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투는 모든 노동자의 ‘체온’으로
20세기 이전의 경제는 정치경제였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 즉 자본은 그 자체로 상부와 하부구조를 독점하고 있다. 근대자본주의 경제이론의 시조라 일컫는 아담 스미스는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개인의 의욕, 정열, 발명이나 개혁의지’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개인주의 시각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의 부는 화폐나 귀금속보유량(외환보유고)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수준(고용안정과 생존권)이며, 소비자(노동자, 민중)의 처지에서 측정해야 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왕실(국가권력)과 상인들(독점자본) 사이의 정경유착을 비판하면서 근대경제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칼 마르크스 또한 아담 스미스와 같이 상인(자본)은 정치를 도구 삼아 실리를 취한다고 했다.
IMF외환위기이후 등장한 김대중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논리에는 오직 시장경제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더해 자본의 자유, 초국적 단기투기자본의 이윤을 보장할 사이비 민주주의(규제철폐, 개방화, 민영화, 유연화)가 판치고 있다. 김영삼정부가 외환을 거덜냈다면, 현정부는 국고마저 외국에 통째로 갖다바친 꼴이다. 높은 이자로 지탱하는 외환보유고를 자랑하는 사이에 주식값은 외환보유고만큼 폭락해 돈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코스닥시장은 갈 곳 없는 서민들의 쌈짓돈을 가진자들의 입에 털어넣은 결과를 빚고 말았다.
‘1차 구조조정에 1백10조, 2차 구조조정에 40조를 들이면 더 이상 구조조정은 없다’는 말도 거짓이지만, 한국경제 옆구리에 드라큐라의 빨대를 꽂고 있는 초국적자본에게 국가의 부를, 노동자 민중의 피를 상납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좋은 의미의 국제규범이나 표준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빈곤의 세계화에 다름 아니다.
동북아의 끝, 분단된 한반도에 겨울이 시작됐다. 이제 동물이나 식물처럼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역사의 후퇴나 정체를 거부하며 힘찬 겨울투쟁, 동투에 나설 것인가. 노동운동, 노동조합, 노동자에 대한 분할·지배통치를 뚫고 단결투쟁으로 떨쳐 일어나야 한다. 이 시점에서 한 세기전 외세와 부패지배권력에 맞섰던 동학혁명의 경험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기고 있다. 이 투쟁이 끝내 패배로 끝난 주체적 요인은 전봉준이 이끌던 남접에 대한 중상층 농민으로 구성된 북접(최시형 주도)의 북접의 비협조, 남접 안의 민족해방론자와 계급해방론자 사이의 노선갈등으로 투쟁전열이 무너져 통일단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자본은 지금 노동자의 투쟁전선을 갈라놓으려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일차로 구조조정이 마무리된 사업장, 진행중인 사업장과 앞두고 있는 사업장을 차별화하고 있다.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근로기준법 개악내용에 대한 조직내 의견차이를 시차별로 만들어내면서 각개격파를 꾀한다.
겨울투쟁은 조건이나 상태의 차이를 넘어 총연대전선을 형성하는 일이다. 식량난에 휩싸였던 유럽 사람들이 ‘늑대처럼 인육을 뜯기 위해 동료들의 목줄기를 잘랐다’는 1천년전의 끔찍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동투는 단결이고 나눔이며, 얼음장을 녹이는 노동자의 체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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