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자·이시형 할머니, 이혼 소송 패소… 재판부, 나이 이유로 ‘혼인 지속’ 판결
김창자씨(76)와 남편 이 아무개씨(84)의 악연은 광복 직후인 46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김씨는 일본에서 대학을 마친 뒤 귀국해, 서울 ㄷ여고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엘리트 여성. 그러나 김씨 부모는 ‘나이가 꽉 찬’(당시 김씨 나이는 23세) 외동딸을 경제력 있는 남자에게 시집 보내고 싶어했고, 그래서 선택한 신랑감이 중졸 학력에 두 번 결혼했던 이씨였다.
그로부터 52년 동안 이어진 결혼 생활을 김씨는 한마디로 ‘노예 같았던 생활’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가 표현한 대로라면 지난 세월 김씨는 괴팍한 남편 비위를 맞추는 데 실패하면 가차없이 머리채를 휘어잡혀야 하고, 생계를 유지하기에 빠듯한 생활비(한 달 평균 2만원)를 타 쓰면서도 남편에게 찍 소리 한 번 못한‘노예’였다.
김씨는 97년 서울 가정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같은 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1심 재판부는 김씨 손을 들어 주었고, 칠순 할머니의 ‘독립 결사’는 순조롭게 성공하는 듯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지난 1월4일. 2심 재판부(서울 고등법원 민사10부)가 김씨의 소를 기각하면서부터였다. 가사 사건의 경우 80∼90%는 1심 판결이 항소심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 법조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런데 이같은 관례가 이례적으로 뒤집힌 것이다.
황혼 이혼이 일반적인 사회 현상으로 자리잡아 가는 추세에서 김창자씨 사건이 눈길을 끄는 것은, 이것이 사법부라는 프리즘을 통해 황혼 이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2심에서 뒤집힌 김창자씨의 ‘독립 결사’
김창자씨 항소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1심 때와 마찬가지로, 김씨가 지난 52년 동안 남편 이씨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곧 남편 이씨가 김씨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강요한 사실 △결혼 직후 교사 직을 그만두기를 종용하는 등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워 집안을 다스려 온 사실 △고령이 된 뒤 아내가 남자와 관계를 맺는다고 의심하며 추태를 부린 사실 따위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최종 판단에서 1심과 2심 재판부는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남편 이씨의 행위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혼인 관계는)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탄에 빠졌고’, 이 때문에 김씨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므로 두 사람은 이혼해야 한다는 것이 1심 판결의 요지였다.
이에 반해 2심 재판부는 김씨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이것이 이혼에 이를 정도로 ‘심히 부당한 대우’는 아니었으며, 두 사람의 혼인 관계 또한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된 주요 근거로 두 사람의 ‘나이’와 ‘혼인 당시 가치 기준’을 들었다. 곧 두 사람 모두 고령인데다, 이들이 결혼했던 52년 전만 해도 ‘가부장적 권위’를 수용할 수 있는 기준이 달랐으므로 결혼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그밖에도 남편 이씨가 아내에게 생활비를 적게 주되 자신 또한 근검 절약해 현재 18억 원 남짓한 재산을 모았고, 나이 들어 이씨가 추태를 부린 것이 정신 장애에 기인한 증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이씨는 망상 장애 판정을 받은 일이 있다). ‘아내는 정신 장애 증상을 나타내는 남편을 돌보고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이같은 판결은 낯설지가 않다. 이미 유사한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97년 이시형씨(71)가 남편 오 아무개씨(91)를 상대로 제기했던 이혼 소송이 그것이다. 이시형씨 또한 김창자씨처럼 ‘결혼 초부터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남편’을 가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시형씨는 결혼 기간 내내 절대 복종을 강요했던 남편이 94년 ‘내 허락을 받지 않고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며 자신을 집에서 내쫓자 1차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법원에서 화해 결정을 받고 재결합을 시도했던 이씨는 97년 또다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남편이 자기와 한마디 상의 없이 남편 명의로 된 전재산(26억원대 부동산·현금 10억 원·자택)을 고려대학교에 기증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대해 판결을 내리면서 법원이 동원한 논리 구조는 김창자씨 소송 때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지난해 9월 서울가정법원(가사합의 3부)은 이씨에 대해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환갑이 넘었는데도 남편 오씨가 이씨를 권위적으로 대하고 구속하려 해 부부 갈등이 깊어진 점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이는 일시적인 갈등이므로, 두 사람의 나이, 혼인 기간, 이혼을 원치 않는 남편의 탄원 따위를 고려할 때 ‘두 사람에게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최종 판단했다.
논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시형씨에 이어 김창자씨 사건이 터지자 여성계·법조계·학계 일부는 재판부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나이’를 이유로 부당한 결혼 관계를 법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이 제기하는 비판의 핵심이다.
“재판부, 시대에 뒤떨어진 잣대로 판결”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부소장은 김창자씨에 대한 판결을 ‘법원이 둔 자충수’라고 비판했다. 만약 김씨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을 입증하는 증언·증거 들을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렇지만 재판부는 이를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나이와 결혼 당시 가치 기준 같은 주변 요소를 들어 ‘해로’를 강제함으로써 무리를 범했다는 것이 곽부소장의 지적이다.
법원이 시대에 뒤떨어진 가부장적 가치관을 판단의 잣대로 삼은 데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곽부소장은, 아내가 병든 남편을 부양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에 대해서도 비판을 제기했다. 이는 자식·지역 사회·국가가 공동으로 떠맡아야 할 책임을 배우자 개인에게 전가하는 횡포라는 것이다.
이시형씨 항소심을 맡고 있는 하승수 변호사는 사법부가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황혼 이혼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제까지도 참고 살았는데, 조금만 더 견뎌 보라’는 말로 요약되는 이같은 시각은 결국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가부장적 사고 방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를 반박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김창자씨남편 이씨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변호사 가운데 한 사람은 ‘이씨가 차마 털어놓기 어려웠던 집안 사연들을 제대로 얘기하지 않아 1심 재판에서 불리한 입장에 빠졌던 것’이라며, 아내 김씨도 살림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 등 결혼 초기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개별 사안을 놓고 따져야지 황혼 이혼이라면 무조건 여성 인권과 연계하는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씨측 변호사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법조계 일각에서는 ‘파탄주의’를 적용해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혼과 관련된 우리나라 법은 현재 ‘유책주의(有責主義)’를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곧 부부 관계에서 잘못을 범한 사람은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없게끔 권리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 현행 법제이다. 대신 재판부는 이혼 판결을 내릴 때 부부 쌍방의 잘잘못을 엄격하게 따진다. 이에 반해 선진국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파탄주의는 쌍방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부부 관계가 파탄으로 가고 있다면 원칙적으로 이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실 ‘혼인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느냐’를 판단하는 데는 주관적 요소가 강하게 개입한다. 설사 대법원에서 또다시 패소한다 해도 결코 남편과 함께 살지 않겠다는 김창자씨는 ‘재판에 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혼 생활을 계속해야 할 근거로 재판부가 제시한 내용들에 대해서도 김씨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 예로 사법부는 이씨의 남편이 근검 절약하는 생활을 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김씨는 30년 전 사망한 친정 어머니를 남편 이씨가 거적에 말아 장사지낸 한을 지금껏 잊지 않고 있었다. 4남매 학비를 남편이 제대로 대 주지 않아 하숙을 치면서 담배 가게·리어카 보관소를 함께 경영해야 했던 뼈 아픈 시절도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법원 판단과 달리 씨에게 남편은 반드시 돈을 써야 할 데까지 인색하게 구는 ‘수전노’였을 따름이다.
“법대로 판결했으면 이혼 가능했을 것”
문제는 사법부의 보수성이다. 이화숙 교수(경원대·법학)는 이번 소송을 놓고 유책주의냐 판단주의냐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행 유책주의 아래서도 사법부가 법 조항에 따라 엄정하게 판단했다면 이혼을 판결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배우자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제840조 3호)’를 받았거나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제840조 6호)’가 있을 때 이혼할 수 있다는 민법 조항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법부가 혼인을 지속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로 지목한 것은 나이였다. 이에 대해 ‘법관의 오만과 주관이 개입된 부당한 판결’이자 ‘인간적인 외피를 쓴 잔혹한 판결’이라고 말하는 이화숙 교수는, 만약 젊은 여성이 같은 사안으로 소송을 제기했다면 십중 팔구 승소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50년을 노예로 살았다. 이제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김창자씨) “내일 죽더라도 나는 오늘 이혼하고 싶다.”(이시형씨) 할머니들의 절규는 점점 더 늘어날 전망이다. 법 앞에 인간이 평등하다면 노인이라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아서도 안되지만 차별을 받아서는 더더욱 안된다는 것이 곽배희 부소장의 지적이다.
金恩男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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