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계몽하고 우리끼리 단결해야죠”
이땅의 교육·언론이 세상사람 각박하게 만들어
절망의 끝에서 분출될지 모를 ‘변혁기’ 준비해야
2주마다 한 번씩 <노동과 세계>에 ‘파리통신’을 날리던 홍세화가 서울에 왔다.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한 지난 12월21일, <노동과 세계> 편집진은 인사동 어귀에서 그를 만났다. 검은색 긴 코트에 목도리를 두른 그는 찻집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자고 권했지만 “별로 춥지도 않은데요…”라며 한가로이 인사동 거리를 훑어봤다.
모두 도착하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근처 찻집에 자리를 잡았다. 한달 동안 체류하며 바쁜 일정(그는 이를 ‘여기저기 동원됐다’고 표현했다)에 쫓긴 탓인지 몹시 피곤해보이는 그에게 우선 한달 동안 우리나라를 둘러본 소감을 물었다.
“며칠 전 병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자동문이길래 뒷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잡고 있었다. 뒷사람도 당연히 그러려니 했는데, 모두들 자기만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참 각박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이 이토록 각박해진 것은 교육과 언론 탓이 크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사회정의나 철학에 대한 교육이 고등학교까지 전무하고, 오히려 국가주의나 반공, 체제에 순응토록 하는 교육만 하다보니 개인에게도 불행한 일이고, 대학이나 사회에 나와서 갑자기 모순을 발견하면 여과되지 않은 생각을 행동에 옮기거나 의식이 반전하는 과정에서 더욱 과격해지는 등 부정적 요소가 등장한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그는 ‘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사회 속성상 국민의 뜻에 따른다고 하면 만사형통인 상황이지만, 정작 그 ‘국민’은 무지와 오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국민이 무지와 오류에 차 있다는 것을 과감히 제기하고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극우보수세력들은 국민의 수준이 낮을수록 군림하기 좋으니까 무지한 상태를 방치하거나, 더 나아가 추종하게 한다. 조선, 중앙, 동아 등 신문들이 전혀 계몽작업을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는 것이다. 그는 “도리어 신문들은 의식수준이 높은 독자일수록 반대세력을 형성하기 쉽기 때문에 낮은 단계에 머물도록 계속 세뇌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잘못된 허상과 의식을 심어준다”고 보수언론을 ‘해부’했다.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와 단순한 ‘정보습득’을 혼동하는데, 예컨데 백지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면 사회를 다 이해한 것처럼 행동한다는 지적이다.
그가 ‘안티조선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조선일보의 과거 친일행각을 알면서도 넘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모르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데 무척 놀랐다”는 그는 “일제강점하에서부터 분단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80년의 조선일보 역사 속에 왜곡과 반민중성 등이 모조리 응집돼있다”고 말했다.
그것들이 반통일세력, 수구세력, 기득권세력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토론에 불을 지피는 좋은 참조물이고, 매일 2백만부를 쏟아내 늘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표적이라는 것이다. 옥천군의회 의원들이 모두 조선일보를 안보기로 결정했다는 ‘뉴스’를 전한 그는 “어떤 사람은 성과가 없다고 하지만, 조선일보에 기고하고 싶은 사람들이 예전과 달리 주저하게 됐다는 점만 봐도 서서히 진보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평했다.
민주노총 역시 조선일보를 보는 조합원이 있는 만큼 계몽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조선일보가 지금까지 해왔던 폐악적이고 반민중적인 행태들을 알리고, 언론권력이 어떻게 장사를 하는가에 대한 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극우수구세력을 어떻게 뒷받침하며, 수혜를 받고 있는가를 알면 조선일보를 봐서는 안되는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일보의 잘못된 보도에 반론기고를 하는 등 현실적으로 이용하자는 논리는 결국 그들의 헤게모니전략에 놀아나는 것”이라며 “실제 조선일보안보기운동이 효과가 있겠냐고 묻는 사람도 많은데, 조선일보 독자들이 ‘열심히 봤는데, 문제 있는 것 아니냐’고 물음을 던지도록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국에 체류하며 느낀 감상으로 돌아왔다. “희망이 없는 것 같다”는 그는 “내년 봄에 대단한 변혁기가 올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희망이 없어지면 폭발하기 마련인데, 지금이 바로 희망은커녕 기댈 곳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진보세력은 이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가 내년 봄을 변혁기로 예견하는 근거는 이렇다. 우선 세계에서 가장 신자유주의에 맞선 저항력을 가진 프랑스에서 내년 봄에 2002년 정권교체를 앞두고 기선을 잡으려는 움직임 등 만만찮은 일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되며, 브라질에서는 내년 1월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세계시민대회가 열린다. 그런 국제적인 분위기와 시애틀에서 출발한 신자유주의 반대 분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에서도 내적인 상황과 국제적 환경이 만들어지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몇 마디 나눈 사이 그의 다음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민주노총 조합원에게 하고싶은 말을 묻자 그는 도리어 “비정규직이 50%가 넘었다고 들었다”며 한국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응을 관심 있게 묻는다.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은 그는 ‘단결’이라는 말을 내놓았다.
“힘도 없고 권력도 없는 약자들이 이기주의에 빠지면 그 이기주의는 부메랑이 돼 자기한테 돌아온다. 지배자들이 통치를 위해 가장 잘 쓰는 수법이 바로 대중을 무지상태로 두거나, 추종하게 하거나 분열시키는 것”이라며 “역으로 우리가 대항하는 방법은 스스로 계몽하고, 우리끼리 단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짧은 만남이 끝나자 웃음이 유난히 매력적인 그는 다음 약속을 위해 코트자락을 날리며 인사동거리 인파 속으로 총총히 걸어 들어갔다. 이번이 한국을 떠난 이후 두 번째 방문이라는 그. ‘희망’이 없는 고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 그가 다음해에 아내와 아들의 손을 잡고 다시 이 땅을 찾았을 때, 이곳의 ‘희망’은 몇 센티나 늘어나 있을까.
이황미 leehm@n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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