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나는 내 자신 속에서/그대와 나를 갈라놓은 내 적을 발견합니다/너는 검은 색이고 나는 흰색이야/당신을 향하여 금을 긋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의 적을 봅니다…나는 하품하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지루하고 지루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게으르고 인색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무엇이 그대와 나를 갈라놓았는가>)
고 고정희(1948~91) 시인은 이 시에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편견에 맞섰다. 그래서일까? 91년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된 지금까지 그의 시들이 10대에서 50대까지 세대를 뛰어넘은 여성들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고인이 창간동인으로 활동했던 여성주의 문화운동단체 `또하나의문화’의 중년 페미니스트 선배들과 서울시립청소년직업센터(하자센터)의 10대 소녀들이 그의 10주기 추모행사를 함께 펼치고 있다.
27일 저녁 서울 영등포 하자센터에서 열린 `또문과 소녀들의 잔치’에서는 청소년 동호회인 `이브의 사과축제’ 회원들로 갓 구성된 보컬그룹 런라이엇과 라틴음악 전문 여성그룹 아마존밴드 등의 연주에 맞춰 참가자들이 흥겨운 추모공연을 벌였다.
기일인 6월9일에는 이화여대 삼성교육문화회관에서 심포지엄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에게’가 열린다. 6월1~8일 하자센터에선 고정희의 글과 유품 전시회가 열리고, 시인의 해남 생가로 떠나는 추모여행, 여성문화축제 등도 6월 말까지 이어진다. 추모 사이트(http://go.to/kjh)도 마련됐다.
하자센터는 특히 소녀들이 고정희의 시를 읽으며 여성주의 공동체의 세대교체를 준비하고, 여성의 언어로 자기를 표현하는 글쓰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깨닫는 계기가 되도록 하는 데 행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 4월부터 매주 두번씩 만나 시낭송과 워크숍을 해온 소녀들은 앞으로 고정희 시인을 비롯해 한국 여성주의 문학을 총망라하는 데이터베이스와 공동체를 사이버공간에 마련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를 위한 준비작업으로 최근에는 `소녀들의 페미니즘 사이트'(www.haja.net/feministgirls)를 개설했다.
고정희 시인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75년 월간 <현대시학>을 통해서 문단에 나왔고, 70년대 민족주의 시에서, 80년대 민중주의 시로, 80년대 말부터 여성주의 시로 시 세계를 넓혀갔다.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했고, 5·18 광주항쟁을 계기로 남도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위로하는 장시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여성주의와 만난 뒤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 또하나의문화 창립 동인으로 활동하며 여성주의 시 세계를 펼쳤다.
강인한 여성 산악인이기도 했던 그는 `여성주의 리얼리즘과 문체혁명’을 발표한 다음날 지리산 뱀사골에서 치열한 43년의 길지 않은 삶을 실족사로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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