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필자 제공
얼마 전 열린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그의 귀환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좌절을 안겨 주었지만, 일견 예상된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바이든 정부에 대한 불신이 큰 몫을 차지했다. 카멀라 해리스로 후보가 교체되며 잠시 민주당이 대선 레이스의 분위기를 가져오는 듯 했지만, 판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NBC 뉴스에 의하면, 이번 대선에서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요청(30%), 그리고 ‘변화에 대한 열망’(28%)이 후보자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는 모두 트럼프 캠프가 강조한 것들이기도 했다.
반면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처음 당선되었을 때 미국은 크나큰 충격에 빠진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늘 힐러리 클린턴에 밀렸다. 사람들은 충격적 결과의 원인을 찾기 위해 분주했고, 그 중 상당수가 경제적 요인에 주목했다.
물론 2024년 대선의 주요 쟁점 역시 경제였다. 대선 여론 조사 결과, 대선의 주요 쟁점으로 제시되었던 ‘외교 정책’, ‘임신중지’, ‘경제’, ‘이민’, ‘민주주의’에서 유권자들은 경제 문제(32%)와 민주주의(34%)를 선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뽑았고, 다음으로 임신중지(14%)를 꼽았다.
그러나, 2016년 대선에서 성공한 사업가로서 도널드 트럼프의 이미지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끝없는 경기침체를 겪고 있던 미국을 다시 ‘강한 미국’으로 만들어줄 영웅의 이미지를 연출한 트럼프. 정치적 경험이 없어도 부유한 국가로 만들어주겠다는 그의 약속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것은 실체라기보다 사람들의 불안과 좌절을 건드린 트럼프 캠프 전략이 제대로 먹힌 결과였다.
트럼프의 첫 당선 4년 전인 2012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 시민들이 느끼는 불안의 정서를 담은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테이크 쉘터>라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커티스(마이클 섀넌 分)는 부유하진 않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청력을 상실한 딸 해나 역시 이들 부부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커티스 주변에서 이상한 징후들이 포착된다. 거대한 폭풍우를 품은 검은 먹구름이 나타나고, 하늘에선 기름이 섞인 비가 내리고, 무리 지은 철새들이 기이한 비행을 하는가 하면, 반려견이 갑자기 커티스를 공격한다. 설상가상, 오염된 비를 맞는 사람들은 커티스와 그의 딸 해나를 습격해 해나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사실 이 불가사의한 일은 커티스가 보는 환각, 혹은 악몽의 일종이다. 그러나 커티스는 악몽에서 깨고 난 뒤에도 실제처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그로 인해 그의 일상은 점점 망상과 공포로 무너져내린다.
영화는 금융위기 이후 미국 사회가 느꼈던 몰락의 공포를 불길한 징조를 감지하는 주인공 커티스를 통해 보여준다. 그러나 커티스가 느끼는 불안의 이유는 영화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커티스가 만난 심리학자들은 그의 발병 원인을 찾기 위해 그의 어머니의 정신분열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고 한다. 어쩌면 그의 환각 증세가 그의 몸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유전인자 때문이라는 듯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학적이기보다 사회적 유전이다. 유전된 것은 불안, 삶을 지탱할 수 없으리라는 미국 하층 계급 백인 남성이 느끼는 계급의 불안이기 때문이다.
특히, 2008년의 금융위기는 서민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가계 대출 금리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은행에서 무차별적으로 발행한 모기지론은 내 집 마련의 행복한 단꿈에 젖어 있던 이들의 삶을 한순간에 파탄냈다.
불행은 한순간에 갑자기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이 가진 자원에 따라 불행과 재난을 극복하는 데 큰 차이가 있음을 안다. 사회적 자원이 취약한 곳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불행과 재난은 전혀 평등하지 않다.
미국은 사회적 보호망이 가장 취약한 곳 중에 하나다. 좋은 직장은 곧 좋은 조건의 대출과 보장 좋은 보험의 확보를 의미한다. 취약한 사람들은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커티스는 회사의 보험으로 딸의 청력 복원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회사에서 해고되면서 딸의 수술비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커티스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길한 징후들이 자신의 환각임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멸망할 거란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결국 그는 무리하게 대출을 끌어다 자신의 집 마당에 자신만의 방공호를 짓는다. 이는 커티스와 그의 아내 사만다(제시카 차스테인 分)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된다.
마침내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커티스는 가족들과 함께 방공호로 대피하지만 폭풍우가 물러간 뒤에도 그는 밖으로 나오기를 주저한다. 사만다는 문을 열기를 두려워하는 커티스를 설득하여 마침내 그가 직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가족은 화해한다.
영화는 결국 하층 계급 백인 남성이 느끼는 불안증을 다시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해결하도록 함으로써 불안을 잠재우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충격적 결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불안은 쉽게 해소되지 않은 채 이들 가족의 주위를 맴돈다.
물론 영화에서 이들이 느끼는 불안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폭풍우처럼 그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에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안은 더욱 커진다.
영화를 연출한 제프 니콜스 감독은 영리하게 커티스의 사회적, 계급적 배경들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여 불안의 ‘기후’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사회적, 계급적 불안, 엄습해오는 불길한 기운들, 몰락의 두려움이 결국 더 강한 미국을 외친 트럼프 시대의 전조같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 말은 파스빈더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파스빈더는 이 영화를 통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잔혹한 인종학살을 벌인 자신들의 과오를 잊은 채 또다시 이주민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독일 사회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불안을 먹고 자란, 불안을 부추기는 트럼프 정부의 혐오 정책이 여기에 겹쳐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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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주연은 영화를 연구하고 가르칩니다. 특히 동아시아 영화와 여성 영화를 중심으로 역사 재현에서 기억의 문제가 드러나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동시에 비현실적 소재들이 제기하는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관심으로 꾸준히 크리처물, 호러물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배주연의 異세계>는 호러, 크리처, 판타지 등으로 분류되는 장르 영화를 비판적으로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