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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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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자의 위안 – 입원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인자하시고 독서를 하는 노동자였다. 겨울철이면
털모자와 두꺼운 누비잠바를 걸치시고, 어깨엔 도시락 가방을 들고 저녁
노을을 등에 지고 인천 연안부두로 일을 나가셨다. 당시, 이땅 노동자 모
두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동으로
우리가족은 배를 주리지는 않았다.
그러던 아버지가 목과 척추, 다리까지 부러지는 중대재해를 당하신 것이
중학교1학년 겨울방학이었고, 경제적 능력이 없음을 비관한 자학적인 폭
음은 끝내 결핵이라는 질병을 30년 이상 몸에 지니게 하였다.
추석 전부터 아버지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검게 타들어 갔다. 열이
좀처럼 내려가지않았고 식사 량은 눈에 띄게 줄어 60kg이던 체중이 52kg
까지 줄었다. 급히 인천 사랑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사랑병원은 진찰 후
호흡기 내과가 있는 길 병원이나 인하대 병원으로환자를 옮기라는 처방을
했다. 몰라서 사랑병원으로 간 것이 아니다. 사랑병원이 환자들에게 과잉
진료를 하지 않고 성실히 치료해준다는 “대안병원” 이었고 한편으로는 종
합병원의 진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결국 10여 만원의 진료비를 지
불하고 아버지를 인천의료원으로 모시고 갔다. 인천의료원에도 사랑병원
과 같은 반복된 진료를 하였다.
수소문 끝에 아버지는 종합병원은 아니지만 내과 부장의사에게 진료 받을
수 있는 병원에입원했다. 급히 입원하는 바람에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격
리병실이 없어 의료보험 이외에 하루에 1만5천의 병실비를 지불해야 한다.
결국 아버지의 입원 기간은 내과 부장의사 선생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얼마나 돈을 모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 아버지는 자
신의 입원 기간이 의사가 아닌 가족들의 입원 비용 마련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모르지만 나는 안다.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최선이 어디까지인지 알
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당장의 생계를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있는 놈들이나 하는 “인간의 존엄성운운” “가족으로서의 도리” 하다가는
자본주의 생존게임에 져 죽음보다도 더 참혹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
통스러운 생활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국가, 정부 따위는 필요 없고 오로지 돈뿐이라는 것을 나이 40이 가까워
배우고 있다.
우리 가족 같은 바보들이 더 이상 나오지 말아야 한다.
“그날이 오면 내 형제 빛나는 눈물도, 그 아픈 추억도,아아 짧았던 내 젊
음도” 란 노랫말이 있다. 그날이 오기 전 아버지 기침소리는 추억으로 묻
힌다. 그날이 온다한들 누가 남아 그날을 노래할까?
滑 빛나는 눈물도, 그 아픈 추억도,아아 짧았던 내 젊
음도” 란 노랫말이 있다. 그날이 오기 전 아버지 기침소리는 추억으로 묻
힌다. 그날이 온다한들 누가 남아 그날을 노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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