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슝 노동박물관에서 만난 계엄시대

대만 가오슝 노동박물관에서 만나는 세계 최장 기간 계엄시대 38

계엄령이 선포됐던 2024년 12월 3일 이후한국의 거리 시위에서 민주노총은 맨 선두에 서서 투쟁했고 이는 여전히 진행형이다노동자들이 앞장서자 이에 대한 지지와 갈채도 쏟아졌다.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습니다라는 주문 같은 말이 뱉어지면 막혀 있던 국회대로와 한남대로와 세종대로가 뚫렸다그 넓어진 광장으로 쏟아져나온 사람들의 손에 든 응원봉은 서로를 고무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만큼아찔한 상상은 지속된다계엄이 떨어지고 국회가 봉쇄되었더라면여전히 계엄 상황이었더라면대대적인 검속과 검거 선풍이 일고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의 일체 활동이 금지되었더라면 하는 상상그 상상이 현실이었으면 어땠을지 체험해볼 수 있는 나라가 있다바로 멀지 않은 나라대만이다대만은 1949년 5월 20일부터 1987년 7월 15일에 이르는무려 38년 1개월 25일동안 이어진 (2011년 이전까지세계에서 가장 긴 계엄시대를 거쳤다계엄시대를 거치면서 강하지는 않지만 명맥을 이어왔던 대만의 노동운동은 완전히 뿌리뽑히게 되어 암흑 시대를 거치게 된다.

이 같은 계엄시대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의 대만 노동운동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이 대만 가오슝(高雄)시에 있다가오슝시 노동박물관(高雄市勞工博物館)이 그것이다가오슝시는 흔히 대만의 부산’ 같은 곳으로 일컬어지는데보다 정확히는 부산+울산+창원 같은 곳 같다항구도시이기도 하지만통조림 같은 식품 산업부터전자 산업조선소중공업석유화학단지철도 등 여러 산업이 두루 발전한 인구 270만 명의 대도시이다.

가오슝시를 가로지르는 그 이름도 아름다운 애하(아이흐어爱河강변에 2.28기념공원이 있는데 공원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편에 가오슝 노동박물관이 있다. (주소: 261, 中正4前金区원래는 하마싱(哈瑪星쪽 보얼예술특구에 2010년 5월 1일 개관했었는데 2015년 현 자리로 옮겼다. 1, 3, 4층에 전시관이 운영중에 있다전시는 주제나 범위가 대만 전체 노동운동의 전개 흐름의 틀 내에서 가오슝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박물관 전시물을 중심으로 대만의 노동운동을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가오슝 노동박물관 정문. 출처: 울산저널

대만의 일치시기 노동운동

사실 코로나19 종식 이후 많은 이들이 대만 여행을 갔지만, 이 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가령,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진압된 후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청-일 간의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후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었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일제는 대만총독부를 설치하고 1894~1945년까지 50년에 걸친 긴 식민 지배를 이어갔는데 이를 대만에서는 일치시기’(日治時期)라 부른다.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대만은 급속한 공업 발전을 이뤘고 노동자계급이 생겨나 노동운동 역시 점진적으로 발전했다최초의 파업은 1898년 타이베이 완화(艋舺)부두봉쇄 노동자 파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노동조합이 없는 가운데 벌어진 자연발생적 파업이었다. 1903년 건설 목공들이 임금 착취에 불만을 품고 도급업자에게 몰려가 단체협상을 벌여 임금인상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 후 타이베이 대공조합을 설립한 것이 대만 최초의 현대적 노동조합이었다그 이후 1910년대 대만문화협회를 중심으로 1910년대 대만 노동자들의 의식 계몽운동이 벌어졌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점진적 발전을 거쳐

이 같은 대만 노동운동의 힘이 응축되어 터져 나온 것이 1927년 대만 사상 초유의 대규모 파업이었다. 1927년 4월 3대만철공소아사노양회대만총독부 철도부 공장 및 소형 철공소 노동자들이 연합해 가오슝 대만기계공우회를 결성했다이튿날 대만철공소가 이 조직의 회장인 왕펑(王风)을 해고하자 노동자들은 복직을 요구하고 협상을 벌였다그러나 사측은 4월 16대만철공소의 파업 참가자 113명을 해임한다고 발표했다그러자 1927년 대만기계노동조합이 지지 선언을 하면서 대만 전역의 노동단체와 사상단체의 주목을 받았고 대만문화협회 주도로 대만 전국적 총파업으로 이어졌다가오슝으로 전 대만의 지원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4월 22일에는 각 지역 노조가 동정파업을 이어가는 등 도(전역에 파업운동이 몰아쳤다그러나 경찰의 탄압도 이어져 130여 명이 검거되었고 이로써 연대 총파업은 끝이났다.

하지만 그해 10월 10시멘트공장인 아사노양회 가오슝 공장에서 업무상 재해가 발생해 노동자가 사망했다사측은 장례비 지급을 거부했고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돈을 걷을 것을 강요했다황츠나 우쉬딩(吳石丁등 주도로 1928년 4월 14일부터 노동자들은 전면 파업에 돌입했고 이에 타이완공우총연맹이 각지에서 강연회모금 등을 조직해 지원했다노동자들은 식사대를 조직해 노동자들의 집에 모여 식사를 했다.

그러나 일본 황실의 사찰이 임박하자 타이완총독부는 5월 6파업 대오는 대거 체포됐다. 1928년 말까지 이들 검거자들 37명은 무죄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미 노동자들은 힘을 잃어 이 같은 규모의 파업운동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대만 해방 후 선포된 계엄시대

1927년 이후 대만의 노동자운동은 기나긴 침묵과 적막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그 시간동안 노동자들은 자연발생적고립분산적일회적 투쟁이 없지는 않았지만 일본이 물러나는 1945년 2차대전 종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종전 후 대만에서는 얼얼바 사건이라 불리는 ‘2.28사건이 일어난다이는 대륙에서 쫓겨나 대만으로 들어온 중국 국민당 군대에 대한 민중봉기와 그에 대한 국민당군의 학살 사건이었다. 1947년 2월 28일부터 5월 16일에 걸쳐 대만 전역에서 이 사건으로 대략 2만 8천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사건 이후 40년 동안 2.28사건은 금기어였고 이를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체포되기 일쑤였다.

2.28사건 후 노동자들은 위축되기는 했지만 투쟁을 멈추지는 않았다. 1949년 3월 26대만 전역에서 온 우편 및 통신 노동자들은 타이베이 우체국에서 출발타이베이 지방 정부를 향해 행진했다그러나 1949년 5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체신통신 노동자들에게 주요 계몽자 역할을 했던 계매진첸징즈 두 사람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노동운동의 선봉자였던 우진위류젠슈 등 30여 명이 정치범으로 몰려 체포감금되면서 대만 노동자들은 38년 동안 침묵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1949년 5월 대만성 계엄령이 공포되면서 집회파업 및 행진 청원 등의 행동이 명시적으로 금지되었고 노동조합은 집권당의 집행기구 역할이나 했다국민당 독재 체제 하에서 대규모 노동운동은 없었다.

계엄 시기 국민당과 대만 정부는 노동조합을 적극적으로 조직했다그 결과 대만의 노동조합 조직률이나 규모는 같은 시기 한국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았다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어용노조였고 국가의 꼭두각시였으며 노동자들을 감시통제억압하는 또 하나의 기구였을 뿐이었으며 국가에 의한 동원 기구였다.

해엄계엄 해제 이후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결집된 민주화운동 세력이 1986년 9월 민주진보당을 결성해 그해 12월 처음으로 선거에서 국민대회 11입법원 12석을 확보한다그 직전인 1987년 7대만 총통 장징궈가 이 같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계엄령을 전격적으로 해제했다.

그러나 1987년 해엄즉 계엄 해제 전후 노동자들은 정치 정세와 상관 없이 노동 권익과 산업 이전에 따른 공장 폐쇄 문제 등에 봉착했다노동자들은 계엄이 해제된 조건 하에서 투쟁과 조직에 나섰고 많은 노동 단체들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1984년 노동기준법이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법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노동자들의 투쟁들은 정책 제도를 변화시키고 사회문화적으로도 대만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예를 들어 국부기념관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불평등한 근로계약서가 강요되었는데 가령 임신을 하거나 30세가 넘으면 퇴사를 해야 한다는 조항 같은 것이었다국부기념관 여성 노동자들이 이 문제의 개선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다이러한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소송과 투쟁을 거쳐 2001년에는 양성노동평등법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해엄 이후 40여 년이 넘도록 이어진 대만의 노동운동에 관한 전시물을 둘러보면한국의 1987년 이후 노동운동과 묘하게 겹쳐진다노동조합 조직 확대와 단체가 늘어나는 것에 발맞춰 임금인상 투쟁노동시간 단축 투쟁노동절 시행과 노동절 대회대규모 산업재해와 노동안전 요구의 급증 등이 그렇다그러던 것이 2000년을 전후로 해서는 민영화 반대 투쟁청년노동95연맹 설립, 2010년대 청소노동자 조직이주노동자 조직 등의 이슈로 확대됐다노동 정치 관련해서도 1987년 노동당 설립, 1989년에 다시금 노동당 결성 등의 노력도 이어졌다우리에게도 익숙했던그리고 현재진행형인 주제들이기도 하다.

물론전시를 둘러보면서 받았던 인상은 대만의 노동운동은 한국의 그것에 비해 무척 약해 보인다는 것이었다노동운동의 활력이나 결집 정도도 다소 떨어져 보이기도 한다한국의 김준 박사가 쓴 여러 논문을 살펴 보면한국의 노동운동과 비교해서 대만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약한 원인으로 노동운동에 거의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대만의 정치사회운동, 대만의 산업단지가 도시와 농촌 곳곳에 산포되어 있다는 점, 사회적 불평등이 비교적 적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그러나 역시 뭐니뭐니 해도 계엄 치하에서의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와 탄압국민당 일당 지배기본권 제약 등의 요인이 가장 크게 작동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계엄의 시간을 넘어

세계 최단 시간 계엄이라는 이번 한국의 3시간 계엄의 시간은그러나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만 같다밤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뉴스를 살펴본다는 계엄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그만큼 불확실성의 시간을 우리는 경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달리 보면 이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자율성을 확장할 기회를 준다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힐 시간이기도 하다민주노총이 열어야 할 것은 아스팔트 대로만이 아니다노동자들과 민중이 함께 탈 계엄의 시간을 무엇을 위한 시간으로 연결해야 할지시급하게 토론하고 행동으로 열어야 할 때이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 이후 우리가 경험했던 것은 광장에서 우리가 열어젖힌 딱 그만큼만 세상은 굴러간다는 것이었다지금은 2016년보다 더 나아가 남태령을 넘어 한남동까지 이르른 것 같다여성퀴어농민장애인빈민청년노인청소년주부 등 여러 주체들의 이름과 깃발이 하나의 대오로 뭉쳤고 서로를 엄호지지상호 이해와 응원하면서 하루씩 전진하고 있다국가의 위기가 노동의 기회로 역전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해지는 새해복 많이 쟁취하자!

덧붙이는 말

양돌규는 노동자역사 한내의 운영위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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