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이야기 ]

혼자 바위에 몸을 던지는 계란

백경미(서울여성노조 조합원)

미국에 온 지도 넉 달이 되어간다. 남들이 말하는 ‘청운의 꿈’을 안고 공부를

하러 온 것이 지난 8월. 나는 요즘 대학원에 가려고 영어 시험 준비를 하고 있

다. 미국의 남서부 아리조나 주로 온 것은 남편이 여기에 있는 주립대학에 가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직장에 다녔고 대학원에는 남편보

다 1년 늦게 갈 계획이었으므로 학교 선택은 일단 남편에게 양보했다. 걱정스러

웠던 것은 그 1년 동안 남편이 나의 갈고 닦여진 솜씨로 계속 집안일을 책임지

라고 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늘 신경전과 자잘한 다툼은 있었

지만 나는 남편과 집안일을 나눠하며 나의 공부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곳에 있을 줄이야….

남편의 과에 한국인 유학생이 여럿 있다. 돌아가면서 집을 정해 부부동반으로

모여 저녁을 같이 먹은 적이 몇 번 있다. 나는 한 번 그 모임에 간 후 곧 가기

가 싫어졌다. 이건 웬 조선시대 사랑방 풍경인가? 혹은 한국의 명절 때 여느 집

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남자들은 TV앞에 자리잡

고 음식을 기다리며 수다를 떨고 여자들은 손님, 주인 할 것 없이 부엌을 오가

며 분주히 음식을 준비한다. 식사가 시작되어도 남자들은 따로 모여 밥을 먹고

여자들은 좁은 상에서 웅크리고 밥을 먹는다.

식사 후 설거지, 과일깎기도 물론 여자들 몫이다. 한 번은 어떤 집에서 모임

을 했는데 여자들 중에 내가 나이가 제일 어렸다. 밥을 먹고(남자들은 거실, 여

자들은 방에서)과일을 깎아 서빙하고 방에 들어와 있는데 제일 나이 많은 여자

가 와서 “말번-나는 이 말이 너무 혐오스럽다 – 이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야?”라며 나를 노려보고 나가버렸다. 그는 나대신 설거지를 했고 그것을 굉장

히 분해하는 것 같았다.

얼만 전 여성노조에서 ‘가부장제를 떠 받드는 여자들의 재판’을 했다고 들었

는데, 나는 ‘가부장제를 떠 받드는 여자들의 재판 -아리조나편’을 해야할 것 같

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내가 혼자 춤추고 굿하는 무당이 될 것 같다. 아무도 잘

못된 문화와 관습에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어찌 그리 무던들 하신지.

언젠가 서울에서 친구의 집들이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자기의 형님을 실컷 욕

하는 걸 들었다. 명절 때 형님은 직장을 다닌다는 핑계로 전혀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 얘기를 들은 또 다른 친구가 나에게 습쓸해 하며

말했다.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들끼리 욕하고 갈등하는 모습이 정말 싫다”고.

그렇다.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은 유학생 부인들이 아니다. 태평양을 건너 와

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그놈의 철저한 가부장제. 남편은 나에게 말했다. “혼자

분개해봤자 여기에선 게란으롤 바위치기야.” 나도 이것이 나 혼자 풀기에는 너

무나 큰 문제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혼자 깨지는 계란이 되더라도 포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는 있는

것이다. 개개의 가정에서 시작된 가부장제가 사회에까지 확산되어 여성들의 권

리를 침해하고 여성들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도록 놔두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눈물이 나도록 고민을 같이하던 여성노조의 사람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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