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훼마을 이재민 한 서린 14년
“시장에서 국밥을 팔고 있었는데 동네에 불이 났다고 하더군요. 그때가 새
벽 3시였는데 얼른 뛰어가 보니 이미 집은 다 타고 연기만 자욱했어요. 기
가 막혀서 눈물도 안나오고 근처 학교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고 다음날 다
시 가봤는데 흔적도 없이 다 타고 재만 남았더군요. 그제서야 실감이 나고
속이 터져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소례(60세)씨의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
위로 눈물이 쉼없이 흘러내렸다. “애들 넷 키우면서 독하게 살아왔는데, 그
날 생각만하면 눈물이 나네요. 바보같이….”
지난 구의 보금자리가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주민 373명은 한순간에 모
든 것을 잃었다. 불이 난 후 구청 차원의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무허가 건
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원은 3일만에 중단됐다. 주민들은 궁여지책으로
마을회관 옆에 천막을 쳐서 잠자리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
은 막막하기만 하다.
화훼마을에 정착한지 올해로 14년이 된다는 이소례 씨 역시 이번 화재로
모든 것을 잃었다. 남편은 28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린 자식 넷을 키우
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품앗이로 한두 푼 모아 음식점을 시작했지
만 동업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
게 됐다.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결국 보따리 몇 개를 들고 찾아든 곳이 가
락동.
갈 곳 없어 정착한 화훼마을
“판자집에 얹혀 한두 달 살았을까. 철거를 한다며 나가라고 하더군요. 아무
말도 못하고 짐을 싸 나오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했어요. 갈 곳
이 없어 주변만 맴돌고 있는데 얼마가지 앉아 비닐하우스촌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비닐하우스에 짐을 풀었어요.” 이 씨는 그렇게 화훼마을과
인연을 맺었다. 연탄재로 메운 구덩이 위에 지은 비닐하우스라서 바닥에
합판이라도 깔아야했지만 합판 살 돈마저 없던 그는 12월 혹한의 맨땅 위
에 옷 몇 개 깔고 한달 동안을 지냈다. 밀가루 한 봉지, 연탄 두 장을 외상
으로 사다가 수제비 장사를 시작했지만 한 그릇도 못 파는 날이 더 많았
고, 그때마다 라면 한 개로 다섯 식구가 한 끼를 때워야했다고 그는 말했
다.
“그나마 몇 푼 벌어 쌀밥을 했는데 밥이 빨갛더라고요. 나중에야 물이 썩
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목이 마르니 그 물이라도 먹고살아야지 어떻게 해
요. 애들은 매일 배가 아프다고 울었어요. 전입신고마저 되지 않아 거주지
를 다른 곳으로 해놓다보니 애들 학교는 멀고, 먹는 것도, 물도 시원찮은데
등교길에 시달리기까지 해서, 애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학교에서 돌
아오곤 했어요. 하루에도 열두번 씩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생각을 했지만
갈 곳이 없었어요.” 첫째 딸만 빼고 나머지 자식들은 중학교만 마쳤다. 화
훼마을 사람들이 투기꾼이 아니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씨는 평
생 방 2개 짜리 집에서, 석유 보일러가 놓인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지난 14년 동안 여기서 세금 내라는 것 다 내고 살았어요. 선거 때만 되
면 구청장,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찾아오더니, 이제 오고 갈 곳도 없어 도움
을 달라고 하는데 쳐다보지도 않아요. 사실 주민등록을 옮겨주는 것은 바
라지도 않아요. 그저 살던 집만 원상복구 시켜주면 되는데, 거지같은 집이
라도 기어들어 갈 곳만 있으면 좋겠는데….” 비정하다고 이 씨는 말했다.
없는 사람들은 제 살이라도 나누어주며 살지만 힘있는 사람들은 등돌리며
사는 세상이라고 이 씨는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알아요? 우리가 어
디로 가야하는지?” 라고….
1999년 2월 12일 금요일 제13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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