍대 앞에서 사투를 벌였지. 내가 이번 사건을 보고 반성한 게 젊은 사람들은 이걸 문제 삼아 들고 나오는구나, 공론화시키는구나. 그때 나도 그랬어야 하는데. 우리 세대만 해도 감추거나 당하고 말잖아. 끝까지 안간게 천만 다행이라 생각했지. 그리고 남자들이 그런 거 감싸주고 봐주는 구석이 있잖아요.
진 : 우연히 이문열씨의 글을 봤는데, 일단 말이 안되더군요. 저는 뭐 페미니스트도 아니지만, 남자로서 한국 남자와 사회를 보면 참 끔찍하죠. 해도 해도 너무해요. 적어도 상식은 통해야 하는 것 아니예요? 때가 어느 땐데 400년 전 이데올로기를 들이대는지 모르겠어요. 어떨 때는 남자들이 열등의식을 약자인 여성들에게 풀면서 위안을 삼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런데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코드를 읽어내지 못해요. 이 문제가 어디서부터 비롯됐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작용하는지 아무도 얘기 안해요.
최 : <여성신문>에 여성칼럼(‘얻어터진 여자의 커밍아웃’)을 쓰고 나서 젊은 친구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어요. 어떤 선배가 내 글을 봤다고 해요. 아내가 읽어보라고 줬대요. 그래서 부인은 뭐라고 하냐고 물어보니 별 이상한 여자 다 있다고 그러더래요. 매맞는 게 이상한건데 그 생각은 안하는 거예죠.
진 : 때리는 건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는 거예요. 어릴 때 저도 엄마 맞는 것, 동네아줌마들 맞는 것 많이 봤어요. 그런데 아직도 그래요. 세습되는 문화 같아요.
최 : 마흔이 되면서 세상의 절반이 여자인데 왜 기자의 반은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정하게 세상의 여론을 반영하려면 당연히 절반을 차지해야죠. 이런 얘기하면 나더러 이상주의자라고 해요. 그리고 옛날로 돌아가 골치 썩이지 말고 살라는 충고도 해요. 그런데 당위가 앞서면 왜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내 딸들이 나처럼 살아갈 것만 생각하면 울분이 치밀어요. 나는 주변에 성공한 여자들 보면 당신의 성공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우리 딸들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다 늘 강조해요.
진 : 그런데 여성들 스스로 문제의식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여성신문만 해도 웬만한 여성이라면 다 볼 것 같은데 안 그렇잖아요. 여성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최 : 몇 천년 동안 여자들도 남성들의 힘의 논리에 따른 교육만 받아왔어요. 여성들 가운데 진정한 여성의식 가진 사람이 드물어요. 그러나 여성문제는 결국 남성의 문제이자 사회의 문제예요.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자 역사와의 싸움이예요. 사회 전체의 방향이 바뀌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면 풀 수 없는 문제예요. 여성운동, 여성신문이 발행되는 것, 그것을 시작한 것 자체가 이기는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진 : 그래도 일각에서는 여성운동 재미없다, 여성신문도 딴지일보 등을 벤치마킹 해 재미를 줘야 하지 않겠냐 얘기도 하잖아요.
최 : 물론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도 지금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은 해야겠지만, 문제를 기술적인 것으로 호도하지 말아야 해요. 매체마다 본분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신문의 몫은 딴지일보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어요. 재미없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도 문제예요. 왜 자신의 삶과 연관있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죠? 그런 전제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소명의식을 가질 수 없고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진 : 현재와 같은 정론을 고수하면서 논쟁을 활성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군가산점제니 호주제니 그런 문제들을 인터넷 여성신문에서 논쟁을 붙이는 거예요. 그러면 마초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이슈가 될 수 있거든요. 그런 이슈 메이킹 작업에서 대중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또 ‘마초열전’ 같은 흥미로운 기획도 가미되면 좋겠고.
최 : 오늘 처음 만나 이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진중권씨가 참 여성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진 : 어릴 때는 더했는데, 군대와 사회를 거치면서 그런 성향이 많이 사라졌어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여성성과 남성성이 혼재돼 있다고 느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최 : 진중권씨 같이 사고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 노예로 출발해서 해방되는 과정이 너무 지루한 여성들에게 좋은 동반자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최보은은
1960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남. 1978년 서강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정치부, 여론매체부, 편집부를 거쳐 96년 영상주간지 <씨네21> 한국영화 팀장으로 옮김. 98년부터 <케이블 TV 가이드> 편집장을 맡고 있다.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아 제2회 안티미스코리아대회 격려단, <@ZOOMA>에 여성으로 살면서 부딪치는 편견과 이에 맞서는 의지를 담은 칼럼, <씨네21>에 ‘영화읽기’ 등 여성주의적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는 아줌마 페미니스트.
진중권은
1963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자칭 맑시스트. 1985년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92년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땄다. 베를린 자유대학에 유학갔지만 ‘박사학위도 못따고’ 왔다. <미학강의>(새길), <맑스레닌주의원론>(이론과실천), <예술기호정보>(새길) 등의 책을 번역했고, <미학 오딧세이>(새길),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개마고원) 등을 썼다. 현재 서울시립대 강사,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며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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