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성급한 수사발표 이어 정치사찰 서둘러

황장엽 비서 망명사건으로 인한 ‘북한의 보복테러 비상’ 소식에 곧이

어 터진 이한영 씨 피격사건으로 정국은 확실하게 돌아섰다. 정부는

사건발생 다음날 안보·치안관계장관회의를 통해 “북한 공작원에 의한

암살”이라며 국가안보론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언론은 북의 고정간첩

보복테러에 초점을 두고 기사를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17일 황경하

경찰총장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전력이 있는 1천여명의 인사들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기화로 임시국회에서 안기부법 무효화 논의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3월부터 시행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북한의 소행으로 규정하는 주요한 근거는 이한영씨가 의식을 잃기전

손가락 두개를 펴보이며 ‘간첩이다’고 말했다는 현장목격자의 증언과

범행에 사용된 총기가 북한 사회 문화부 요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벨기

에제 브라우닝 권총인 점을 들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19일 중앙·한국·한겨레 신문등은 일제히

“간첩…간첩 말한 적없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현장에 있던 사람중

어느 누구도 “이씨가 간첩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

다.(한국일보 19일자 35면)

목격자 증언뿐 아니라 이한영 씨 저격에 사용된 권총의 정체도 논란이

되고 있다. 경찰 수사본부는 당초 ‘4조우선 브라우닝 권총’이라고 발표

했다가, 18일 ‘6조우선 브라우닝 권총’이라고 번복했다.

이한영 씨의 피살사건의 주요근거들이 뒤바뀐 보도를 접하며 국민들은

잠시 어리둥절하게 된다. 또한 사건발생 직후 수사초기단계에서 결론

을 내린듯 서슴없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언급하며 국가안보 강화를

들고 나와 국민의 불안감을 조장한데는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는 의구

심마저 갖게 한다.

대다수 언론들이 목격자의 진술이 번복되었다는 톱기사로 보도한데

반해 조선, 동아일보는 철저하게 언급을 회피했다. 조선일보는 ‘테러

수사 원점 맴돈다’는 톱기사를 통해 경찰의 초동수사 미숙으로 혼선을

가중시켰다는 지적뿐 ‘간첩이라고 말한 적 없다’는 보도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동아일보는 이씨 피격이후 현재까지의 수사상황

및 향후과제를 점검하는 기사를 보도하면서 “쓰러진 이씨가 ‘간첩’이

라는 신호를 보냈다는 남상화씨 등의 진술에 따라 북한간첩의 소행으

로 단정, 군 안기부와 함께 공조수사에 들어갔다”고 재언급할 뿐 ‘진술

의 번복’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 오히려 ‘간첩 오인신고 폭주'(19

일

자 39면)로 경찰들이 바빠졌다는 내용의 기사를 다루었다.

이러한 사실은 기사 선택권의 문제라고 하기엔 이한영 씨 피살사건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주요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기사가 누락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국민의 알권리를 존중하고 다양한 정보를 편견없이 전달하는 것

또한 본연의 임무중 하나다. “부정과 타락을 과감히 파헤치고 진보와

개혁을 위해 투쟁하라”는 퓰리처의 말이 너무도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우리의 언론현실을 목격하게 된 셈이다.

1997년 2월 20일 (목요일) 인권하루소식 제8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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