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의 이스라엘: 시오니즘과 유대인의 단절


출처: Nathaniel St. Clair

민족적 우월주의로서의 시오니즘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의 잔혹한 전쟁과 관련하여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지금도 아무도 논의하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현재 팔레스타인 사망자 및 실종자 수가 3만 8,000명을 넘어섰고, 전체 사상자 수는 12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 이를 인구 비율로 환산하면 1,400만 명의 미국인과 맞먹는다. 이는 숫자로만 요약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살아남은 200만 명 이상의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굶주림과 질병, 정신적 손상이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이들 중 85%가 집을 잃었고, 하마스의 잔존 세력을 겨냥한 지속적인 공습과 지상 공격을 마주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시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으로 1,200명의 군인과 민간인을 잃은 것을 시작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이 잔인한 공격의 한 가지 효과는 홀로코스트의 상처를 다시 열어, 역사적 취약성을 이미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재차 트라우마를 안겨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집단학살로 간주한 폭력에 대한 정부의 유혈 대응과 팔레스타인의 불행과 분노의 구조적 원인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 전 세계의 동조하는 동맹국 및 우호적인 비평가들과의 유대 관계가 끊어졌다.

고대 중국인들은 황제와 백성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설명하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의 뜻'을 잃은 통치자는 영원히 불법적인 존재이며 복종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는 이 교리에 대한 각자의 버전이 있다. 두 종교 모두 정권의 정당성은 결국 국민과 이웃을 정의롭게 대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부 구성원이나 다른 국가에 대한 체계적인 학대는 정부가 충성심과 존경을 요구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많은 관찰자들은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가 이러한 종류의 정당성을 상실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가에 대한 그의 끈질긴 반대, 점령된 영토 내에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을 추진하는 것, 과거 하마스에 대한 그의 암묵적 지원 등이 현재의 가자지구 학살에 적어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비비(Bibi, 네타냐후의 별명)나 그보다 더 초국가주의적인 장관들을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현 정부뿐만 아니라 그 정권을 탄생시킨 시스템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극좌에서 극우에 이르는 다른 이스라엘 정당과 함께, 네타냐후의 리쿠드 당이 서식하는 체제는 시온주의다. 즉, 이스라엘 국가의 주된 사명은 전 세계 유대인의 피난처이자 고향이며 이스라엘 유대인의 이익과 가치를 국가적 형태로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합의를 반영한다.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다른 집단(국가 내 비유대인 공동체 또는 다른 국가 정권)의 행동으로 인해 위협받는다면 이스라엘 유대인의 이익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2018년 이스라엘 기본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국가의 민족 자결권은 유대 민족에게 고유한 권리"이다. 국가는 규범을 폭력적으로 집행할 권한이 있는 공동체이므로 유대인의 정체성과 이익에 대한 이러한 제도적 선호는 비유대인에 대한 "구조적 폭력"(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파르트헤이트'라고 부르는 차별적 규정)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오랫동안 대부분의 미국 유대인들은 시오니즘과 유대교가 전 세계에 전파한 도덕적 가치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 왔다. 이러한 긴장은 시오니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 신념과 관행이 보다 일반적인 인간의 이익 및 필요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존재한다. 유대교와 다른 세계 종교는 특정 부족의 관습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가치를 구현하고 장려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민족 또는 종교 정체성이 혼합된 경우 특히 이러한 긴장은 심각해 보인다. 그러한 가치 중 하나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이다. 성인들은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고 불가침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의 민족주의자들이 자기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의 생명을 소모할 수 있는 것으로 결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결과 하마스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이 가자지구 전체 주민에 대한 대규모의 지속적인 공격의 형태로 이루어졌을 때, 다른 많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 폭력이 법적 집단학살에 해당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어떤 생명도 죽어 마땅하거나 다른 생명보다 더 구원받을 가치가 있지 않다는 원칙에서 출발하는 유대교의 기본을 위반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학살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하마스 전사들이 민간인 사이에 숨어 그들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을 때, 유대 규범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은 약화되지 않고 강화되었다. 자연 보호나 공중 엄폐물이 없는 나라의 군인들이 공개적으로 싸울 수 있을까? 어쨌든 무고한 민간인 사이에 숨어 있는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무고한 민간인을 집단 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글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답은 이렇다: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율법에서 역사적 유사점을 찾거나 탈무드에서 랍비식의 가설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우리'의 생명 하나를 '그들'의 생명 10개 또는 100개 또는 1000개와 동일하게 평가하는 원칙은 전통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민족주의로 알려진 세속 종교의 전형적인 교리이다. 이는 친이스라엘 대변인들이 2차 세계대전의 대규모 폭력을 자신들의 폭력적 과잉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할 때 분명해진다. "드레스덴이나 히로시마를 폭격할 때 얼마나 많은 민간인을 죽였는지 신경을 썼나?" 이 질문은 시사적이다. 우리는 그러한 학살에 대해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신경을 쓰고 있지만). 민족주의 교리문답은 "국가가 패배의 위험에 처하면 국가를 보존하는 데 필요한 모든 폭력은 정당화된다"고 가르치지 때문이다. 

시오니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의 안보가 위협받는다면, 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폭력은 정당화된다." 물론 일반적으로 상황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국가가 (자신들이 주장하는) 국익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경우, 보통은 자국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미국(또는 프랑스, 러시아) 국민의 이름으로, 더 영광스럽게도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 정치 문화를 정당화하는 추상적인 원칙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민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의 부활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유대인"의 목소리로, 그리고 "유대적 가치"의 공인된 대변인으로서 발언하고 있다.

특히 어떠한 가치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유대인의 옷을 입고 있을 수 있지만, 모든 민족적 국수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 주장이 전개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마치 거리의 전문 사기꾼이 셸 게임(세 개의 조개 껍데기 혹은 종지 등의 위치를 바꾸면서, 어디에 동전 혹은 작은 공이 들었는지 맞추는 도박, 이른바 '야바위')을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우선, 그는 당신의 관심을 전적으로 하마스에 집중하도록 한다. 그는 하마스가 10월 7일의 야만적인 공격을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조직과 그 지지자들도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유대인을 죽이고 싶어 한다고 선언한다. 모든 곳의, 모든 유대인을. 헤즈볼라, 이란과 그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하마스를 전멸시키고 헤즈볼라와 이란의 이스라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폭력은 유대 국가와 유대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정당화된다. 그리고 이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같은 국가와 민족의 알려진, 혹은 알려지지 않은 적, 즉 반유대주의자이다.

테이블 위의 어느 조개가 동전을 숨기고 있을까. 하마스(또는 헤즈볼라, 이란)가 하려고 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신경 쓰지 말라. 10월 7일 공격은 끔찍했지만 이스라엘이나 전 세계 유대인에게 실존적 위협이 되지 않았다. 가자지구에 대한 집단학살의 폭력은 반유대주의자들이 바라는 것보다 이스라엘의 국제적 지원과 장기적 안보에 더 큰 피해를 준다는 것은 신경 쓰지 말라. 홀로코스트와 다른 트라우마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두려움을 되살리는 공포에 집중하다 보면, 이스라엘 과학자이자 평화운동가 이스라엘 샤학(Israel Shahak)이 수년 전 나에게 전한 원칙, 즉 "다른 민족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대인의 생존권은 없다"는 말을 잊어버리게 된다.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우선하는 집단의 생존은, 민족주의적 교리이지 유대인의 교리가 아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초창기 IDF(이스라엘 방위군)의 군인이었던 샤학 교수는 현대 시오니즘을 맹렬한 민족적 나르시시즘의 한 형태로 묘사했다. 그는 이러한 사고 방식의 근본적인 가정은 항상 "우리의 삶은 그들의 삶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통찰은 당연히 반명예훼손연맹(Anti-Defamation League)이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게 만들었지만, 그는 민족주의와 유대교를 융합하려는 시도가 유대인의 윤리를 타락시켰고 그 자체가 반유대주의의 원인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데 지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이스라엘과 전 세계의 유대인은 모든 민족의 평등에 기반한 인간 안보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세계 운동의 일부일 때만 진정으로 안전할 수 있다.

민족주의에 우선하는 공통의 인류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옹호하는 이스라엘 반대론자는, 노암 촘스키 같은 현대 인물부터 사무엘 클레멘스(마크 트웨인)와 같은 19세기 현인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세계인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허클베리 핀'과 '전쟁을 기도하는 자'의 저자는 민족주의적 열정의 집단학살적 함의를 잘 이해했다. 한 국가의 모든 폭력적인 '정당방위' 행위는 대상 국가에 의해 보복이나 복수를 요구하는 공격적인 행위로 해석되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갈등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가정불화의 논리이다. 허클베리 핀에서 허크의 친구 벅 그랜저포드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한다:

"불화는 이런 식이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와 다투다가 그를 죽이고, 그 남자의 형이 그를 죽이고, 양쪽의 다른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고, 사촌들이 끼어들고, 결국 모두가 죽으면 더 이상 불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트웨인은 종종 그랬듯이 가장 어두운 유머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민족적 충성심의 집단학살적 결과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샤학은 시오니즘 민족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나 반식민지 해방으로 재편된 다른 어떤 형태의 민족적 우월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적어도 영국의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1917년) 이후 시오니즘의 기원이 중동에 서구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식민지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갖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를 대신하여 이 지역의 제국주의적 주인이 되었을 때, 미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패권을 계승했다. 샤학은 프란츠 파농과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없다면 민족주의 엘리트들은 글로벌 엘리트에 편입되고 억압받는 국가들은 압제자들의 동맹에 편입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시오니스트들이 유대인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것은 반유대주의라고 불평할 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옳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끔찍하게 혼란스러워한다. 폭력적이고 권력에 중독된 민족 국가의 세계에서 왜 유대인이 기독교, 이슬람교 또는 힌두 민족주의자처럼 폭력적이고 권력에 중독될 권리를 부정당해야 할까? 국가를 건설하고 무장하는 것이 민족 또는 종교 집단을 해방시키고, 그 존재를 보장하며, 번영을 보장한다고 가정하는 데서 혼란이 생긴다. 수세기 전 민족주의는 봉건 영주와 전통 종교 당국의 지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오늘날 민족주의는 주로 사람들이 인류 가족 및 전세계 노동 계급의 일원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막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가자지구 전쟁과 같은 대량 학살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억압자와 피억압자 간의 관계를 '뒤집는' 것 이상의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유아적인 형태의 정치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세계 시민 의식과 도덕적 성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 과두제 지배층들이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민국가를 조종하는 시스템을, 모든 국가의 노동자들이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바꿀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당대의 철도 과두집단들을 언급하며 이렇게 썼다:

군중들이 역으로 달려들고, 차장은 "모두 탑승하세요!"라고 외치지만, 연기가 사라지고, 증기가 응축되면, 몇몇은 탑승했고 나머지는 치어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우울한 사고". 그렇게 불리고, 그렇게 될 것이다.

가자지구에서 연기가 걷히고 나면 '치어서'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은 미국 군산복합체의 소유주와 관리자,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조력자들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돈을 세고, 재선을 위해 뛰고, 다음 전쟁을 계획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고'가 아닐 것이다.

[출처] Israel in Gaza: The Jewish Break with Zionism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리처드 루벤스타인(Richard Rubenstein)은 신학자, 교육자, 작가로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 인구 과잉과 관료주의 등에 대해 분석해왔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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