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피코 권재동씨 가족의 요즘>

“한 달 4~5일 특근해도 살림 버거워요”

2백시간 잔업해야 월 1백35만원…둘째는 유치원 못보내

“근기법 개악되고 주5일근무하면, 차리리 지금이 낫죠”

기업퇴출·구조조정에 따른 대량해고, 정부-자본의 노동법 개악기도로 IMF위기 시절의 고통과 분노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겨울이다. 우리 노동자, 우리 남편, 우리 아빠의 요즘 세상살이를 들어보기 위해 경기도 군포에 있는 케피코 공장을 찾았다. 케피코는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는 엔진전자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93년 입사해 8년째 생산2부에서 일하고 있는 권재동(31)씨와 그 가족을 만난 때는 지난 11월20일 오후. 노조(위원장 진규형) 조직쟁의차장(비전임)을 맡고 있는 권씨네는 부인 서해숙(33)씨, 큰딸 기원(6), 막내딸 기진(5) 등 네 식구다. ‘아빠가 최고’인 두 딸은 권씨가 집에 늦게 들어와서 늘 불만이다. 선교원(유치원)을 다니며 막 한글을 깨친 기원이는 “아빠가 책을 읽어준다고 약속만 하고 지키지 않아” 골이 나 있다. 저녁 8시30분에 퇴근한 권씨가 도착하는 시간은 9시쯤. 몸을 씻고 노조 홈페이지를 검색하고 난 뒤 텔레비전을 잠시 보다보면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부인 서해숙씨는 “아빠가 일찍 나가고 저녁 늦게 들어오니까 애들 얼굴을 제대로 못 볼 때가 많아 안타깝다”고 한다. “먹고살아야 하고 책임질 가정이 있어서 그렇지 신이 나서 특근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권씨는 “신자라서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야하지만 특근 때문에 사이비신자라는 말도 듣는다”고 털어놓는다. 권씨가 가족과 함께 휴일을 보낸 가장 최근의 기억은 지난 9월3일 용인에버랜드에 다녀온 일이다. 두 딸과 봄에 한 약속을 여름이 다 지나서 지켰다는 것.

상시주간근무인 권씨는 기본 8시간과 초과근로 2시간30분을 합쳐 하루 10시간30분씩 일한다. 케피코는 협약노동시간이 주 42시간이어서 격주토요휴무제를 실시한다. 권씨는 한 달에 1백~1백20시간 가량 초과근로를 하는데 이는 일반조합원의 1백50~2백시간 보다 적은 편이다. 그러나 권씨 수준의 초과근로를 하려면 한달 7일의 휴일 가운데 4~5일은 특근을 해야 한다. 이렇게 일해서 권씨가 받은 10월급여는 1백76만원 남짓이지만 세금 등을 떼고 난 실수령액은 1백35만원 정도다.

권씨 가족의 10월 수입은 1백35만원과 상여금 1백34만원을 합친 2백69만원. 가장 큰 지출항목은 내년 12월 입주예정인 아파트대출금을 갚는 것이다. 권씨는 5년전 회사임대아파트에 입주(보증금 5백20만원, 임대료 월 3만7천원)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주택융자 상환금으로 매달 급여에서 70여만원이 공제되고 있는데 또 다른 은행융자도 갚아나가야 한다. 남은 돈 가운데 큰딸 유치원비, 식음료비 등 생활비를 빼고 나면 막내딸을 유치원에 보낼 수 없을 정도로 빠듯하다. 그래서 부인 서씨는 98년 10월경부터 가내부업을 시작했다.

사실 최근 권씨의 생계는 자동차산업의 호황 때문에 많이 나아진 것이다. 97년말 IMF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성과급과 상여금을 합해 2백%를 반납했고, 1주일 일하고 1주일 쉬는 부분조업이 98년까지 계속됐다. 돈이 드는 후생복지는 모두 유보됐다. 이때 권씨가 받은 월급이 48~60만원 정도여서 권씨 가족은 아예 회사임대아파트를 비우고 형님 집으로 들어갔다.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권씨는 “당시 조합원들은 생계비를 벌기 위해 주유소와 현장공사판을 전전했다”며 “공사판에서 못에 찔리고 어깨를 다쳐 치료비가 더 들어간 조합원이 부지기수”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IMF외환위기 이후 현장의 인간관계도 많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동아리 50여개가 활발히 움직였고, 1주일마다 새 동아리가 하나씩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IMF이후 노조가 운영하는 동아리는 사실상 문을 닫았고, 활동이 중단된 동아리가 많단다. 자연히 현장문화가 위축될 수밖에 없고 노조가 조합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매개체가 사라지고 있다. 권씨는 “80년대는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임금이라는 매개체로 다 모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정년퇴직 때까지 이 곳을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벌 수 있을 때 돈이나 벌어서 나가자’, ‘나가서 조그만 사업이라도 하나 하자’는 분위기가 IMF이후 현장에서 퍼지고 있는 풍속도란다.

“경총 주장대로 노동법이 개악돼 임금이 25%가량 삭감되면 어떨 것 같으냐”는 질문에 부인 서씨는 “그렇게는 못살지” 하면서도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느냐’는 눈치다. 서씨는 “1백만원도 못받는다는 얘긴데 생활이 전혀 안될 뿐 아니라 지금도 저축을 못하고 사는데 커가는 애들 양육비와 교육비는 어떻게 하란 얘기냐”고 되묻는다.

권씨는 “경총이 주장하는 주5일근무라면 차라리 지금이 낫다”며 “정부와 자본가가 노동법 개악을 추진한다면 맞서 싸워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잔업수당 까고 월차·주휴 등을 폐지한다면 생활비를 메우기 위해 IMF 때처럼 나쁜 근로조건과 산재에 노출되면서까지 더 일해야 할 게 뻔하다는 얘기다.

케피코노조는 지난 10월17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투표자의 76.35%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남선우 사무국장은 “실제 투쟁에서는 96년처럼 노동계와 민중진영이 다시 한 번 총력대응할 수 있느냐에 따라 조합원에게 큰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재철 leecc@n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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