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와 <조선일보>

민주노총 조합원님들, 안녕하신지요.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다더니 정말 빨리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새천년이 밝아온다고 아우성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 곧 거리마다 성탄절 노래가 들려오겠지요. 그러나 그 즐거운 노래들도 가난한 사람들에겐 다만 쓸쓸하게 들릴 것입니다. 주위에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은 없는지 한번쯤 둘러볼 때입니다.

얼마 전에 ‘조선일보 반대 시민연대’가 출범했다는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저는 그 ‘시민연대’>가 마련한 ‘반조선일보 시민강좌’에 강사로 초청되어 이번에 일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꼭 그 일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일도 이번 귀국길에서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민주노총 사무실에도 찾아가 인사드릴 참인데 <노동과 세계> 편집진과 대화나눌 기회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프랑스의 <르몽드>와 한국의 일등신문(?)이라고 자랑하는 <조선일보>에 관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제가 구독하고 있는 일간신문은 <한겨레>와 <르몽드(세계)>, 그리고 <리베라시옹(해방)> 세 가지입니다. <리베라시옹>은 1968년 혁명 뒤에 창간된 신문으로 주로 젊은층이 보는 신문이고, <르몽드>는 2차대전 직후 창간된 신문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신문입니다. 흔히 중도좌파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이 <르몽드>에 인터뷰 기사가 크게 실렸던 한국인은, 제가 알기로 김대중대통령과 권영길 민주노총위원장(96-97년 겨울 총파업 투쟁 당시)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점을 통해서도 <르몽드>의 성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한국의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이 단병호 위원장과 인터뷰한 기사를 반 면 정도의 크기로 싣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르몽드>에선 그것이 가능했는데 말입니다.

“<르몽드> 2000년 11월5-6일치 발행부수는 581,504 부입니다.”

11월 7일자 <르몽드> 마지막 면에서 볼 수 있는 글입니다. (<르몽드>는 일요일치와 월요일치만 합본호로 나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르몽드>는 매일 그 전날치의 발행부수를 발표합니다. 6천만의 인구를 가진 프랑스 정론지의 발행부수가 50여만부밖에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한국의 ‘조중동’은 발행부수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습니다. 김치냉장고나 선풍기 같은 경품까지 주면서 구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열심이고, 몇 년 전에는 사람을 죽인 일까지 있었지요. <조선일보>는 발행 부수가 제일 많다면서 ‘일등신문’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유럽인들에게 들려주면 모두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인구 4천5백만에 2백만이 넘는 발행부수라면 그 자체로 이미 정론지가 될 수 없고 다만 광고상업지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유럽에서 2백만을 넘기는 신문은 몇 개의 황색신문들 뿐이고 독일이나 영국의 정론지들도 50만부를 넘지 않습니다.

광고상업지가 일등신문이라면 그것으로 이미 우스운 일인데, 더욱이 가장 반민중적, 반통일적, 반민족적인 신문이 ‘일등신문’이라니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판이지요. 각 나라의 신문은 그 나라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조선일보>같은 신문이 ‘일등신문’이라고 떠들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천민자본주의와 수구적이며 극우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먹혀드는 한국사회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조선일보>는 안보상업주의로 광고장사를 하는데 그치지 않고 발행부수가 제일 많다는 것으로 언론권력까지 행사하고 있습니다. 돈도 벌고 권력도 행사하는 셈인데 그것이 소유-경영-편집의 일체화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일등신문일까요.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이 바로 ‘공익’ 개념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상의 자유나 언론, 출판의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나 언론, 출판의 자유가 강조되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공익’과 ‘진리’를 위한 사상의 자유이며 언론, 출판의 자유인 것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인문주의자들과 계몽 사상가들이 사상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이유는 ‘공익과 진리를 위해서’ 이같은 자유가 필수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잊어선 안됩니다. 한국에서는 이 대전제가 생략된 채 이름만의 자유가 주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조선일보> 같은 신문들이지요. 많은 한국인들은 발행부수가 많은 신문일수록 정론지인양 잘못 알고 있습니다. 신문은 언론자유의 산물이니 당연히 공익을 위한 것이리라는 허상의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일보>는 곧 언론의 자유를 외쳐댔습니다. 시민운동이 <조선일보>의 언론의 자유를 방해한다는 주장이지요. 그런데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언론자유는 공익을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사주인 방씨 일가 등의 사익을 위한 것일까요? 조합원님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어떻게 해야 <조선일보>같은 신문이 ‘일등신문’이라고 떠들지 않도록 할 수 있는지 그 방안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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