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방송의 공정하지 못했던 보도에 분노하거나 편파왜곡 보도의 피해 당사자였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방송사의 노조가 권력의 탄압을 받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거 참 고소하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권력과 자본은 국민들의 그러한 정서를 적절히 조율하고 이용한다.
지하철노조의 파업에 대해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하는 불법파업’이라고 비난을 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처럼 보이지만, 방송사 노조의 파업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다’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뭔가 하나라도 더 알고 있는 유식한 행동처럼 여겨지는 이상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도 그러한 조율과 무관하지 않다.
그동안 권력 앞에 그토록 고분고분하기만 했던 방송인들이 느닷없이 정부에 대해 칼을 뽑아들었으니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도 하고, 다른 노동조합들의 파업에 대해 언론이 왜곡보도를 일삼을 때 방송노조들이 연대파업에 동참하거나 하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는데 왜 갑자기 정의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호들갑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무식한 탓인지 아니면 의도적 왜곡인지 모르지만 방송 뉴스에 나와서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던 기자와 아나운서들이 파업 대오에 참여해 있는 모습이 보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방송사 측에서 파업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출처불명의 이상한 관찰도 등장하고, 다른 사업장의 파업에는 으레 뒤따르기 마련인 회사측의 공권력 투입 요청이 없다는 점이 ‘짜고 치는 고스톱’의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방송 노조 파업의 목표는 그동안 열심히 준비해 온 개혁적 방송법의 전면 백지화”라는 전혀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끼어들고, 방송국 신입사원의 연봉이 3천만원이 넘는다는 자료가 제시되면, 이번 파업은 방송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자사 이기주의’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된다.
‘정부의 방송장악 음모 저지’라는 슬로건조차 ‘자사 이기주의를 국민의 이름으로 팔아먹기 위한 포장’이라고 놀라운 분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위와 같은 ‘놀라운 분석’들은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되었거나 ‘김대중 정부’에 흠집 내는 것을 알레르기적으로 싫어하는 정치적 성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빚어진 결과들이다.
10년 넘는 세월동안 방송사 노동조합이 내부에서 공정보도와 방송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그리고 그러한 노력들이 지금도 얼마나 집요하고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는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다.
한 달 반 가까이 파업을 준비하면서, 몇번씩이나 밤을 지샌 노조 간부들의 토론에서 ‘자사 이기주의’ 비슷한 말도 나온 적이 없었던 것을 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들이다.
방송법이 이대로 통과되면, 방송위원회의 이른바 여·야 구성 비율이 그동안의 8:1이나 11:1보다 더욱 한심하게 악화된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다.
권력에 대해 고분고분하거나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편파왜곡 보도를 편성하는 사람들은 방송사의 고위 관리자이거나 경영진들이지 방송사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아닌 것이다. 때로 무식한 기자나 앵커가 수준 이하의 발언으로 우리를 열 받게 할 때가 있지만 그것이 방송 노동자들의 보편적 성향은 아니다.
지난 서울지하철 파업의 보도 행태에 대해서도 방송사의 노동자들은 징계를 감수하면서까지 사장실 앞에서 북을 치며 며칠씩 밤샘 항의 농성을 했고, 대통령의 미국 순방 보도에 대해서도 왜 그런 걸 특집으로까지 보도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그러한 공정 방송을 위한 ‘투쟁’은 이미 방송사 노조가 밥먹듯이 해야하는 일상활동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하철 노조와 금속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방송사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깃발을 들고 함께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방송사 노조 역량과 성향의 한계 때문이지 파업을 왜곡하고 비난하는 보도에 같이 북 치고 장구 쳤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과거 방송사 노조의 간부들이 파업을 한 후에 구속되고 해고되었다가도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고 해서 지난 파업이 연극이나 불장난이라고 보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업무방해’로 형사처벌 받을 것을 무릅쓰면서 조합원들의 파업 대오를 지키기 위해 밤을 샜던 방송사 노조의 규찰대원들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게 만드는 소리는 같은 노동자로서 더 이상 하지 말자. 권력과 자본이야 본래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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