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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people, Two society”을 넘기 위한 해법(?)

매년 덕담으로 회자되는 말로만으로는 여길 수 없도록 2005년 접어들어 ‘희망’을 얘기하고, ‘통합’을 선언하고, ‘사회적 합의와 협약’을 거론하는 광경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이는 그럴 가능성이 높아지고 현실화되고 있는 상태의 반영이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로 뭉쳐 있는 것이 아니라 갈라져 있으며, 이러한 ‘위기’와 ‘갈라섬’이 갈등과 저항, 투쟁을 야기하는 구조로 정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하겠다. 어찌보면 '두 국민, 두 사회‘가 하나이어야 할 국가를 두 개의 국가로 쪼개는 현실에 대해서, 통제가능성이 줄어듦에 따른 지배계급의 호들갑일 수도 있겠다. 지금부터 딱 1년전 노사정 3주체의 합의로 노사정위원회 주도로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이 체결되었다. 허나 일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자리 창출’은 이루어진 것이 없다. 정부공식통계상으로는 실업률이 4%정도로 그리 높아 보이지 않으나, 실제 실업률은 15%에 이른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통계청 발표를 보면, 지난 해 ꡐ준실업자ꡑ는 348만5천여명으로 전년에 비해 6.1%나 늘었다. 주당 35시간 이하 노동자가 250만명을 넘어섰고, 구직 단념자가 11.1%나 급증하였다. 일자리가 늘지도 않았고, 그나마 일자리도 대부분 정규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협약’이 무색하고 민망한 상황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운동의 동료를 ‘반민주, 폭력세력’으로 몰아가면서까지 ‘사회적 교섭’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민주노조운동 지도부는 과연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현 시기 한국사회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사회의 양극화와 빈곤’이라는 점에 여러 정치세력들이 일치를 보는 듯하다. ‘동반성장을 통해 따뜻한 복지’를 강조하기도 하고, ‘그늘진 곳에 촘촘한 사회안전망’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정당도 존재한다. 하지만 화려한 수사와 언어의 유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그동안 제출했던 정책을 앵무새 뇌까리듯 반복하거나 포장만 달리해서 내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제출하는 화두는 ‘일자리가 복지다’라는 것이다. 정부와 자본 뿐만 아니라 진보운동내부에까지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이자 전략으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자본은 일자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투자활성화가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각종 규제의 완화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정부는 일자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정규직의 양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개개인의 직업능력개발을 위한 직업훈련제도의 활성화로 다양한 기능을 가진 개인으로의 자기개발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재정투자를 통한 ‘사회적 일자리’창출이 필요하다고 한다. 진보진영의 일부는 ‘사람입국’을 내세우며,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빈곤층의 절반에 달하는 계층이 ‘일하더라도 가난한 노동자’임이 밝혀지고, 그 범위는 ‘여성의 불안정노동화’ ‘빈곤의 여성화’로 일컬어지는 것처럼 더 넓어지는 것이 속속 드러남에 따라 이제는 또 말을 바꿔 일자리의 ‘양보다는 질’을 강조하는 쪽으로 옮아가고 있는 중이다. 때맞추어 ‘사회적 일자리’의 획기적인 확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한다.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실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국의 사회 서비스업 일자리가 선진국에 비교할 때 크게 부족하다는 보고서를 내면서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선진국들의 사회적 일자리와 비교해 200만~400만개나 적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실제적으로 한국의 전체 노동자 가운데 사회 서비스업 비중(12.6%)은 스웨덴(32.5%)은 물론, 미국(27.7%)에 견줘서도 턱없이 적은 형편이다. 하지만 지난 해 말 노동부는 사회적 일자리 운영에 관한 지침을 만들면서 ‘수익성’을 핵심 준거로 삼고, 일자리 사업에 대한 참여기준을 강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사회적일자리 사업을 주요하게 벌여온 지역복지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향후 핵심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산업으로 교육과 의료서비스를 언급함으로써 사회서비스업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시장화․사유화 정책을 핵심기조로 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사회적 일자리’의 확대라는 선언과 희망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새로운 복지패러다임과 전략이 필요한 시점

말과 실천이 따로 노는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언급하지 않다 하더라도 사실 50%를 넘어 버린 비정규직 노동자와 그리고 빈곤에 처해 있거나 빈곤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대다수의 불안정노동자에게 이미 일자리는 빈곤의 탈출구라기보다는 ‘울며 겨자먹기’ 식이 되어버린 상태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할 듯 하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반쪽짜리일망정 전국민적,제도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다고 평가받는 사회안전망도 ‘그림의 떡’이다. 일자리든 사회안전망이든 불안정노동자의 삶의 질과 권리를 보장하기 것으로 기존의 접근방식, 현재 제출되고 있는 각종 정책과제가 대안이나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새로운 복지패러다임과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Two people, Two Society' 혹은 ‘20대 80의 사회’의 극복하는 해법에 대해 그것을 ‘통합’이나 ‘사회적 합의’로서 가능하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실제 가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판단을 흐리게 힘으로써 상처를 남겨두고 계속 봉합만 할 것인가? 아니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새로운 길로 갈 것인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판단의 지점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다시 한번 꺼내 본다. “기본생활의 보장이나 안정적 일자리는 ‘주고 받는’거래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어야 하는 협상물이 아니라,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여야 하며, 이러한 권리 의식에 기반하여 불안정노동자와 빈민들의 독립적인 주체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대안의 운동, 그것이 진정 '희망'이다

‘운동의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그것의 일차적 원인은 자본의 공세에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자본의 공세에 맞서, 여전히 과거의 방식과 전략으로 밖에 맞서지 못하는 데에 ‘위기’는 더욱 깊이, 구조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저항’은 운동의 출발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대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극단적인 형태로는 ‘자살’부터, 사회적 빈곤과 삶의 파괴에 맞서 대중의 저항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대안의 운동’은 조직되고 있지 못하다. ‘대안의 운동’이 조직되기 시작할 때 ‘운동의 위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지점이다. 그것이 진정 ‘희망’이다.
덧붙이는 말

제 94 호 강 동 진 (민중의료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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