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간 성폭력 “말해야 한다”
[기획]동성간 성폭력 “말해야 한다”
성폭력은 성욕이 아닌 권력문제
1999년 모 대학교수가 탈의실에서 동성 제자들의 몸을 더듬고 성행위를 강요하는 등 3년여 성폭력을 가해오다 제자들에 의해 고소 당한 사실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직장에서 “여자처럼 생겼다”며 화장실, 엘리베이터 등에서 3년여 동안이나 자신을 성추행해 온 동성 상사를 고소한 남성도 있다.
이같은 동성간 성폭력 고소사건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아주 특이한 사건처럼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성폭력상담소 측은 “동성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이 법적 고소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이지 동성간 성폭력 피해가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화여자대학교 예방의학교실에서는 “최근 남자 청소년이 성폭력을 당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출한 남자청소년들 중에는 술집주인이나 남자손님으로부터 성행위를 강요받는 경우도 있고 공원에서 먹을 것이나 금품에 유인돼 근처 화장실이나 산에 끌려가 추행 당하는 사례들도 있다.
청소년들이 겪는 동성간 성폭력 피해가 비단 성인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선배나 동기들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거나 심지어 집단구타와 더불어 윤간을 당하는 청소년들도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 권수현 교육부장은 “학교에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방편으로 소위 여성적인 남학생에게 성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피해 당사자 입장에서 볼 때 성폭력은 극도의 수치심의 느끼게 하는 성고문과도 같다.
◀ 군대 내 성폭력, 청소년들 간의 추행과 윤간, 미성년자 성추행 등 남성간 성폭력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남성은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식의 왜곡된 성관념 때문에 피해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지 못한다. 사진은 영화 <세 친구>의 한 장면.
성인 남성들 간의 성폭력은 주로 군대나 감옥과 같은 남성위주 조직에서 심각한 범죄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작년 10월 민주당 정대철 의원은 “휴가 사병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 대상자의 10.5%가 성폭력, 성희롱을 강압적으로 요구받거나 주위에서 이를 보고들은 것으로 답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98년 이후 2년 6개월 동안 현역 장병들의 성범죄 건수는 항문성기삽입 244건, 구강성교 강요와 성기애무 등 추행 133건을 포함해 모두 666건으로 집계됐다.
물론 성인남성간 성폭력이 군대라는 특수조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장의 동성상사로부터 성행위를 강요받거나 목욕탕 또는 사우나 실에서 남성으로부터 항문삽입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남성 “당했다고 말하기 더 어렵다”
“더럽고 치욕적인 경험이었다. 한 번의 경험이 그토록 무서웠는데 만약 계속 그런 일을 당했다면 정말 죽고싶었을 것 같다.”
성폭력 상담자들은 “성불균형이 심각한 우리 사회에서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을 당했다는 굴욕감 때문에 남성 피해자가 더 큰 후유증을 앓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폭력을 ‘남성이 여성에게 성기를 이용해 가하는 폭력’이라고 간주하는 사회통념상 동성간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학생을 구타하고 자신의 성기를 빨도록 강요한 남학생과 강요당한 남학생, 그리고 교사와 경찰까지 이를 학교폭력으로 생각하지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못한다.
물리적인 폭력이 동원되지 않았다 해도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며 만져보게 하고 서로 성기 크기를 견주어 보는 등의 행위로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문화 속에서 이를 원치 않는 남자아이들은 상당한 고통을 겪고 정신질환을 앓는 경우도 있지만 주위에선 ‘남자끼린데…’ ‘장난일 뿐이다’라고 가볍게 여긴다.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문화는 유아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외국의 연구에 따르면 폭력범의 30%가 어릴 적 성추행을 당한 남성이라는 통계가 있을 만큼 유아 성추행은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 피해의식 때문에 피해자가 나중에 성폭력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문방구 할아버지가 15명의 남자아이들을 성추행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놀랍게도 상당수 부모들은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게 자라는 것”이라면서 심각한 범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폭력상담소 조중신 열림터시설장은 “순결에 대한 가치관으로 인해 여자아이가 성추행을 당하면 더럽혀졌다는 생각을 하는 반면 남자아이들은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인식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불균형한 성문화 여성들 관계에도 반영
여성이 여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는 사례는 수사기관, 상담기관, 병원 등을 통틀어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여성들 간에 육체적인 접촉이 잦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간 성희롱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많은 여성들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최근 한국여성성적소수자 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는 이반(성적소수자)여성 커뮤니티 내의 성폭력 사례를 접수하고 지난달 23일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레즈비언 커뮤니티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폭력 해결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여성간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있다.
“술에 취해 택시를 탔는데… 그녀의 손이 내 몸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녔다.” “다른 테이블의 한 사람이 와서 갑자기 우리 테이블의 한 명에게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끼리끼리에 접수된 사례들은 이반(성적소수자)바에서 블루스를 강요하는 행위, ‘싫다’는 데도 ‘친구인데 뭐 어떠냐’면서 허리를 끌어안는 등의 행위, 스토킹, 강제키스를 비롯한 성행위 등 30여 건에 이른다.
▶ 한국여성성적소수자 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kiri.simin.org)는 지난달 23일 페미니스트 카페 고마에서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레즈비언 커뮤니티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커뮤니티 내 성폭력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여성간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있다.
끼리끼리 측은 “사회에서 동성간 성폭력에 대한 개념이 형성돼 있지 않고 성적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심해 피해자는 이중삼중으로 고통받는다”며 “보다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자칫 성폭력 가해자가 동성애자로 오인될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폭력 해결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심한 폭력이 동반되지 않는 한 대부분의 행위들은 법적 대응이 어렵지만 토론회 참석자들은 ‘피해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를 성폭력이라 규정했다. 사회를 맡은 박하(예명)씨는 “가부장적 사회의 왜곡되고 불균형한 성관념이 일반사회 뿐 아니라 이반사회에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며 “성폭력 사례들은 여성들 사이에도 권력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토론자들은 “동성간 성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며 자신의 몸에 대한 주체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끼리끼리는 앞으로 여성이반 커뮤니티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성폭력추방 캠페인을 벌여나갈 예정이다.
“나는 섹스에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내가 그를 상처 입히면서 힘을 느끼는 것이 더욱더 나를 흥분시켰다. 그에게 나를 빨도록 한 것은 내가 육체적 만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굴복시키기 위해서였다.”
전남대 심리학과 윤가현 교수는 그의 저서 <동성애의 심리학>에서 한 남성 성폭력범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성간 성폭력의 가해남성은 선입견과 달리 이성애자인 경우가 많으며 상대방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심리 상태를 보이곤 한다”고 분석했다.
동성간 성폭력은 대부분 신분의 위계나 나이 차, 힘의 차라는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성적취향이나 성욕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간 성폭력이 동성간 성폭력에 비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성별’에 의한 권력 차가 그만큼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성폭력은 남성이 강제로 여성에게 성욕을 분출하는 것’이라는 남성중심적이며 가해자중심적이고 또한 이성애중심적인 편견 속에 동성간 성폭력 피해경험은 계속 묻혀져 왔고 피해자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들의 피해경험은 성폭력을 남성성욕과 남성성기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존의 인식에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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