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8 세계여성의날 투쟁선언문

침묵에서 반란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여성의 새로운 역사를!—

아직은 축제를 벌일 때가 아닙니다. 아직은 그 날을 기념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1908년 미국에서 공장기숙사 화재사건으로 인한 어린 여공들의 죽음에 분노한 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평등한 참정권과 노조 결성권,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뛰어나왔을 때, 3월 8일은 투쟁하는 여성들의 날이었습니다.

군산에서, 부산에서, 성매매의 거리에서 여성들이 불에 타 죽어가고 있습니다. 잠시도 해고위협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정규직여성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졸업한 여학생들은 비정규직이 아니면 실업자 신세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셨습니까? 3월 8일 전세계 여성들이 일제히 거리로 나옵니다. 손목엔 선명한 자줏빛 손수건을 묶고 ‘단결 투쟁’을 외칩니다. 장애 여성들, 아이들, 노인들과 보폭을 맞추기 위해 여유 있게 걸으며 거리에 있는 다른 여성들과도 눈빛을 마주칩니다. 평화와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행진이 계속됩니다. 대열은 무질서하고 피켓은 요란스럽지만, 여성들은 즐거워합니다. 3월 8일, 전세계 여성들이 가정에서, 공장에서, 학교에서 일을 멈춥니다. 여성들이 멈추면 세상이 멈춥니다. 여성들은 총파업으로 폭력적인 국가 권력과 초국적 자본에 맞서 싸우고, 동성애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성차별, 인종차별 등 각종 차별에 맞서 싸웁니다.

이런 상상을 현실로 바꾸려는 여성들이 모였습니다. 여성운동의 주류화과정에서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한 여성들이 모였습니다. 여성장애인, 여성동성애자,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성노동자, 그리고 남성중심의 대학문화에 도전해 온 여학생들이 모였습니다. “침묵에서 반란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여성의 새로운 역사를!” 슬로건 아래 ‘차이가 힘이 되는 여성연대’의 깃발을 올리며 모였습니다.

우리는 여성입니다.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다양한 현실에 처한 여성들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성적 소수자인 여성입니다. 아직은 세력화되지 못하여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소외된 여성들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너무도 다양하지만, 그런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투쟁을 분열시키는 조건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투쟁을 풍부하게 하고, 중심을 향해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시선을 주변으로 되돌리게 하여 소수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게 하는, 여성의 다양한 현실은 우리에게 힘이 되는 조건입니다. 우리의 차이는, 우리가 그것을 긍정할 때,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주변인으로 만드는 구조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중심으로 편입해 들어가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우리는 주변성이 지닌 힘을 자각하고 다른 주변인들과 연대하며, 우리를 주변으로 내모는 지배 구조가 지닌 배제와 차별을 깨뜨리기 위해, 3월 8일, 세계 여성들과 함께, 이렇게 모입니다.

한국 여성단체연합에서 해마다 주최하는 ‘3.8 여성대회’를 떠올립니다. 3월 8일에 하지 못하고 그 전후의 일요일에 하기에 시간을 잡기는 편하나 뭔가가 허전합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받는 입장료에 가슴을 한번 쓸어 내리고, 성실한 귀빈 소개에 맥이 빠지고, 이해하지 못할 춤과 노래들에 주눅이 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목소리가 실내에서만 울린다는 것이 속상합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3.8 여성의 날을 만들기 위해 힘차게 외칩시다. 속으로만 삭이어 온 우리의 얘기를 목아 터져라, 세상아 깨어져라 힘차게, 소리 높여 외칩시다. 여유 있게 걸읍시다. 스치는 여성들과 눈빛을 마주치며 다른 여성들과 보폭을 맞추며 여유 있게, 당당하게 걸읍시다. 침묵에서 반란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여성의 새로운 역사를 향해 전진합시다.

차이가 힘이 되는 여성연대———————————–

관악여성모임연대, 끼리끼리, 살맛나는 세상, 서울여성노동조합, 외대 여학생위원회, 장애여성’공감’, 전국여노와 함께 하는 서울대 ‘을밀대’, 전국학생회협의회 여성위원회(준), 청년진보당 여성위원회, 페미니스트 캠프, 한양대 사회대 여성모임(준)

——————————————————————————–

2001. 3.8 세계여성의날 거리행진

장소 : 서울 명동 한빛은행 앞 (집회 끝난 후 파고다로 거리 행진)

일시 : 2001년 3월 8일 12시 정각

주최 ; 차이가 힘이 되는 여성연대

순서 :

– 풍물로 여는 길(이대 액맥이)

– 투쟁하는 여성들의 자유로운 발언Ⅰ

– 축하 공연(김가영, 지현)

– 투쟁하는 여성들의 자유로운 발언Ⅱ

– 선언문 낭독

– 파고다 공원 앞으로 행진

우리의 요구 :

– 비정규직 철폐하라!

– 장애 여성의 노동권을 보장하라!

– 성매매 특별법 제정하고, 매춘 여성에 대한 실질적 지원대책 마련하라!

– 이성애 중심주의 철폐하고,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라!

– 모성보호 축소/폐지 논의를 철회하고 모성보호 확대 개정안을 입법화하라!

– 여대생 신규 실업에 대한 실질적 대책을 마련하라!

– 성폭력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고 친고죄를 폐지하라!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