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랜 만에 중앙당 홈페이지를 갔더니 노아무개씨 때문에 네티즌들의 격렬한 항의가 빗발치고 있음을 알았다. 사실 그 전에도 이미 당 논평 때문에 거센 비난을 받았는데, 이번이 아마 2차인 듯하다. 생명윤리를 옹호하는 발언과 함께, 이성을 잃은 황우석 교수와 국익을 옹호하는 네티즌들의 논리를 파시즘에 비유한 그의 글이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모양이다.

참 안타깝다. 당이 학문의 전당인지, 종교인들의 집합소인지 시위를 전업으로 하는 곳인지 솔직히 실망이 크다. 정당은 이번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법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는지, 생명윤리를 위한 제도적 개선은 어떻게 해야 하며, 특정 연구 분야 및 방법론에 국가의 재원이 집중되는지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주요 임무이다. PD수첩이 보도윤리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황우석 교수에 대해서도 명예를 훼손시킨 점이 분명 있으며, 국가적 망신을 자초한 사실도 방송의 공영성을 잊은 처사임을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명백히 따져야 한다. MBC의 최대 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는 정부조직법에 의거하여 설립된 국가공공기구이다. 그렇다면 국회 문광위 소속인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은 PD수첩 사건에 대해 엄정한 감사를 실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가 소속된 당에서는 PD수첩과 함께 황우석 교수진과 그 지지자들에 대한 직접간접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상한 구도가 되어 버린 셈인데, 민주노동당원들에게는 생명윤리 부분만 보일 뿐이니 그야말로 이관규천(以管窺天)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명윤리에 대한 논쟁은 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이 해도 충분하다. 왜 지금과 같은 시기에 민감한 발언을 해서 공분을 자초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정치 감각이 그 정도로 없는지, 왜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던 김치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도 없다가 이번 일에는 너도나도 의견을 쏟아내고 있는지. 황우석 옹호에 파시즘이나 국익옹호 논리가 숨어 있음을 네티즌들이 모를 거라는 생각을 하고 그들을 가르치려는 모습이 보이는 것에 나는 적지 않이 실망한다.

진보진영(한국에서 진보라는 사람들의 90%는 ‘상대적 좌파’일 뿐이다)의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추구하다 보니 말은 참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황우석을 옹호하는 사람들, 국익을 옹호하는 사람들 역시 생명윤리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보도윤리에 대해서도 네티즌들은 잘 알고 있다. 국익 옹호 논리의 위험성을 지적한다고 해서 국익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듯이 황우석을 옹호하고 국익을 원한다고 해서 생명윤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흑백론으로 갈려서 황우석을 옹호하면 국가주의자에 생명윤리를 포기한 이성을 잃은 집단으로 규정하고, PD수첩을 옹호하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사람들로 여기는 듯하다. 황우석을 비판한다고 해서 결코 PD 수첩 옹호와 연결되지도 않으며, PD수첩 비난한다고 해서 황우석 지지자들로 등치되지도 않는다는 평범한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혜안이 필요함에도 상대방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이성을 잃었다고 몰아부치는 과거의 편가르기가 재연되고 있는 것, 이 현상의 한 축을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담당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시가 가지고 있는 흑백논리와 다를 바 없다. 내가 볼 때 흑백논리로 편가르기를 하는 한국사회의 운동권 논객들이야말로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

네티즌들의 이성을 잃은 도배질을 보며, 국가주의의 광풍을 느끼는 것은 별로 대단한 지성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진정한 지성이라면, 네티즌들의 황우석 옹호와 진보진영의 그에 대한 비판에 어떤 논리들이 개입되어 있는지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네티즌들의 황우석 신드롬에서 그들이 희망의 아이콘을 원하고 있음을 본다. 황우석이 가지고 있는 코드는 무엇인가? 재벌집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열심히 공부해서 이루어낸 것이다.(적어도 그렇게 인식된다.) 인맥도 없고, 자본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식이 ‘황우석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미래의 희망인 것이다. 사교육 없이 공정하게 게임의 룰을 지키며, 자본의 도움없이,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성공한 사람. 국민은 지금 그런 희망 아이콘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런 희망을 황우석에게 투영시켜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가 국민들에게 인기를 모을 때, 왜 그렇게 인기를 갖는지, 인터넷에서 똑똑한 말들 쏟아내는 운동권 논객들이 그것을 분석해 보았는지 궁금하다. 아마 그때는 그때대로 다른 사안 가지고 자신들의 예리한 논점과 비판 능력을 과시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내가 볼 때 황우석 교수에 대한 지지와 옹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 보다는 그들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그에 맞는 정책 대안을 제시해 주는 것이 민주노동당이 해야 할 일이라 판단된다. 황우석 교수가 얻고 있는 국민적 인기와 지지는 결국은 교육 기회의 평등에 대한 욕구인 것이다.

잘 나신 진보논객들이 흔히 생명윤리를 얘기하는데, 과연 황 교수가 명백히 생명윤리를 어겼는지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음에도 그 점은 무시된다. 게다가 생명과학 분야에서 생명윤리라는 것 자체가 아직까지는 전세계적으로 확립되어 가는 중이고, 그에 비해 보도윤리는 명백히 확립되어 있음에도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여론재판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마녀사냥일 뿐이다. 내가 볼 때 이성을 잃은 것은 네티즌이 아니라 네티즌을 똘아이 취급하며 그들을 가르치겠다고 덤비는 운동권 논객들이다. 실험을 위해 죽어가는 흰쥐들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자위를 통해 버려지는 정자들에 대해서도 모른 척하고, 서울의 밤고양이들이 안락사되는 사실에도 모른 척하고, 노동운동의 윤리가 땅에 떨어지면 정부가 탄압한다고 둘러대고, 운동권 내부의 남성 우월주의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말하여지지 않는 것, 오직 상대방을 비판하고 비난할 때만 온갖 논리들이 화려하게 쓰인다는 것. 도대체 이성을 잃은 것은 누구인가?

나는 왜 선택적으로 원칙이 들먹여지고, 윤리가 주장되는지 그게 이해가 안된다. 생명윤리를 주장하려면 낙태를 반대해야 함에도 이상하게 낙태 반대를 주장하면 보수 우파로 규정된다. 내가 볼 때 대학 때 사회 분석의 방법론을 얼치기로 배워서인지 도무지 사고와 비판의 잣대가 제멋대로 휘둘러진다. 선생이 읽으라는 책들은 안 읽고 선배가 권하는 잡서들은 열심히 읽어대는 독서 방식도 놀랍지만, 그러고도 선생들이 권하는 책은 보수 우파의 가치관을 담고 있다고 항변하는 뻔뻔함에 기가 막힐 때가 많다. 이는 진보논객들이 비난하는 재야 국수주의 사학자들이 걸핏하면 ‘강단 사학자'(재야 사학자들의 용어로)들은 모두 식민사학자라는 논리와 똑같다.

나는 논객들의 주장 자체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황 교수의 연구가 시급한 의료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고, 다국적 의료자본에 결국은 이용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 더 나아가 공상과학 영화에서처럼 인체와 인격, 즉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의 질서에 심각한 불이익을 주는 조작들이 그의 연구에서시작될 수 있음도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의 ‘고딩들’도 의료문제에 계급문제가 투영되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우리 국민은 세계에서 지적 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고, 이런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갈 수 있다. 인터넷의 진보논객들은 왜 국민을 믿지 못하고, 그들을 계도하려고 하는 것인가? 나서서 지식을 뽐내지 말고, 국민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믿고 기다려 보자. 황우석의 연구는 실험의 방법론을 개척한 것뿐이다. 우리는 그의 방법론이 그릇되게 쓰이지 않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지 그의 연구 자체를 문제삼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오펜하이머를 조종한 미국의 군부와 거대 재벌이 문제이지 아인슈타인이나 미국의 일반 대중이 잘못한 것은 없다.

잘 나고 잘 나신 운동권 논객들은 김선일씨의 비명을 무시하고 군대를 보낸 한국 정부나 조승수가 면직되거나 말거나 강경투쟁으로 밀고 나간 민주노동당이나 그 논리는 똑같다는 것을 지적해 주기 바란다. 서로의 논리와 지식과 통찰력을 뽐내기 전에 진정으로 겸허한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황우석의 연구는 생명윤리를 저버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는 우리 다음 세대의 몫이다. 황우석 옹호론자들과 옹호론자를 비난하는 자들, 내가 볼 때 그 논리 구조와 사고의 흐름은 데깔꼬마니일 뿐이다. 우리의 무기인 예리한 분석과 논리정연함, 비판의식과 전투적 강인함 등은 민중 앞에서 뽐내고 그들을 가르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기득권과 부조리와 싸우는 데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을 길러내는 데 각자의 인생에서 얼마나 비진보적인 과정들이 있었는지 자기 성찰을 해보자. 전문가들의 세계를 언론기사를 읽고나서 깊이 있는 지식이 있는 것 마냥 너도나도 의견 내놓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진보라는 사람들의 책장을 보면 그 흔한 과학교양도서 한 권 꽂혀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나는 1996년도에 인터넷이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는 내용의 글을 어느 대학의 학보사에 써준 적이 있다. 정말 내 예측이 꼭 들어 맞았다. 대한민국에 무슨 역사전문가, 문화전문가가 이리도 많은지, 저마다 한국문화가 어떻고 우리 역사는 어떻고 저떻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재야수학자는 없다. 논객들은 많은데도, 논리학과 철학 강의는 폐강이 속출한다. 진보논객들이 이상으로 삼고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시장의 우상이 판친다는 것이다.

500년 전 국방이 튼튼하지 못하므로 10만 양병을 해야 한다는 율곡에 대해 사림들은 일제히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정작 전쟁이 나자 백성들을 버리고 나 몰라라 도망갔다. 그리고 전쟁에 끌려가서 능욕당한 여인들이 돌아오자 환향녀라고 압록강에 뛰어들어 자결하라고 했다. 그런 사람들이 그 당시의 도덕정치가요, 이념정치가이며, 진보정치가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맞는 말을 쏟아 냈었다. 왕권을 견제하고, 향촌자치해야 하고, 인간의 선함을 기르기 위해 교육에 힘써야 하고, 덕을 길러서 인격 수양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국방 같은 데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구한말 한반도에는 정규군이 고작 6,000명이었고, 한국을 집어삼키던 때 일본군의 숫자는 고작 300명이었다고 전해진다. 국익을 옹호하자는 국민의 논리는 최소한의 자기 방어 능력도 유지하지 못한 사회를 만들어낸 위정자들에 대한 역사의 기억에 근거한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올바름은 그 불신을 오히려 부채질하고 있기에 욕을 먹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난 가을 국민은 민주노동당의 의석을 한 석 줄였다. 국민의 희망을 채워주지 못한 데 대해 머리 숙여 사과하지는 못할 망정 국민의 의식이 깨어나지 못하고,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의 해석은 곤란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 논객들, 이제는 겸허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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