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인권위원회 간사 고상만
내 가족과 이웃이 더불어 아름답게 사는 꿈을 위해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인상을 단무지(단순, 무식, 과격의 성품을 가
진 운동가를 지칭하는 속어)로 단정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
장을 결코 굽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에
도 목을 매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도 이런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달리
흥분하는데 시간이 필요없다. 그만큼 쉽게 흥분한다.”
하지만, 이렇게 단정짓는 것은 큰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는 쉽게 흥분
하는 만큼 의욕과 정열로 넘친다. 인권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를 대변
하기 위해 자신의 열과 성의를 다 바친다. 20대 말의 뜨거운 피를 소
유한 그는 타협할 줄 모르고, 지치 줄 모르는 불도저 같은 인물이다.
생긴 것부터가 그렇다. 보통 키에 다부진 몸매는 스포츠 선수 같은 단
단한 몸매를 가졌을 것이라는 짐작을 쉽게 가능케 하고, 몸집에 비해
유난히 큰 머리와 안경 넘어 빛나는 그의 눈빛은 강렬하다.
그런 그의 행동은 날렵하다. 어딘가에 인권 사건이 발생했다면 자신이
가장 빨리 달려갈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수사관들에 비해 몇십배나 큰 사명감으로 현장을 뒤지고, 피해자의 증
언을 청취한다. 때로는 전국연합의 변호사들에게 법률적인 조언도 듣
고, 때로는 선배 활동가들에게 자문도 구하면서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
지 치밀하게 추리해간다.
95년말 발생한 경원대 장현구씨의 분신과 그로부터 이어진 학교의 탄
압, 학생들에 대한 징계와 수배, 구속, 지난해 9월 발생한 경원대 송광
영열사 추모비 탈취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는 성남지역으로 무시로 오르
내렸다. 분신현장에서부터 대공분실, 구치소, 법원, 변호사 사무실로,
인권단체 사무실, 토론회장, 농성장, 시위장으로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의 사무처는 전국연합 사무실이 아니라 그의 발길
이 미치는 모든 곳이다.
따라서, 그는 결코 단무지가 아니다. 오히려 열정적인 인권운동가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가 바로 오늘 소개하는 고상만(28) 전국연합 인권
위원회 간사다.
하지만,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그는 결코 순탄한 길을 걷지 못했다.
남들처럼 대학 들어가 선배들의 배려 속에 차분히 세미나를 받을 기회
도 없었다. 강원도 속초의 동우전문대는 학원 폭력이 극심했던 깡패
학교였다. 거기서 보고 배운 것은 대학 안에도 깽패들이 대낮에 칼과
낫을 들고 설칠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런 폭력에 맞서 이기는 것은
학우 대중과 같이 호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늘 인권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학교 학생처가 바
로 학원 폭력배의 조정실이었고, 그의 사주를 받은 폭력학생과 시내
깡패들한테 때로는 설악산으로 때로는 속초 바닷가로 납치되어 ‘죽지
않을 만큼 얻어 터지곤’ 했다. 그때마다 칼도 쥐고 싶었고, 낫도 들 수
있었지만, 학생처와 총장실 점거, 꾸준한 학우들에 대한 설득과 홍보,
조직활동으로 이를 극복했다.
그러던 89년 말 드디어 이런 폭력을 뚫고 절대적인 지지 속에 자주학
생회가 출범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승리는 곧바로 김용갑 총학생회장
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91년 정연석 동아리연합회장의 분신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운동하는 것은 곧 죽음일 수도 있는 공포 속에서 그는 도리어 단단해
졌다. 제적과 투옥, 다시 복학으로 이어졌던 그의 학생 생활은 이후 어
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를 이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의 학
교에서의 운동 경험은 곧 동우전문대 학원자주화운동사였다.
그런 그가 속초를 떠나게 된 것은 91년 김기설 열사의 분신 사건 이후
였다. 정연석씨 분신 사건 당시 고 김기설 씨는 전민련에서 활동하면
서 서준식 당시 전민련 인권위원장(현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고상만씨
의 끈질긴 요구에 결혼식 주례도 맡았다)과 함께 그곳까지 달려내려와
조사작업과 항의운동을 도왔던 인물이다. 이를 계기로 서씨와 인연을
맺게된 고상만씨는 이후 전민련 활동과 유가협 활동을 하면서 사회운
동의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하지만, 93년 5월 사랑하던 후배(현재 아내)와 사이에 그들의 2세 고충
렬이 생기게 되면서 학교에 복학을 하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학교를 마친 후 잠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벌이를 1년 남짓 하다가
들어간 곳이 전국연합 인권위원회이었다.
처음 그는 그곳에서 인권운동가로서의 꿈을 본격적으로 키워나간다.
하지만, 처음엔 너무도 절망스러웠다. 인권운동이 구속자 뒤바라지나
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현실, 기껏 구속사건에 대해 변호사를 연결해주
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는 운동판의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있
는 일이 너무 없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저는 숱한 사건들을 접하면서 분명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현실을 용남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사건이 또 묻히는구나, 저들은 치밀
하게 사건의 은폐를 획책하는데, 우리는 잠시만 흥분하고, 아주 소수만
사건을 잊지 않는 정도에서 또 다른 사건이 터지면 그리로 몰려가고
….”
그럴 때마다 가슴을 울리는 말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누구라고 이름
을 대면 많은 사람이 알만한 어느 열사의 아버지가 한 고백이 그것이
었다.
“4.19 때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고 싶었고, 5.18 때는 무관심했으며,
6월항쟁 때는 방관했다. 그런 태도가 바로 오늘 내 아들의 죽음을 맞
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무지와 무관심, 방관이 오늘의 답답할 정도로 답보 상태로 머물
게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김영삼정권에 들어서 인권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는 인권운동가들이 우선적으로 책임이 있지요. 언제부턴가 해결하기
쉬운 문제만 매달리고, 곧 지쳐 하고, 합리성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 법적인 부분에 너무 얽매이는 것이지요.”
때로는 우직한 그런 활동가이고 싶다는 그의 꿈은 의외로 단순하다.
내 가족과 이웃이 더불어 아름답게 사는 꿈-그런 인권운동의 목표가
아니겠냐고 한다. 그는 요즘도 바쁘다.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있는 향린교회의 한 구석에서 안
기부의 불법적인 연행에 항의해 분신한 김형찬씨의 사건 해결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활동가지만, 그의 바쁜 모습에서 열악한 한국
인권운동의 앞날을 개척하는 희망을 본다. 그는 사무실을 지키기 보다
는 늘 현장을 찾아 나서는 건강한 활동가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