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재벌 개혁에 관해서 언급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이를 두고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 재벌의 금융 소유 한도는 애초 5%였던 것을 10%로 올렸다가 다시 내린 것이고, 출자 총액 제한은 원래 자산의 25%였던 것을 폐지했다가 다시 부활시킨 것이고, 상속세 세율도 원래 60%였던 것을 45%로 내렸다가 다시 50%로 올린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는데 야당에서는 똑 같은 발언을 ‘좌경’이라고 비난했다.

때마침 대통령의 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김태동, 황태연 두 학자가 정부 내 재벌 비호 성향이 있는 관료들의 교체와 재벌 체제에 대한 ‘진검 승부’를 강조한 무렵이어서 정치권은 이른바 ‘재벌개혁 논란정국’이 되어버렸고 깜짝 놀란 정부 여당이 오히려 ‘재벌 해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식으로 무마하기에 나섰다.

“재벌 개혁 정도라면 몰라도 재벌 해체는 좀 너무한 것 아니냐”라는 정서가 국민들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벌 해체’나 ‘재벌 개혁’은 결국 같은 뜻이다. ‘해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사람들은 ‘재벌 해체’가 마치 재벌에 속한 대기업을 해체하자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재벌에 속한 대기업에 가서 강의를 할 때 ‘재벌 해체’를 이야기하면 듣는 노동자들도 ‘아니,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라고…’ 하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다. 그러나 재벌을 해체하자는 것은 재벌에 속한 대기업을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대기업을 더욱 올바른 대기업으로 키우자는 것이다. 다만 그 대기업들을 묶어놓고 있는 비효율적 일인 지배 체제와 선단식 경영과 금융 지배의 고리를 끊자는 것이다. 그룹 회장의 30대 아들이 ‘총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시 총수가 되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일인 지배 족벌 경영 체제의 고리를 ‘해체’하지 않는 한 재벌에 대한 ‘개혁’은 불가능한 것이다. ‘재벌 해체’는 ‘재벌 거듭나게 하기’ 이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비자운동의 훌륭한 영역으로 자리잡은 소액주주운동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오죽하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백과사전에 ‘Chae-bul’ 또는 ‘Jae-bul’이라는 항목이 있고 그 뒤에 이어지는 설명이 ‘한국에만 있는 대기업의 독특한 기업 소유 경영 형태로서…’이겠는가 말이다.

일본에 있는 대기업은 엄밀한 의미로 ‘재벌’이 아니다. 일본의 재벌은 2차대전 이후 미군정에 의해 그야말로 ‘해체’되었고 그것이 일본 경제가 부흥한 시금석 중의 하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선단식 경영을 할지언정 족벌 경영의 일인 지배 체제는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도 우선 그것만이라도 가능하게 하려면 재벌의 소유 구조부터 바꿔야 하고 그것은 정부의 정책에 의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생명보험사·증권사·투신사에 대한 산업자본의 소유 제한 조처를 실시하고, 부채의 출자 전환을 확대해 고부채 재벌의 총수 지배권을 이양 받고, 재벌의 비리를 엄정하게 처벌하면 된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 전반에 재벌이 수십년 동안 구축해 놓은 기득권은 실로 강하다. ‘한국 사회를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재벌’이라고 스스로 긍지를 느낄 만큼 사회 곳곳에 그들의 영향력이 갖추어져 있다. 정부 내에도 재벌 비호 세력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은 다 안다. 대통령 정책 자문을 담당하고 있는 학자의 그런 지적에 청와대는 놀랄지언정 국민들은 놀라지 않는다.

어떤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든지 국민들의 70% 이상은 재벌을 해체하거나 개혁해야 한다고 답한다. 기업 자산의 3% 정도밖에 출자하지 않은 재벌의 총수들이 그 재벌 개혁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재벌에 대한 개혁 없이 경제 위기로부터 탈출한다고 해도 그것은 언젠가 닥쳐올 또 다른 경제위기를 임신하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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