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수의 항해> 파업과 공권력 사이
염소떼의 맨 꽁무니를 뒤쳐져서 따라가던 새끼 염소가 늑대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새끼 염소는 몸을 돌려 늑대에게 말했다. “늑대 아저씨, 제가 당신 의 밥이 될 운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명예롭지 못한 죽 음을 당할 수는 없으니까 피리를 좀 불어 주세요. 춤이라도 한번 추다가 죽 게요.” 늑대가 피리를 불고 새끼 염소가 춤을 추는 사이, 몇 마리의 사냥개 가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늑대를 쫓아 버렸다. 늑대는 새끼 염소 를 돌아다보면서 한마디했다. “학살자면 학살자답게 너를 냉큼 잡아먹을 일 이지, 격에 안 맞게 피리는 왜 불었담?” 이솝 우화에 나오는 ‘새끼 염소와 피리를 부는 늑대’ 얘기다.
*피리 부는 검찰
“검찰이 조폐공사 노조의 파업을 유도했다”이라는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 장의 발언 파문으로 온통 세상이 떠들썩하다. 더욱이 최근 들어 고관집 절도 사건에 이어 고급 옷 로비 의혹 사건, 재·보궐선거 50억 사용설 등 큼 직한 사건들이 잇따라 터져 나오면서 사람들이 갈피를 잡기 어려워하고 있 는 판국에, 검찰의 파업유도 사건마저 불거졌으니 엎친 데 덮친 꼴이다. 검찰 인사에서 고검장으로까지 승진했다가 부임할 곳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직권 해임된 진형구 전 부장은, “그날(7일) 술에 취해 기자들에게 무슨 말 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그러나 조폐공사의 파업을 유도한 적은 결코 없다 “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술을 깬 뒤에 하는 말도 횡설수설이다. 폭탄 주의 위력이 크긴 큰 모양이다. 검찰과 정부당국은 진 부장의 발언을 두고 “사실무근이고 왜곡된 얘기”라며 검찰 파업 유도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진 부장과 검찰은 지금 애처롭게도 이솝 우화 속에 등장하는 ‘피리부는 늑대 ‘의 형국이다.
*조폐공사 파업, 유도했는가
조폐공사 파업은 진씨의 말 그대로 과연 검찰이 유도한 것인가. 여러 가 지 정황에 비춰 유력한 편이나, ‘술김에 한 실언’이었다고 한사코 우기는 판이라 아직은 불명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위를 따지기 전에 우선 파 업의 전말부터 들추어보자.
조폐공사 노사분쟁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일어나기도 했지만, 지난해의 경우는 정부의 공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강도 높게 추진되면서 발단되었다 . 애초 기획예산위원회는 2001년까지 충북 옥천 조폐창을 폐쇄하고 경북 경산 조폐창으로 통합한다는 방침을 지난 해 8월에 밝혔다. 이런 내용의 기 획예산위 ‘경영혁신안’에 대해 조폐공사쪽은 통폐합에 필요한 소요자금이 800억원 정도에 이르고, 옥천 조폐창 매각이 용이하지도 않거니와 매각된다 해도 30억원 정도에 지나지 않아 자금조달이 곤란하며, 경제력 손실이 예상 되어 경쟁력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검토의견을 냈다.
그런데 지난 해 10월에는 공사쪽이 경영조정회의를 열어 99년 2월까지 조 폐창 통폐합을 앞당겨 추진할 계획을 갑작스레 발표했고, 같은 해 12월 들 어서는 기계와 설비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조폐공사 노조는 ‘조기 통폐합’에 반대해 파업을 벌이게 되었고, 회사는 노조 전·현 직 간부 74명을 직위 해제하는 한편 정리해고 계획을 노조에 통보함으로써 노사간의 분쟁은 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조 간부 7명이 구속되기도 했 으며, 노조원 700여명이 무더기 징계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금까지 도 구조조정에 따른 노사갈등의 요소가 깊게 도사리고 있을 뿐 아니라 언제 다시 표출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의혹과 진실
검찰의 파업 유도설은 아직은 ‘의혹’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 확실한 근 거가 없기 때문이고, 발설자 본인과 검찰이 그런 사실을 부인하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의혹은 좀체 풀 리지 않은채 오히려 더 확대되고 있다. 진형구 전 공안부장의 발언이 조폐 공사 파업의 전말과 크게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취중 실언’이 아니라 ‘취중 진언’으로 받아 들일만 하다는 것이다.
또한 조폐공사가 지난 해 9월18일 대검 공안부 주재로 ‘공안대책협의회 ‘가 열린 뒤, 곧바로 종래의 주장을 뒤집은 조폐창 통폐합 계획을 내놓았다 는 사실도 의혹거리들을 더 늘려놓는다. 그리고 미처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조폐창 통합을 강행하려 한 것이나 현재에도 경산 조폐창을 가동하고 있는 것 등이 진실의 끄트머리는 족히 될 것 같다. 진 부장과 강희복 조폐공사 사장이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 같은 것은 여기서는 차마 접어두기로 하 자.
검찰의 파업 유도설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해 국정조사권 발동과 특별검사 제 도입이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검찰의 ‘파업 기획’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이는 현 정권의 도덕성에 먹칠을 하는 것은 물론 국가의 존재기반마 저 뒤흔드는 중대사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노동계와 시민단체들은 조폐공 사뿐만 아니라 만도기계, 기아자동차, 서울지하철, 한국중공업 등 비교적 규모가 큰 사업장의 파업에도 공안당국이 개입한 의혹이 짙다는 주장을 하 고 있다. 노조운동 진영이 ‘파업 유도’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면서 거센 투쟁을 벌이는 것도 그것이 갖는 노동탄압의 심각 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노동계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공안적 노동 정책’과 ‘공작적 노조탄압’의 중단이다.
철저한 사실 규명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함은 너무도 마땅한 일이다. 그러 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책임을 물어야 하고, 똑 같은 일의 재발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책이 나와야 한다.
이것은 현 정권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올바른 길이다. 그렇지 않고는 노동 계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을 터이고, 노-정 대결은 더욱 첨예화될 것이다.
이참에 정부는 ‘노동개혁’을 근본에서부터 추진하는 진실한 자세를 갖추어 야 한다. 치졸한 방식의 노동탄압은 노동계의 거칠고도 맹렬한 항거만 낳을 뿐이다.
[저 자]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출 처] 매일노동뉴스
[발 행 일] 1999.06.15
[발 행 처]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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