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노동자
그리고
‘사회정의’와 ‘질서’
오늘날 70% 가량의 프랑스인들이 유럽 통합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8-9년 전까지만 해도 찬성과 반대가 50:50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실제 유럽 통합으로 나아가는 첫 길목이었던 마스트리히트조약은 국민투표에서 51%의 찬성으로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당시에 1%만 더 반대 쪽으로 기울었어도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유럽 통합은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를 프랑스인에게”를 외치는 ‘국민전선’ 등의 극우파가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 이외에도 프랑스 민족주의의 기치를 내거는 우파들이 반대하고 있고, 또 공산당 등 좌파들 중에도 반대 세력이 적지 않다. 이들 좌파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유럽 통합을 미국 주도의 세계화로 가는 과정, 즉 신자유주의의 관철 형태로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적인 신조에 따라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것과 달리 아주 특별한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인류학자 에마뉘엘 토드는 프랑스인들의 몸에 ‘반역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유로 유럽 통합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프랑스 국민의 ‘반역의 피’ 때문에 프랑스가 영국과는 물론이고 프랑스와 더불어 유럽 통합의 쌍두마차 격이라고 일컬어지는 독일과도 공동 운명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전통적으로 혈통을 중시해왔던 독일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 ‘피’를 주장하는 역설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에마뉘엘 토드가 주장하는 프랑스인들의 ‘반역의 피’란 독일인들이 주장하는 ‘혈통의 피’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사회 투쟁의 역사를 통하여 내재된 ‘역사의 피’라는 성질을 갖는다. 토드는 ‘내 몸에는 반역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유로화가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도 유럽 통합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에마뉘엘 토드의 ‘반역의 피’는 자연스럽게 알베르 카뮈의 “우리는 사회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말을 상기시킨다. 사회불의에 바탕을 둔 질서에 순종하느니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카뮈의 주장은 곧 토드가 말한 ‘반역의 피’의 사회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같은 관찰자가 보기에 프랑스의 사회투쟁이나 사회운동을 이해하려면 토드의 ‘반역의 피’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카뮈의 ‘사회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말은 필수적인 화두에 속한다. 아마 세계에서 프랑스인들처럼 비록 미완이라 할지라도 ‘역사의 함성’에서 ‘비단신을 신은 사람들이 층계를 내려오고 나막신을 신은 사람들이 층계를 올라가는 소리’를 체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근에 의약분업 과정에서 불거진 의사폐업 사태와 롯테호텔과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공권력의 대응을 보면서 나는 카뮈와 에마뉘엘 토드의 말을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라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불의였고 차별이었다. 생존권 차원이라기보다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사들의 폐업에 대하여는 전전긍긍했던 공권력이 생존권을 요구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하여는 강경 진압을 통하여 ‘질서’를 강제했다.
최근에 진중권씨가 명쾌히 지적했듯이, 자유의 반대는 무질서가 아니라 억압이다. 그런데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라는 한국에서는 지금껏 무질서가 자유의 반대인양 주장되어 왔고 또 그렇게 관철되어 왔다. 사회정의의 당위성은 말조차 찾기 어려웠고 오직 질서, 안정, 안보의 주장만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본래 사회불의와 부패구조 위에 있는 질서, 안정, 안보란 사상 누각에 지나지 않고 사회정의가 있을 때에 탄탄하게 정립되는 것이다. 이 모순 즉, 질서, 안정, 안보를 주장하면서 사회불의와 부패구조를 깨지 않은 모순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물론 기득권 세력의 집단이기주의에서 온다. 생존권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는 이면에 바로 기득권 세력의 집단이기주의가 숨어있는 것이다.
가령 상문고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집단 이기주의자들인가. 질서를 앞세우면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억압하지만 결국은 사회불의와 부패구조를 유지시키려는 것이다. 이처럼 질서 이데올로기란 기득권 세력의 집단이기주의를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사회운동의 역사는 사회정의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회적 약자들과 현실적인 힘, 즉 권력과 금력을 갖고 있는 기득권세력 사이의 갈등의 과정이었다. 기득권자들은 스스로 사회 불의와 부패구조를 개선시키지 않는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였다. 또 사회적 약자들이 아무리 사회정의를 외쳐도 사회를 개선시킬 힘은 그 자체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의에는 현실적인 힘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기존의 힘들, 즉 권력과 금력에 맞설 수 있는 우리들의 힘은 다만 단결에서 온다. 단결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결의 힘’이다. 최근에 벌어진 일들은 우리에게 다시금 이 가르침을 일깨워주고 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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