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논의 실종은 국민 배신행위

지난 12월1일부터 명동성당 들머리 천막에서 사회단체 집행책임자와 인권운동가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필자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된지 52년, 한국민주주의의 치욕 52년이 되는 날부터 단식에 돌입한 것은 반인권, 반통일악법 국가보안법 문제해결이 정기국회에서 실종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위기감의 발로이자, 이번 정기국회 안에 기어코 폐지시키기 위한 집단적 의지의 표현이다.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 채택을 계기로 국민의 마음속에서는 남북 사이의 두터운 장벽이 이미 허물어졌고, 국가보안법도 사실상 사문화됐다. 따라서 사람들은 실정법상의 국가보안법도 당연히 폐지되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살아 남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 총학생회장에 당선되기만 하면 한총련 대의원으로서 ‘이적단체 구성원’이 돼 감옥에 가거나 수배자 신세로 거리를 떠돌아야 하는 현실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남북합의서에 따른 남북화해시대에 국가보안법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 어떤 역사적, 사실상의 근거도 없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마땅히 이번 정기국회 회기안에 반드시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어야 한다. 특히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이전에 또 김정일위원장의 서울답방 이전에 폐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집권여당인 민주당이 구속자의 84%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됐던 대표적 독소조항인 제7조제3항(이적단체) 조차 삭제하지 않은 법 개정안을 만들고 있다가, 최근들어 이번 정기국회에 상정조차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실로 기만적 작태라 아니할 수 없다. 대통령이 전면개정을 약속하였고 집권당 대표도 수차 약속하였음에도, 자민련을 핑계 대고 야당의 태도를 구실 삼는 등 구구한 이유를 대며 법개정 논의를 실종시키고 있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배신행위이다.

냉전체제를 이용하여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지난 반세기이상 사회민주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민족통일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으며, 온갖 인권탄압의 핵심수단으로 쓰여왔다. 국제적으로도 그 흉폭성이 널리 알려져 있는 국가보안법을 그냥 두고는 인권과 평화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이율배반이다.

사실 노동자들에게도 국가보안법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이 이 법 위반으로 구속돼왔고, 지금도 그 흉악한 발톱을 감춘 채 노리고 있다. 사상, 양심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는 물론이고 툭하면 빨갱이로 몰려온 노조간부들로서도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고는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는 일 조차 근본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다소 잠잠해졌지만 노동운동이 더욱 활성화되고 조직이 확대되면, 언제라도 숨긴 발톱을 드러내며 노동운동가들을 마구잡이로 채 갈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권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철폐투쟁 등 보편적인 민주주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도 앞장서 투쟁할 때만이 비로소 우리 사회가 사람사는 사회, 정의와 양심이 숨쉬는 사회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박석운(국보법폐지국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노동인권회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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