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말 퇴출당한 S은행 김모 과장(42. 서울마포구성산동)은 요즘 아침에 눈뜨기가 싫다. 실직한 지 3주일밖에 안됐지만 아침에 갈 곳이 없다는게 얼마나 괴로운지 실감하는 것이다. 이른 아침 출근하느라 부산을 떨던 때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도 깨달았다. 예전처럼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졌다. 「실직자」라는 자격지심에서 주위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자영업을 하려고 하루종일 생활정보지를 들 추다가 저녁때면 퇴직한 동료들과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는 게 일과다. 그래도 김씨는 퇴직금을 받은 덕에 다소 여유가 있는 축에 속한다.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서 플라스틱공장을 경영하던 신모씨(41)는 올들어 부도를 맞은 뒤 빚을 갚으라는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지난 5월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현재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신씨는 빚쟁이들 때문에 가족에게 연락도 못하는 처지가 괴로워 푼돈이 생기면 쓴 소주만 들이켜고 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가장 노릇을 못해 큰 죄를 짓고 있다. 자식들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고 말했다.

장모씨(28)는 지난해 1월 D보험회사에 입사해 1백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으며 순탄하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빚보증을 서준 고향 후배가 금융사고를 내고 잠적하는 바람에 월급의 절반 이상을 차압당하다 지난 4월「문제 사원」으로 찍혀 해고됐다. 올 가을 결혼하기로 한 약혼녀에게는 결혼을 1년 미루자고 통보해놓고 서울역에서 생활하고 있다. 면목이 없어 가족들과도 연락을 끊고 있다.

이같이 멀쩡하던 가장들이 IMF시대 이후 직장을 잃거나 노숙자로 전락하는 바람에 가정 붕괴와 이혼율 증가, 자녀 양육 포기 등 부작용이 양산되고 있다.

서울시 「노숙자 다시 일어서기 지원센터」가 지난 9월 서울지역 노숙자 5백87명을 상담한 결과, 기혼 노숙자 1백73명 중 아직 부부관계가 유지되는 경우는 14.5에 불과했다. 나머지 85.5는 이혼(41.6)이나 별거(31.2) 또는 사별(10.4) 등으로 가족이 해체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7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서울-부산의 실직자 6백96명을 조사한 「실직자와 가족의 생활실태 보고서」에도 남자 실직자 5명 중 1명 꼴로 이혼-별거중이거나 이를 고려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실직 가정의 소득은 월평균 78만원으로 실직 전(1백55만원)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고, 실직자 10명 중 1명이 자녀의 진학을 포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랑의 전화]가 서울지역 노숙자를 설문조사한 결과 50이상이 가족과 연락을 끊고 있었다.

실직자와 노숙자들은 대부분 어떻게든 돈을 벌어 가족 품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여간해서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새벽 인력시장에 몰려가도 IMF 탓에 일거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서울역에는 매일 새벽 5시 일용노동자들을 공사장으로 싣고 가기 위해 D인력공사에서 차를 운용하지만 10명 중 1명만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그나마 하루일당이 3만원을 넘지않는다. 김모씨(43)는 『매일 인력시장에 나가는데 일주일에 이틀 일하기도 어렵다』며 『일거리를 찾지 못해 서울역-용산역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빈둥거리다 집에 가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이렇게 실직자와 노숙자가 늘면서 각종 범죄도 늘고 있다. 지난 14일에는 노숙자들의 주거지인 서소문공원에서 김모씨(42)가 옆 텐트의 노숙자(26)가 시끄럽게 군다며 시비를 벌이다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9월에는 노숙자 3명이 강도짓을 하다 검거됐고 노숙자가 위장 자살사건의 희생양이 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최근 노숙자들의 폭력-우범화를 막기 위해 신원을 파악하고 있고 경범죄라

도저지르면 즉심에 회부해 처벌하기로 했다.

[실직한 아버지들의 모임} 김정대 대표는 『실직자들에게 필요한것은 사회의 동정심이 아니라 일자리』라며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실직예산이 배정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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