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이란 석유를 ‘전리품’으로 바라본 100년의 시선

영국 석유회사(British Petroleum, BP) 소속 지질학자와 페르시아 노동자가 1926년경 페르시아 남서부에서 석유를 탐사한다. (BP 기록보관소), 저자 제공

최근 페르시아만에서 적대 행위가 다시 발생하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 병목 지점 가운데 하나인 호르무즈 해협으로 돌아갔다.

이 좁은 해협을 통해 전 세계 석유의 약 5분의 1이 지나간다해협이 봉쇄되고하르그 섬(Kharg Island)의 전략적 수출 거점을 포함한 이란의 석유 인프라를 미국과 이스라엘이 공격하면서 연료 가격이 급등하는 가운데 장기 분쟁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대부분의 뉴스 보도와 분석은 미사일드론기뢰가 가하는 즉각적인 위협과 해협 봉쇄가 세계에 미칠 영향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런 헤드라인 아래에는 훨씬 더 깊은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방은 이란을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 매장량 위에 자리한 불안정한 지역으로 인식하며 강력한 상상 속 공간으로 그려왔다.

에너지 인문학 분야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나의 연구 대상은 이란 초기 석유 역사와 20세기 초 서구 석유 문화의 형성 과정이다.

제국을 바꾼 발견

1924~25년 대영제국 박람회(British Empire Exhibition)에서 선보인 BP의 페르시아풍 카라반사라이(caravanserai)를 담은 엽서다. (BP 기록보관소), 저자 제공

이 이야기는 1908년 5영국-호주 출신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르시(William Knox D’Arcy)가 자금을 댄 시추팀이 당시 페르시아로 불렸고 1935년 이후 이란으로 알려진 지역의 남서부 자그로스 산맥(Zagros Mountains) 험준한 구릉지에서 석유를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이 발견은 지역과 세계 석유 산업을 재편했다. 1909년에는 새로 발견한 유전을 개발하기 위해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가 설립됐고이 회사는 훗날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 BP)으로 이어졌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이 회사는 200킬로미터에 이르는 송유관망과 페르시아만 아바단 섬(Abadan Island)에 대규모 정유 및 수출 시설을 건설했다이 정유시설은 지금도 이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한다.

아바단에서 출발한 유조선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 세계 시장으로 석유를 실어 나르며 결국 유럽 전역의 선박차량산업을 움직였다.

이란 석유는 빠르게 영국 제국 전략의 핵심이 됐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직전영국 정부는 해군이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도록 추진한 해군성 제1경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정책에 따라 왕립 해군의 연료 공급을 확보하기 위해 BP의 지배 지분을 인수했다.

처칠은 이후 이란 석유 발견을 영국에 내려온 놀라운 횡재라고 표현했다. “끊임없이 그리고 흔들림 없이 이러한 어려움에 맞선 결과 행운이 우리에게 보답했고… 우리가 가장 밝게 꿈꾸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동화 같은 전리품을 안겨주었다.”

이 순간부터 이란 석유는 영국 제국의 산업력과 군사력과 깊이 얽히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와 석유를 상상하다


그림 03 1925년 4월 25일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실린 BP의 페르시아 시리즈(Persian Series)’ 광고다.

전쟁 이후 BP는 군수 공급에서 대중 소비로 초점을 옮기며 영국 대중이 이란과 그 석유를 이해하는 방식을 형성하기 위해 정교한 마케팅 캠페인을 전개했다.

1920년대 동안 영국 신문에는 페르시아의 풍경역사문화자연 자원을 묘사한 수천 건의 광고가 실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1925년에 선보인 12부작 페르시아 시리즈(Persian Series)”인상적인 삽화와 함께 외딴 험지에서 일하며 현대 세계에 연료를 공급하는 영국 기술자들의 이야기를 결합했다.

이란의 험준한 산길사막 대상고대 종교 유적을 담은 장면과 서구의 기술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서사가 나란히 배치됐다.

이 메시지는 인쇄물을 넘어 확장됐다. 2,700만 명 이상이 방문한 1924~25년 대영제국 박람회(British Empire Exhibition)에서 BP는 전통적인 이란 대상 숙소인 카라반사라이(caravanserai)를 실물 크기로 재현하고 현대식 유전 장비 전시와 결합해 양식화된 문화 이미지를 선보였다.

BP가 만든 건축 환경에도 페르시아 상징을 반영했다. 1925년에 완공한 런던 본사 브리태닉 하우스(Britannic House)는 전통 복장을 입은 이란 인물 조각상을 배치했는데이 조각상은 먼 자원 개척지에서 획득한 전리품처럼 묘사됐다.

1930년대에는 BP가 이란의 삶을 다룬 영화를 제작해 전시회와 박람회에서 무료로 상영하며 관객층을 더욱 확대했다.

상업적 정복의 서사

1925년 7월 11일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실린 BP의 페르시아 시리즈(Persian Series)’ 광고다.

내 박사 연구는 BP가 이란을 재현하는 방식을 통해 영국과 같은 서구 사회가 중동에서 끌어온 에너지에 의존한다는 생각과 그 자원을 통제하는 일이 필요하고 정당하다는 인식을 어떻게 정상화했는지 설명한다.

BP의 전간기 마케팅 캠페인은 단순히 자사의 휘발유를 홍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이 캠페인은 이란과 그 사람들그리고 석유 자원에 대한 더 넓은 문화적 이해를 구축했다.

자그로스 산맥은 중동에서의 기술적·문화적 정복을 이야기하는 거대한 서사의 무대가 됐다.

석유는 척박한 풍경 아래에 갇힌 이국적인 전리품으로 묘사됐고서구 석유 기업은 영웅적인 개척자로 등장해 이를 획득해 영국 운전자들의 소비를 위해 가져왔다석유 개발은 착취가 아니라 서구 근대성의 불가피한 구성 요소로 홍보됐다.

한편 이란인은 이 거대한 석유 드라마의 주변부에만 등장하며 노동자나 부수적 피해로 그려졌다한 BP 광고는 지휘관과 왕들은 사라졌다그들의 성채는 먼지로 무너졌다고 선언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란의 석유를 둘러싼 경쟁은 계속된다

팔레스타인 문학 연구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1978년 저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항상 이런 가정이 도사리고 있다서구의 소비자는 수적으로는 소수에 속하지만세계 자원의 대부분을 소유하거나 소비할 권리가 있다왜 그런가그는 동양인과 달리 진정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는 100년 넘게 산유 지역을 바라보는 서구의 태도를 형성해 왔다특히 이란에서는 석유 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되는 양상을 낳았고이란 지도자들을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탐욕적인 존재로 묘사해 왔다.

1953년 영국과 미국은 이란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한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sadegh) 총리를 축출하기 위해 공모했다.

1920년대에는 이란과 관련된 위험을 주로 환경적 요소로 인식했다사람들은 산을 넘고 사막을 가로지르며 기반 시설을 건설해야 했다.

오늘날 위험은 훨씬 더 복잡하고 지정학적인 성격을 띠며 핵 확산종교 갈등세계 시장 교란에 대한 우려에 집중된다.

그럼에도 현재 이란과의 전쟁을 관통하는 근본 논리는 놀라울 정도로 익숙하다서방은 위협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통제하려는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다.

[출처] The West has long characterized Iran’s oil as a prize to be claimed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이언 웨얼리(Ian Wereley)은 칼턴 대학교(Carleton University) 역사학과 겸임 연구교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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