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매체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서유럽, 동유럽, 북미, 남미의 진보적 대안언론이 1950-80년대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내부 구조는 어떠했는지,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당사자들은 직접 만나 꼼꼼하게 취재하듯이 분석한 책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대안언론과도 밀접히 연결돼 있다. 미국의 몇몇 대안매체는 한국의 역사와도 밀접히 연결돼 있다.
저자 존 다우닝(John Downing)은 1940년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과 런던대 정경학부를 나와 1988년 현재 뉴욕 헌터대 교수로 사회학과커뮤니케이션 경제학 등을 연구하고 소련매체 연구논문이 많다.
대안언론의 제1덕목 : 내부 민주주의
저자는 “대안매체를 지배하는 원칙과 자주관리 매체의 역사적 경험에 관해 면밀히 검토하는 건 사회주의자들, 여성운동가들, 급진론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존 다우닝은 이 책에서 주류 언론을 극복하고, 정치적 해방, 경제적 평등, 문화적 자주를 위해 복무하는 언론을 희망했다. 다우닝은 이 책을 쓰면서 철저히 계급적 관점을 유지했다. 다우닝은 1980년대 전세계적으로 전개중인 급진적 언론운동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 설명한다. 프랑스의 <리베라시옹>이 계속 살아 있고, 1979년 서독에서 <타게스 차이퉁>이 출현했고 미국에서 민주 커뮤니케이션 연맹과 매체동맹이 결성됐다는 거다.
다우닝은 매체를 소유형태에 따라 구분한다. 독점자본가들이 주식의 대부분을 장악한 언론, 국가나 공공기관이 소유권을 장악한 언론,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매체의 이상적 운영방식은 자주관리라는 거다. 자부관리는 언론노동자들 또는 매체노동자들이 매체를 완전히 소유하거나 부분적으로 소유하고서 민주적 방식으로 편집하고 제작 편성하고 영업하는 걸 말한다.
미국식 통치에서 언론은 통치 도구(수단)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미국언론은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에서 급성장한 좌파운동을 정보기관들이 탄압할 때 미리 분위기를 조성하고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뉴욕 타임즈>도 이런 캠페인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쟁의가 일어날 때 미국의 매스미디어는 일방으로 자본가를 지지하고 응원했다.
대안매체운동은 운동의 순수성과 도덕성을 지킨다는 면에서는 성공했지만 대중성 확보에는 실패했다. 미국의 <내셔널 가디언>이 전성기에 발행한 부수가 4만5천부에 불과하고, 이탈리아의 <일 마니페스트>가 창간 직후 20만부에서 3만부로 떨어졌다. 다우닝이 강조하는 건 ‘매체 내부의 민주주의’다. 구성원의 평등한 급료체계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업, 종사자들의 전문성이다.
번역서가 나온 1988년과 오늘의 한국언론 상황
역자 김종철은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 1967-75년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1988년 현재 한겨레 논설위원이었고, 지금은 <녹색평론> 발행인이다. 동아투위 출신들이 대부분 기업의 하수인으로 들어가거나 지난 10년의 자유주의 정권시절 전문성 없이 지상파 방송사 주변에서 이사와 사장 등으로 행세한데 비하면 김종철은 맑은 길을 걸었다. 김종철은 1975년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야인시절 밥벌이를 위한 번역작업에서도 <제국주의론>(공역), <산업혁명사>(공역), <프랑스혁명사> 등 래디컬한 책을 주로 내놨다.
번역자 김종철이 이 책을 번역한 계기는 1988년의 한국 언론이 처했던 상황에서 기인한다. 1980년대 말 한국에서도 언론사 노동조합이 속속 들어서고 대안언론운동의 일환으로 출발한 <한겨레신문>이 창간하는 등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연관성 있다. 1988년 초겨울 한국의 권력과 독점자본의 유착과 더불어 언론의 행적이 국회 청문회 심판대에 올라 온 국민의 폭발적 관심을 불렀다. 한국에서 언론과 언론사 경영주들이 알몸을 드러내 보인 적은 없었다. 언론기업주들을 신문할 때 고양이 앞의 쥐처럼 행동한 의원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언론의 위력을 명백히 확인했다.
22년이 지난 지금은 <한겨레>를 대안언론으로 보기 어렵고 언론사 노조도 마찬가지다. 대신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는 인터넷 기반의 민중언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이들 대안언론들이 역사의 교훈을 통해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찾아보라는 의미로 소개한다. 번역서의 순서대로 꼼꼼하게 축약해 소개한다.
그러나 400쪽 가까운 이 방대한 보고서 수준의 번역서는 몇 가지 아쉬움이 있다. 이 번역서 어디에도 원전의 정확한 이름이 없다. 동시에 원전의 정확한 발행연도도 없다. 다만 본문을 더듬어 보면 이 책의 원문은 1982년에 작성된 것이다. 또 평생 신문쟁이로 살아온 번역자의 한계 때문에 진보적 대안‘방송’사의 전문 용어를 제대로 옮기지 못했다. 예로 ‘액세스 프로그램’ 또는 ‘시청자 참여(제작) 프로그램’으로 번역할 것을 ‘공개적 접근의 사례들’이라고 번역해 놓고 있다. 잦은 오탈자도 흠이다.
자주관리 대안언론의 종합분석 보고서
이 책은 자주관리 언론의 조직에 관한 정치적 경험을 최초로 세부적으로 비교 연구했다. 이 부문에선 프랑스의 자주관리 일간지 리베라시옹(Liberation)을 연구한 F. M. 사뮤엘슨의 \’Il Etait Une Fois Liberation\'(파리, 1978)란 책이 거의 유일하다. 민중매체 조직에서 제3세계의 경험은 풍부한데도 이 책은 푸에르토리코를 다룬 몇 페이지를 제외하면 그런 경험에 관한 자료는 전혀 없어 아쉽다.
세계인은 매체가 제공하는 여흥과 정보의 질펀한 향연에 탐닉하고 있다. 이 연구는 서구와 동구의 매체양식에 대해 진정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불협화음을 내는 일군의 매체의 경험들에 관한 보고다.
법인, 국가, 교회, 정당의 소유도 아니고 노조의 소유도 아닌 ‘자주관리’ 매체 안에서 일상의 상황을 통해 경험해온 바로 그 권력을 초점으로 삼고 있다. 선택된 사례들은 자유민주주의 미국, 파시즘 붕괴직후의 포르투갈, 1969년 뜨거운 가을 이후 이탈리아,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동유럽의 것이다.
모순덩어리 수정헌법 1조
모순은 미국의 수정헌법 1조에서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미국의 매체평론가들은 언론자유가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주제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여성,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메리카 원주민은 처음부터 공적 영역에서는 제외한 이 헌법은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다. ‘균형’ ‘객관성’ ‘다원론’은 일단 적용되면 혼란에 빠지는 구호들이다.
베리건이 검토한 서유럽 사례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녀가 인용하는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액세스 프로그램)에는 영국의 <열린 문>, 네덜란드의 <반 온데렌>이 있다. <열린 문>은 중상층 이미지를 갖고 있는 BBC-2TV의 프로그램으로 주말 심야에 방영하고 일요일 오후에 재방송하는데 주요 시간대엔 방영하지 않는다. 이 프로 방영 때는 시청률이 떨어진다. 특정 이익집단을 주로 다룬다. 해당 집단은 원하면 필름의 편집에 참여해 논평할 수 있다.
그러나 BBC는 “인종주의적 감정을 부추기는 시도”를 하면 안 된다는 편성지침에도 가끔씩 압력집단의 프로그램 제작을 도왔다. ‘이민 방지 캠페인’이란 이름의 한 집단은 명백한 反흑인단체로 이 프로에서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런 프로에도 인종주의의 힘이 작용했다.
네덜란드 액세스 프로그램 <반 온데렌>
네덜란드어로 ‘민중으로부터’와 ‘아래 쪽을 주의하라’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 <반 온데렌>은 매우 흥미 있다. 매주 방영하려고 프리랜서 전문가들(전문 리서처)이 필름을 제작했는데 평범한 노동자의 임노동 경험과 그 느낌이 내용이었다. 공적 인물, 심지어 노조간부의 발언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참여자들이 프로그램 내용을 결정하고 편집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프로는 시청률이 높은 두 연속물 사이에 방영해 90만 명 이상 시청한다. 이는 네덜란드에선 상당한 시청률이다. 이 프로는 네덜란드 TV에서 상당히 외로운 위치인데도 베리건의 연구에서 인용한 모든 사례 가운데 진정한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에 가장 가까이 갔다.
서구의 매체정책에서 대중의 공개적 참여라는 비전을 향해 움직이는 듯 보이는 프로그램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우리는 이런 참여는 지역적 관심사를 보다 광범한 전국적 정치운동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역사회는 상대적으로 고립돼 여러 단위로 분할돼 있기 때문이다. 민중이 자본, 국가, 교회, 다른 억압적 권력기관들에서 독립해 ‘자신의’ 매체를 건설할 가능성은 얼마나 클까?
동구매체의 수사법 : 전통벨트에서의 생활
1966년 동독에서 발간한 사회주의 저널리즘에 관한 공식 텍스트를 살펴보자. 여기엔 부질라브스키의 저널리즘에 관한 텍스트도 있다. “언론인의 역할은 국가의 정책을 설득력 있고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고 상부로부터 내려오는 경제적 명령의 앙상한 뼈에 매력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살을 붙이는 것이다.” “사회주의 언론인은 혁명 정신에서 모든 인민의 교사이며 대중을 교육시키는 사람이다.” 매체 커뮤니케이션은 서구에서 민주적 매체가 그렇듯 소비에트 진영 국가들 안에서도 위기상태에 있다.
실질적 대안 라디오
70년대 새로운 발전은 라디오의 이용이었다. 1970-73년 칠레 ‘인민의 단결’기에 나온 두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 하나는 노조연합이, 다른 하나는 혁명좌파운동이 운영했다.
그리스에서 1973년 11월 파시스트 대령들에 맞선 봉기기간에 아테네 공예대학 학생들이 라디오 송신기를 가동했다. 내용은 봉기의 정보와 저항의 호소, 군대와 경찰의 동향 뉴스를 방송했다. 1974-75년 포르투갈 노동자들은 두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75년 11월 강제 폐쇄 때까지 운영했다.
이탈리아에선 1975년 좌파의 자주 라디오 방송국들이 국가의 방송독점에 맞서 방송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1년 뒤 지방방송의 규제를 풀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이 혁명적이지 않은 수많은 자주 방송국들이 이탈리아에 있다. 1968년 체코에서 자주관리하던 라디오와 매체의 역할도 잊지 말자.
프랑스 게릴라 라디오 방송국에는 미테랑 정권이 1981년 법을 개정하기 전까지 운영했던 라디오 ‘꾀르 다씨에르’(강철 심장)이 대표적이다. 이 방송국은 1979년 철강 노동자의 장기 파업동안에 로렌 주의 롱위에서 여러 달 방송했다. 프랑스 독립라디오에는 라디오 껭껭, 카날 75, 모엥, 멜렁, 프레깽스 노르, 블뢰, 7, 코르시카 엥떼르나쇼날, 리유 80, 질다 등이 있었다. 1981년에도 파리에서 방송하는 ‘이씨 에 멩떠넝’, 아네씨의 공산당 연합노조의 방송국인 라디오 ‘옹드 쀠르’ 등이 있다. 이탈리아 산 레모에서 프랑스까지 전파가 도달해 하루 24시간 방송하던 시설 좋고 전문적인 라디오 K도 있었다. 프랑스 인구의 약 2/3이 자유방송을 지지한다. 프랑스 정부가 방송국들을 부단히 폐쇄했는데도 법은 계속 농락당했다. 이탈리아가 자유지역방송을 허용한 사실은 다른 서유럽에 분명한 선례였다.
서독과 영국은 프랑스보다 자유방송의 사례가 적다. 주목할 만한 서독의 방송국은 라디오 ‘페르테 페쎈하임’인데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삼각지에 위치해 공통의 방언은 물론 라인강 핵발전소 저지라는 공통의 요구를 갖고 있었다. 주민들은 국경이 무의미했다. 보통 하루 12-40분 동안 송출하는 방송을 1977년에 시작했다. 서독과 프랑스 경찰은 설비를 압수하고 제작자를 체포하려고 거듭 시도했지만 지역민의 지지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제작자는 경찰을 피해 방송국을 철저히 분산시켰다. 16마일 정도 가는 낮은 주파를 사용하는 6개의 송신기를 서로 다른 지역에 설치하고 36개의 중계안테나를 세웠다. ‘페르테 페쎈하임’의 방송내용은 순수한 생태학적 관심부터 다양한 노동계 갈등과 문화적 주제까지 확대하고 ‘RVF 드레예클란트의 친구들’이란 공개운동집단을 만들었다. 1980년대에도 RVF는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방송허가를 받았다.
실질적 대안 신문
민중적 커뮤니케이션 욕구는 언론경영주나 거대기업을 위해 일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신문을 운영하기 위해 자주관리집단을 조직하고 싶다는 인쇄매체 언론인들의 욕구와 함께 했다. 프랑스신문 <르 몽드>가 대표적 사례다. 르 몽드는 여러 해 걸쳐 조직됐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 기자들은 1980년대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인수를 시도할 때 독립 대안매체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굳이 혁명조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다. 대중에게 말하고 감정을 직접 표현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배려하면 된다. 이런 방식은 좌파에겐 쉽지 않다. 자주관리는 <스코티쉬 데일리 익스프레스>나 매디슨 위스콘신의 <프레스 거텍션>처럼 파업에서 태어난 신문도 포함된다.
1980년대에는 매체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이 세계적으로 커졌다. 프랑스의 <리베라시옹>이 살아있고, 1979년 서독에서 <타게스 짜이퉁>이 생겼고, 미국에서 민주커뮤니케이션연맹과 매체동맹이 결성됐다. 대안매체를 지배하는 원칙과 자주관리 매체의 역사적 경험에 관해 면밀히 검토하는 건 사회주의자들, 여성운동가들, 급진론자들 전체에겐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한 연구서인 존 다우닝의 책 <매체 기계>(The Media Machine, 런던, Piuto 출판사, 1980)도 참고할 만하다.
미국의 급진적 대안매체
대안매체는 공식매체가 미처 보지 못하고 비워둔 황무지에서 번성한다. 때로는 <롤링 스톤>이나 <빌리지 보이스>처럼 상업적 독자층을 발견해 기성매체에 특별히 편입하는 경우도 있다. 큰 제도권 매체도 조금씩은 비판적 목소리를 위한 공간을 두고 급진적 칼럼니스트를 일부 이용한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이들은 주요한 흐름의 한 단면만을 대표하는 데 불과하다. 기성매체들은 미국의 대중에게 엄청난 애국적 거짓말을 거듭 팔았다. 그들은 언제나 여성운동을 조롱하고 잘못 대변했다.
주요 매체들의 소유와 통제 유형은 언론이 미국에서 독립적 ‘제4계급’이 되기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입증한다. 광고는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을 지탱하는 기본 원천이다. 신문들은 수입의 60-80%를 광고에 의존한다. 매체 세계에서 권력의 집중과 중앙화는 심각하다. 1978년 신문을 제작하는 회사의 5%가 일간지 부수의 48%를 차지했다. 1923년엔 5%의 신문사가 부수의 50%를 차지했다. 텔레비전은 1972년 네트워크에 가입한 방송국이 전체 시간의 60%를 네트워크 프로그램으로 채웠다. 1972년 영화사의 0.2%가 수익의 53%를 차지했다.
<뉴욕 타임즈> 경영진 말대로 “인쇄하기 적합한 모든 뉴스”를 보도한다는 공식적 윤리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 언론은 민중의 통제를 크게 벗어나 있다.
대안매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격
19세기 초 토크빌(1805-59)은 미국의 장점으로 “작은 매체들의 번성”을 들었다. 그러나 FBI가 대안매체를 쫓아내라고 건물 주인들을 협박하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매카시는 다수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반대의 자유는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감정은 미국의 지배계급에게 아주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매카시의 득세 3년 전 조지 케넌은 <포린 어페어즈>(Forein Affairs)에 “소련을 봉쇄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했다. 미국 내 비판적 매체를 직접 겨냥한 말이다.
에마 골드먼의 자서전 <나의 삶을 살다>(Living My Life, 뉴욕, 1970, 전 2권)에 잘 나오듯이 이런 문화는 사회주의 소련 탄생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미국에서 에마 골드먼의 혁명적 생애는 1890년대에 시작돼 1919-20년에 파머(Palmer) 습격과 더불어 끝났다. 급진적 언론에 대한 국가의 억압이 시작된 건 바로 이 때부터다. 1906년 발간한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은 큰 반향을 얻었다.
1919년에 윌슨 대통령이 파머(Palmer, Alexander Mitchell, 1872~1936)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는데, 2년 동안 법무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그는 정치적 과격론자, 혐의가 있는 반정부주의자, 좌익조직, 거류 외국인 등에 반감을 표출하는 전례 없는 운동을 벌였다. 에마 골드만과 정부전복 활동의 혐의가 있는 여러 사람들을 추방했다. \’파머의 일제 검거\’ 기간 동안 기본적인 시민의 자유를 무시한 일이 알려지면서 파머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었고 결국은 그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무너졌다. 파머는 죽을 때까지 민주당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대통령후보인 앨 스미스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미국도 모든 정치운동과 매체를 체제 안에 두려고 세심하게 계획을 세웠다. 파머 습격 이래 에드가 후버의 장기적 지배로 FBI가 강화 확대하면서 국내문제에 대한 CIA의 개입이 커지고 국가안보위원회의 탄생, 도시에서 경찰의 ‘붉은 특별반’ 유지, 군사정보부와 국방성의 국내문제 개입 등으로 전국의 정치생활을 통제했다. 작은 대안매체 탄압은 이런 역사에 근원을 두고 있다.
데이비드 암스트롱이 1960년대의 대안매체를 연구한 <무장을 알리는 나팔>(A Trumpet to Arms, 보스턴, 사우스 앤드 출판사, 1984)은 통찰력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기성질서에 근본적으로 대항하는 대안매체를 조직하는 데 나타나는 문제들을 검토하고 있다.
민중의 투쟁에 침묵했던 미국의 기성언론
미국은 1975년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같은 해 포드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뉴욕시는 파산했다. 노조로 조직된 디트로이트 등 북부와 동북부에서, 거의 노조가 없는 휴스턴 같은 남부로 고용이 이동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대규모 흑인반란 등 사회운동이 확산했다. 60년대, 70년대 버클리의 ‘자유언론운동’의 뿌리는 50년대와 60년대 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대대적으로 벌인 징집반대와 반전운동과 같은 남부의 민권투쟁에 있었다.
주요 매체는 서남부의 기록에 없는 노동자들, 아이티의 피난민들, 사우스다코다주와 노스다코타주의 인디안 공동체들, 켄터키주의 실직 광부들의 투쟁을 외면했다. 이런 사정을 개선하려는 저항매체는 많지 않았다. 산업별 노동조합회의가 1930년대와 40년대 흑인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고 오늘날 노조원 사이의 인종적 다양성이 높아졌지만 이것이 작업장을 넘어선 정치적 연대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60년대 미국 민권운동의 성과와 한계
절정에 이르렀던 60년대의 비상한 확산에서 운동이 침체하기 시작함에 따라 매체의 대다수가 급속히 사라졌다. 그러나 <내셔널 가디언>과 버클리의 KPFA는 60년대가 아니라 1940년대부터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가디언>은 영국에서 현재에도 나오는 <가디언>과는 아무 관련 없다. 60년대 운동은 맑은 날에 반짝한 번개가 아니었다. 많은 대안매체들이 70년대에 사라졌으나 다수가 남아 있다. 그리고 다수는 70년대에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60년대의 사회운동은 두 얼굴을 가졌다. 긍정 : 흑인운동은 흑인의 지도력을 요구하고 그것을 쟁취했다. 많은 대안신문이 미국의 군사활동에 맞섰다. 부정 : 얼어붙은 50년대 냉전시기에 대한 반동이라는 특징이 각인돼 있다. 매카시 시대의 기구들은 여전히 민중을 위협하고 침묵시키기에 충분했다. 소련의 첩자라는 거짓말을 안 했다고 로젠버그 부부는 처형당했다. 50년대의 또다른 억압인 ‘성적 청교도주의’는 규제가 이완되면서 운동권 내 남성우월주의가 도처에 나타났다. 탈영한 군인들은 여성운동가에게 ‘위안’ 받아야 하고, 전투적 남성운동가들은 여성운동가와 동침할 권리가 있고, 여성들은 정치적 지도자나 사상가로 부적합하다는 생각들이 60년대 운동사회의 한 풍조였다.
내셔널 가디언과 가디언
<내셔널 가디언> 뉴욕, 1948년, 상근직 10명, 주간, 1948년 3만5천부, 1949년 7만5천부, 1953년 4만5천부, 판매, 구독, 기부
<가디언> 뉴욕, 1967년, 상근직 23명, 주간, 2만부, 판매, 구독, 약간의 광고, 기부
<가디언>은 1967년 큰 분열에도 미국 좌파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운영하는 독립신문이다. <가디언>은 매카시즘, 침묵의 50년대, 60-70년대 사회운동을 겪어내고, 1980년대 신우파와 신냉전 시기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가디언은 일관성 있고 주목할 만한 위치를 유지했다.
공동창간자 3명 애런슨과 벨프레이지, 잭 맥매너스(1961년 사망)는 1948년 <내셔널 가디언, 지켜야 할 그 무엇>을 창간했다. 가디언은 플랭크린 루즈벨트의 죽음 이후 1940년대 말 미국의 정책이 급속히 보수화된 충격 때문에 생겨났다. 2차 대전 결과 여성의 지위는 올랐고 노조도 어느 정도 안정된 권력을 갖춰 종전 직후 15개월 동안 전국에 걸쳐 전투적 파업을 벌였다. 진보는 무적은 아니라도 적어도 웬만큼 유지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애런스와 벨프레이지는 미국이 점령한 전후 독일에서 제2의 나치가 급속히 재건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이 그리스 공산주의 인민봉기를 진압하려고 의회에 대규모 원조를 요청했다. 노동자 파업권을 억제할 목적으로 1947년 나온 태프트-하틀러 법도 생겼다. 소련은 1948년 유고의 독자적 사회주의를 공개 규탄했다. <내셔널 가디언>의 모스크바 특파원인 애너 루이스 스트롱은 미국의 첩자라고 비난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은 급진적 독립주간지를 창간했다.
애런스와 벨프레이지는 군국주의와 냉전 세력은 물론 사회주의 조국 소련도 거부했다. 미국공산당에 종속되기도 거부했다. 그러나 공산당 활동의 자유를 탄압하거나 봉쇄하는 어떤 기도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노동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평화집단을 적극 지지했다. 당시 <뉴욕 타임즈> 같은 신문들이 덜레스 형제나 매카시 상원의원의 가락에 맞춰 자체 검열하던 때에 가디언은 국내외 특파원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듀보이스와 윌프레드 버쳇 두 특파원을 활용해 정통한 정치언론의 진수를 <내셔널 가디언> 보여주었다.
가디언은 헨리 월러스(1941-45년 미국 부통령)의 진보당을 지지했다. 로젠버그 부부를 지원한 유일한 신문이었다. 부부의 처형을 반대하는 국제적 캠페인을 벌였다. 하원의 외롭고 단호한 급진주의자 ‘비토 마칸토니오’의 선거유세에 신문의 모든 것을 투입했다. 1940년대 말 비토 마칸토니오 등 일부 진보적 정치인들은 공산당간부의 기소를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의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비토 마칸토니오 하원의원은 공산당지도자의 기소는 “모든 미국인의 기본권과 헌법을 파괴하려는 조잡하고 잔인한 술책”이라고 비난하였다.
매카시에 정면으로 맞섰던 <가디언>
가디언은 기사 본문에 ‘만약(if)과 그러나(but)’를 전혀 쓰지 않고 직접 매카시를 공격했다. 동시에 가디언은 소련의 반유태주의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쿠바의 바티스타의 전복과 새로운 피델리스타(카스트로) 정부를 지지했다. 비토 마칸토니오는 이후 정치적으로 변절했다. <피터 드러커 평전>(이재규, 한국경제신문사, 2001)에는 “대공황 시기 뉴욕에서 가장 뛰어난 두 명의 정치가를 ‘반권위적’이고 ‘급진적’으로 만들었는데 그들은 피어렐로 러과디아와 비토 마칸토니오였다. 그러나 그들 역시 민주당원이 되면서 백인 개신교들에 기반을 둔 중산층으로 변했다”고 기록한다.
매카시 상원 정부활동위원회는 애런슨과 벨프레이지를 출두시켜 제5수정조항을 택하거나 구독자 명단과 주소를 위원회에 제출하라고 강요했다. 매카시는 벨프레이지를 추방시키기로 했다. 1953년 빨갱이 마녀사냥이 시작되다. 당시 미국인들은 FBI가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신문 판매점에서 신문을 살 때 주위를 살핀 뒤 <데일리 워커(공산당 기관지)>와 <내셔널 가디언(좌파 주간지)>을 <뉴욕 타임스>나 <헤럴드 트리뷴>속에 감추어야 했다. 어떤 사람을 해고하고 싶은데 적당한 이유가 없으면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로 ‘의심스럽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가수가 참가한 모임에서 박수를 친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볼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난무했다. 살벌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마녀 사냥이 벌어지는 1953년에도 미국 수정 헌법 제 1조는 “모든 사람은 신념에 따라 행동할 권리가 있고 어떤 법률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한국과 내셔널 가디언의 밀접한 연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포들은 <국민보>라는 이름의 한글 신문을 자체 제작했다. <국민보> 1951년 8월29일자에는 한국전쟁의 상황을 담은 <내셔널 가디언>를 옮겨 실었다. 이 기사의 제목은 “국제여성연맹 조사단 보고 「내셔널가디언」에 게재”였다. <국민보>는 이 기사에서 “한국에서 미 제국주의가 감행하는 만행을 조사한 국제여성연맹 조사단의 보고는 뉴욕에서 발행하는 ‘내셔널가디언’에 실렸는데 참혹한 시체와 무덤, 파괴와 잿더미 사진까지 첨부했다”고 소개한다. <내셔널 가디언>은 전쟁 당사자였던 제나라 미국 도심 뉴욕 한복판에서 용기 있게도 미군의 전쟁범죄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아래 사진의 당시 <국민보> 1951년 8월29일자 2면에 실린 <내셔널 가디언>의 기사는 매우 길지만 일부를 요약하면 이렇다. “국제여성연맹 조사단 보고를 <내셔널 가디언>이 1951년 8월15일자 뉴욕판에 게재했다. 보고서는 “미군이 평양국립예술극장을 유곽으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평양의 수많은 시민들이 다 같이 미군의 야수적 만행에 대해 말하였다. (중략) 미군들은 평양 인근 송산리 여맹 위원장의 옷을 벗기고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불에 붉게 달군 쇠뭉치로 그녀의 국부를 쑤셔 무참히 죽이고 그의 어린 아들까지 생매장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 <국민보> 1952년 8월6일자에는 <내셔널 가디언> 주필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리 교포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는 기사도 있다. 이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미국 국민의 총의를 대표한 자유신문 <내셔널 가디언>의 주필 씨드릭 벨프레이지 씨는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이래 열렬한 진보 인민층의 대환영을 받았다. 벨프레이지 씨는 미국의 제3당인 진보당 조직 이래에 전 미국의 진보적 인사를 총망라하는 진보적 주간신문인 <내셔널 가디언>을 창간해 50만명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는 바 금년 11월 전으로 백만 명의 구독자를 얻으려는 운동을 성취하기 위하여 로스앤젤레스에 체류 중이다. 로스앤젤레스 각 단체는 동씨를 후원키 위하여 저녁마다 민중을 대소집회를 개최하는 중이다. 미국 정치동향에 대하여 그는 소견을 발표하되 ‘미국이 파쇼화한 것을 이제 구원하기 불가능할 만큼 한심하다’고 밝혔다. ‘다른 파쇼국가들이 당한 운명을 미국도 그대로 당할 것인데 우리 진보 계급은 최선을 다해 이 재난을 속히 지나가게 하는데 노력할 것뿐’이라고 말했다. 유럽에선 정치인이라면 적어도 정치, 경제, 각 방면에 기초적 지식을 가지고야 나서는데 미국은 단지 돈만 있으면 정치인으로 나서니 그 위험성을 재론해 무엇 하느냐고 연설하였다 한다.”
이 정도라면 <내셔널 가디언>이 남의 나라 캐캐묵은 주간신문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기간에 우리는 이런 언론을 한국에서 본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노빠가 진보언론으로 둔갑하거나 셋만 모이는 따로 정치그룹 차리는 한 줌도 안되는 좌파언론이 사오분열하는 한국 땅에도 <내셔널 가디언> 같은 언론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가디언의 간결한 문장
FBI 요원들이 <내셔널 가디언> 구독자의 집을 방문해 구독중지를 압력했다. 뉴욕타임즈 등 위대한 거대 신문들은 매카시가 벨프레이지를 심문하고 이민 귀화국이 그를 추방할 때 한마디의 항의도 없었다. 사람들은 대안매체를 좌파의 대대적 정치적 부상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는 1955년에 <내셔널 가디언>, <먼슬리 리뷰>, 스톤의 <위클리>, KPFA 같은 매체들의 끈질긴 노력이 없었다면 상황은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1948-1967년 사이 <내셔널 가디언>의 내부엔 세 가지 주요원칙이 있었다. 민주적 내부논의, 명문화된 최종 편집권, 기사작성과 표현에서 전문가적 완벽성이 그것이다. 모든 직원이 매주 전체회의에 참가했다. 전무인 맥매너스는 많은 논설을 썼다. 진보적 인쇄공 관리인(노동조합부)과 맥매너스는 긴밀히 협조했다. 듀보이스, 스트롱, 버쳇 등 비상근기자들을 광범하게 활용했다. 여성과 흑인 특파원을 보도에 참여시키려는 의식적 노력이 있었는데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 처음부터 상근직원엔 몇 명의 여성과 한두 명의 유색인이 있었다. 애런스과 벨프레이지가 서로 편집을 맡았다. 급료는 모든 사람이 동등했지만 안정적이진 못했다.
애런스와 벨프레이지가 전문가의 자질과 간결함을 강조한 건 기성언론의 규범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간결하지 못한 문장이 주장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좌파의 파벌적인 전문 용어들이 미국문화나 어떤 곳에서도 전적으로 비생산적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인터넷 대안매체들은 이런 지적에 얼마나 동의할까.
1967년 대격변까지 세 창간자 가운데 두 사람의 죽음과 추방, 매카시와 그 앞잡이들의 침입, 간헐적 재정위기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전무가 1965년 내부 권력을 장악하려고 해 빚어진 분열로 손상을 입었다. 벨프레이지가 추방돼 떠난 직후 일부 직원이 애런슨과 맥매너스를 대립시키려고 했다.
가슴 아프지만 필요했던 1967년의 분열
1967년의 내분
: 60년대 들어온 젊은 직원들이 신문의 내용과 노선에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벨프레이지가 떠나고 맥매너스가 죽은 뒤 애런슨은 절반 남은 소유권을 직원들에게 양도하고 신문을 완전히 떠났다.
1967년 이래 <가디언>
: 1970년대 내부의 모순이 무르익어 상근직원 중심의 선거파와 훨씬 더 개방을 요구하는 파로 양분됐다. 전자가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문서철과 시설을 파괴하고 반대파의 사무실 출입을 막았다. 반대파는 단념하고 나가 잠깐 동안 <해방된 가디언>을 만들었다. 이 때부터 <가디언>은 초민주주의적 구성원들을 버리고 중국을 철저히 지지하고 소련을 사회제국주의 세력으로 규정해 반대했다. 많은 신문 내용이 ‘모택동주의’ 주장을 실었다. 신문은 당시 모택동주의 파벌 중 10월 동맹과 긴밀히 관계 맺었다.
그러나 1975년 많은 직원이 중국의 외교정책에 의문을 느끼게 됐다. 내부 투표에서 10월 동맹 후보들은 근소한 차로 패했다. 그들은 신문을 나갔다. 이 때부터 <가디언>은 다시 특정 정치집단에서 독립했다. 1982년 새 편집이 된 빌 라이언(Bill Ryan)도 그런 사람이었다.
가디언의 내부조직 : 수정된 민주집중제
1982년 신문의 구조는 수정된 민주집중제였다. 신문은 해마다 ‘5인 조정위원회’를 선출했다. 그러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전체 직원이었다. 모든 직원이 주급 120달러를 받고 주마다 약 50시간 일했다. 자주관리는 일반적 자본주의 경영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1974년엔 여성이 한 명밖에 없었는데 1982년엔 남녀 비율이 반반이 됐고 편집부장과 외신부장은 여성이었다. 1982년 사무실에 유아들을 공동으로 돌볼 시설을 마련했다. 그러나 신문 내부에 제3세계인들의 지위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내분 이래 신문은 전적으로 백인으로 운영했다. 신문 내부의 4명의 ‘흑인회의’는 신문의 영업 관습이 제3세계 민중을 불쾌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더 큰 문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계약 작업도 처리하려고 자체 조판시설을 갖추려고 한 1979년에 생겼다. 이때 조판공들에게 봉급의 약 3배를 주었다. 그러나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시간제근무의 조판공 7명을 감원하고 윤전시설을 폐쇄했다. 언론인과 인쇄공의 분업은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다. 가디언에서 ‘영업’이란 말은 금기어였다. ‘영업’은 대안매체의 효율에 엄청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영업직은 편집직원들이 자기 공헌을 무시한다고 불만이었다. 그래서 영업직도 약간의 기사를 썼다. 그러나 실패였다. 영업의 극심한 스트레스는 줄지 않았다. 신문이 처음부터 비상근기자들을 이용해 외부의 목소리와 의견을 신문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런 관행은 재평가해야 한다.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KPFA
KPFA는 청취자들이 직접 후원하는 미국의 첫 번째 라디오 방송국으로, 1949년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이며 평화운동가인 루이스 힐(Lewis Hill)이 만들었다. 1980년대 KPFA는 FM94.1의 KPFA 버클리와 KPFK 로스앤젤레스 (90.7), WBAI 뉴욕 (99.5), KPFT 휴스톤 (90.1), WPFW 워싱톤 (89.3) 및 기타 27개 주에 약 60개의 지부를 가지고 있다. KPFA의 프로그램은 지역적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독창적이면서도 포괄적이다. 뉴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심층 취재, 연속극, 문학과 공연, 인터뷰와 리뷰 등 다양한 형식의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라이브 음악 방송과 시위 및 문화적 이벤트 취재,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직접 참여 방송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KPFA는 개방형 액세스 방송국은 아니지만, 지역 공동체에 대한 교육과 제작 참여를 조직하는데 애써왔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가 높았다. 일부 이사진이 방송국의 성격을 변질시키자 수많은 대중들이 항의 시위와 직접 행동에 나선 것에서도 보듯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참조 : http://www.kpfa.org)
독립영화페스티벌인 2005년 제9회 서울국제노동영화제에 나온
(KPFA on the Air, 2002, USA, 55 min, Veronica Selver)는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며 정치적 이견이 자유롭게 소통되는 공간을 라디오를 통해서 만들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시작한 KPFA의 정신을 드러낸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캠프에서 시작된 이 소박한 꿈은 평화운동가인 루이스 힐에 의해 KPFA의 기획으로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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