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너부리의 다른 눈으로 보는 세상2
역사를 떠미는 진보의 폭풍,
그리고 바이러스적 침투전
너부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역사철학 테제」에서 발터 벤야민은 좌파가 우파의 파시즘과 유혹에 철저히 저항하지 못한 심층적 근거들을 밝히면서, 역사란 자신이 통제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미래를 향해서, 진보라는 폭풍을 맞으면서, 뒷걸음질쳐서 움직여 간다고 말했다. 벤야민이 본 역사와 진보의 관계는 가부장적, 남성중심적이었던 20세기 사회운동들과 여성들의 관계에도 대강 맞아떨어진다. 벤야민의 통찰을 예술적으로 접목한 미국의 퍼포먼스 예술가 로리 앤더슨의 작품들은 20세기 후반 50년간 이 진보의 폭풍이 여성들과 페미니즘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앤더슨이 벤야민을 기념하면서 만든 노래인 <이전의 꿈>은 의도적으로 페미니즘으로 맥락화하여 썼으면서도, 마지막 절에서는 벤야민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역사란 잔해 더미 / 천사는 되돌아가 상황을 고쳐 놓고 / 망가진 것들을 고치고 싶어 하지만 / 낙원에서 불어 닥쳐오는 폭풍이 있네 / 폭풍이 계속 불어 천사를 / 뒷걸음질 치며 미래로 가게 하네 / 이 폭풍은, 이 폭풍은 / 진보라 불리지.” 앤더슨의 의도대로라면,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면, 이 노래가 말하는 역사의 천사를 미래로 몰아부치는 진보-폭풍은 페미니즘이다.
돌파: 건설적 비판이 몰고 오는 불편함, 도전들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도 서구에서도 여성들은 근현대 사회 변혁 운동들의 적극적인 주체들이어 왔다. 남성위주의 공식 역사에는 주로 남성대마초들만 우글대지만, 근현대 부르주아 혁명을 포함한 여러 크고 작은 혁명들에서도 예외없이 남성중심적, 가부장적 젠더 정치학이 겁나게 가동되었다는 점을 꼬장꼬장하게 보여주면서, 이와는 다른 류의 근본적인 의미에서 급진적인 해방과 진보를 제안하는 페미니스트 역사서들을 훑어보시라. 특히 20세기 반체제운동들 및 여러 사회운동들에서는 여성들의 적극적 참여가 더욱 두드러진다. 특이한 점은 서구의 경우도 그렇고 우리 사회의 경우도 비슷하게, 20세기 페미니즘들의 큰 줄기는 그 ‘모태’가 되었던 운동들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탈’ 현상은 매우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것이(었)다. 1) 여성들이 기존에 참여하던 사회운동들의 젠더 억압 및 성차별주의 ‘실천’과 남성중심적 편향성이 배태하는 이론적 부정합성에 대한 반복된 정치적 경험과 근본적 비판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2) 이러한 이탈이 향후 지속적으로 남성위주의 사회운동들과 역사를 떠미는 벤야민식의 ‘진보-폭풍’이어 왔다는 점에서. 우선, 1)부터 보자면,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경우는 좌파경향의 사회운동들로부터, 우리 사회의 경우는 학생 운동 및 민주화 운동들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이것은, 여성들이 적극적인 주체로 참여했던 (변혁)운동들 (예컨대, 반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 반대, 독재정권타도-민주화 등)이 내부의 억압과 배제에 기반해서 작동했다는 점을 일러준다. 20세기의 반체제 운동들의 부분적 성공과 부분적 실패, 역사적 퇴행 과정이 가르쳐 준 대로, 남을, 자기 자신의 일부인 타자를 억압하면서, 세상을 변혁하는 자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2)에 대해서 보자면, 지배와 억압의 문제가 계급이나 인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중층결정적 복잡성이 있다는 점을 가장 정합적이고 엄밀하고 정교하게 설명해 온 변혁이론은 페미니즘이다. 예컨대, 보다 살만하고 더 해방적인 21세기를 건설하기 위해서, 근현대성(modernity) 및 20세기에 대한 모든 사유는 페미니즘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우리’의 남성 지식인들은 문맹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것도 아주 띨띨하게스리 이런 문맹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공산당사, 혁명사, 문화연구, 변혁이론 등을 하는 자칭 좌파 남성 지식인들이 ‘페미니즘이야 여자들이 하는 일이니 알 바 없고’ 하는 소리를 눈치도 없이 부끄럽지도 않게 하는 작태는 우리 사회의 남성중심적 변혁(이론)의 변혁 무능력을 여실히 드러낼 뿐이다. 젠더 권력구조에서 지배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 구조에 가해지는 끈질긴 비판들이 몰고 오는 불편함이나 위기를 짜증이나 무시로 ‘배설’하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생산적인 대화도 할 줄 모르거니와 소통능력도 없고 무엇보다 다른 목소리들에 대한 신진대사적인 소화능력도 없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나 관계맺기에서는 나쁜 취미들만 넘쳐난다.
미국을 포함한 서구에서 1980년대 이후로 불어닥친 반페미니즘적 역습(backlash),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90년대 후반 이후로 심상찮게 보이는 남성들의 역피해의식, 역차별 주장을 동반하여 보다 강화되는 중인 남성중심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퍼질러 있지도 않거니와 지금 상태가 다가 아니라는 점을 일러준다. 남성위주의 역사는 이제 여성/페미니즘/소수자-진보폭풍들에 떠밀려 미래를 향해 가긴 하지만 ‘뒷걸음질쳐서’ 미래를 향해 간다. 모든 진보에는 언제나 반발이 있는 법이니까.
진보를 그 동력으로 하는 역사의 뒷걸음질로-미래가기는 이론과 실천으로서 ‘좌파’ 진영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최근의 이런 뒷걸음질은 탈식민의 탈을 쓴 보다 강화된 식민성과, 여성,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내부적) 억압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 때문에 변혁의 ‘주체’를 자임했던 변혁세력은 역설적으로 자기변혁의 ‘대상’이 되었다.) 맑스(주의)한다는 이들의 연구는 아직도 상당 부분이 맑스, 그람시, 알튀세르 (최근에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등의 작업에 주석을 다는 정도거나, 신자유주의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한국에서 전개되는 양상을 분석하는 글들 역시 맑스(주의) 문헌들에 대한 급진적 역사화에 기초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지금 여기를 분석하고자 온고지신, 법고창신하는 것은 좋지만, 문제는 이런 류의 ‘다시읽기’는 서구중심적 패러다임들에 대한 급진적 역사화 없이는 ‘모셔읽기’로 변질되기 쉽다는 점이다. (이점에 관해서 일부 (강단) 페미니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은근슬쩍이지만 식민성은 더 겁나게 강화된, 말하자면, ‘탈식민’ 판본의 ‘모셔 읽기’ 말이다. 세련화된 식민성이 더 무섭다.
20세기 국제적 공산주의의 잘못된(misguiding) 모험은 맑스의 가장 취약한 부분, 즉 역사적으로 유럽에 그 중심을 두지 않은 대부분의 지역에 유럽중심적인 예언적 시나리오를 부과함으로써 야기된 폭력적 결과에 대해서 일러주는 바가 있으리라. 또한, 반복컨대, 남을 억압하면서 변혁하려는 자들은 결코 자신도 세상도 변혁하지 못한다.
다행인지, 더 불행인지, (자신들 내부의) 여성,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좌파’ 진영의 억압성은 여전히 영악하지도 않을뿐더러 세련되지도 못하다. 이 점에 관한 한, 좌파 남성들은 자본, 지배권력과 한통속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여성들에게 ‘주도권’을 뺏길까봐 여기저기 불안을 배설하는 쪼잔한 작태도 보인다. 저항을 넘어 전복의 가능성을 탐지했을 때, 지배집단은 영악스레 포섭을 통한 억제(containment) 수법을 써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런 좌파식 쪼잔함은 똑똑한 유물론자들인 좌파들이 때로 우파 지배집단보다 여유도 없거니와 머리도 나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부는 찌질대기만 한다. 우파에게 당하고 다른 다양한 목소리들에게 ‘치이면서’ ‘단결통합’이 안 된다면서.
유통 네트워크로서 변혁: 신진대사적으로 소화하고 바이러스처럼 침투하라
변혁(이론)이란 남들과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야 하고, 끈질긴 비판이 몰고오는 생산적인 불편함을 신진대사적으로 소화해 내는 행위이고, 그 결과 차이들, 복잡성, 내 안에도 중층결정적으로 착종된 타자들이 주는 상처에 끊임없이 취약해지는(vulnerable) 것이다. 안다는 것,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종종 고통을 유발한다. 이론화/대항-이데올로기 작업은 기존의 체계들에 대한 저항의 강력한 한 형태이자 그런 저항들을 합법화하는 투쟁이 된다. 내가 페미니즘으로 우리 사회의 남성(노동자/지식인)중심적 변혁이론과 실천을 ‘압박’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남성중심적 가부장성은 말할 것도 없고 구닥다리 보편주의를 거부하면서 “정황적 지식들”과 복잡성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온 페미니즘의 방식들이야말로 비판/변혁이론이 화석화된 맑스주의를 벗어나 보다 전복적인(subversive) 유연성을 지니고, 차이들에 대한 새로운 섬세함과 새로운 아비투스를 갖추는데 강력한 영감과 통찰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혁이론으로서 페미니즘은 물질적, 제도적 사건들, 투쟁들과, 상징적 혹은 비가시적인 효과들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 넣어 유통시키는 네트워크이다.
유통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적feminist-inspired) 변혁이론은, (주로 남성‘대가’들로 상징되는) 참여지식인이라는 모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 네트워크 속의 공동-행위자(co-actors)이다. 새로이 벼려지는 변혁의 언어들과 가치들은 이러한 네트워크 속에서 그 누구도 이것들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바이러스’다! 이런 바이러스는 혁명이 새로운 감수성, 타자들의 고통에 대한 섬세한 감응성에서 시작되게 하고, 새로운 감수성들이 ‘전염’되도록 한다. 바이러스는 억압적 단결통합이나 융합대신 확산시킨다.
이 바이러스에 맞서 대마초, 소심마초 할 것 없이 강렬한 저항을 해 왔지만, 이러한 저항이 이 바이러스를 박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는 형태가 바뀌더라도 박멸되지는 않는다. 바이러스는 미세하게 파고들기 때문에 기동전이나 진지전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포착되지 않는 수법의 전투를 수행한다. 또한, 한 번 파고들면 그 파고든 것을 부지불식간에, 때로 급속도로 변형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변형되기 때문에, 치고 흔들고 빠지는 게릴라전과도 다르다. 바이러스는 그 침투를 두려워하는 ‘수호자’의 입장에서는 근본적으로 괴물적인 존재다. (자본과 지배에게 괴물되기를 두려워 말라.) 발터 벤야민의 비유를 또 빌리자면, 이론이자 실천으로서 페미니즘은 남성들(과 여성들의) 반발 속에 역사를 뒷걸음치며 미래로 가고 미래를 현재로 열었던 진보의 폭풍이었고, 그 움직임은 진지전, 기동전, 게릴라전이 아니라 바이러스와 같은 침투전인 것.
자본과 지배권력의 영악한 각개격파(이간질시켜서 다스리라. 인정해주는 척해서 게토화하라)가 가랑비에 옷 젖듯 파고들어 소나기처럼 우리를 항시 빈곤과 고통에 떨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소나기 속에 퍼지는 바이러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경계를 넘어 전파되고 열망들을 전염시키는.
자본이 원하는 아이러니, 패배주의를 넘어서: 열망의 공간들, 주변에서 중심으로
지난 3월 초 민주노총 총파업 중단은 알아서 기는 운동, 알아서 잽싸게 얼른 양보하는 투쟁의 전형이었다. 이것은 자본이 원하는 식의 타협과 순응주의,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미리 패배를 점치는 상상력빈곤의 패배주의가 우리 사회의 ‘민주노동’질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아무런 대책없이, 그러니깐 압력 행사도 못하고, 그 오랜 동안을 삐리리하게 있다가, 저지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포기하고서 ‘저지! 저지!’만 외치다가 다음 국회로 넘어가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식이다. ‘우리’가 알아서 양보하고 기니까 니네도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세상에, 그리고 역사적으로 어떤 지배 권력, 자본이 알아서 ‘은혜를 베풀어’ 주었단 말인가. (베풀어 준다 친들, 그것은 세련된 게토화/각개격파의 방식이기 십상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들은 그 수많은 ‘타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타도된 적이 없다. 타도 투쟁이라면 ‘우리’가 ‘실력’이 있다는 점을, 그래서 ‘우리’에게 믿고 맡겨도 된다는 점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그 가슴에 열망을 심어주면서 보여주어도 이길까 말까다. 사람들의 열망을,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기도 한 그런 열망들에까지 불을 질러야 하고, 그래야 정치나 경제적으로 ‘힘’이 밀려도 주도권은 잡을 수 있다. (당위와 명분을 쥐고 있다고 그것이 주도권/대항 헤게모니를 확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자본과 관련해서라면 노동자의 투쟁은 (저지투쟁이 아니라) 언제나 쟁취투쟁일 때만 부분적으로나마 ‘성공’했었다.
물론, 패배주의는 반복된 패배 경험으로 형성되는 것이기는 하다. 그람시가 말한 “지성의 비관주의 + 의지의 낙관주의”는 자본과 지배의 거대한 힘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전복시킬 수 있는 다른 힘들(의 형성)에 대한 믿음과 변혁에의 의지를 뜻한다. 즉, 패배할 것이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진행되는 것이야말로 혁명이고 변혁이다. 이러한 혁명과 변혁은 비록 단기적으로 종종 ‘패배’하지만, 사회 곳곳에 바이러스처럼 침투해서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미세하게 조금씩 바꾼다. 패배를 너무나 잘 예견해내는 우리 사회의 똑똑한 유물론자들. 쟁취는커녕 의제, 이데올로기 주도권도 알아서 내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똑똑한 집단은 좌파일 텐데도, 똑똑한 패배주의 저능아들만 우글대는 현실은 자본이 원하는 아이러니이다. 집단적 저항과 사회주의 혁명의 에너지였던 그람시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내가 보기에 패배주의와 (정규직)마초지상주의는 좌파 내부의 최대 적이다. 물론, 희망은 있다. 반복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패배주의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변혁의 열망을 놓지 않는 이들은 우리 시대 운동의 새로운 스타일과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마초들이 우글대는 운동은 세력간의 힘을 미리 계산하고 싸우기 때문에 알아서 기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자기들보다 약한 집단은 곧잘 억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변혁의 열망을 지닌 이들은 애초부터 세력상 질 싸움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시작하고 계속한다. 자기변혁을 하려면 세상도 변해야 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기에, 이들의 투쟁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발견, 자기 회복/치유, 온전하게 살아가기를 향해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바이러스처럼 세상을 바꾼다.
사회적 후려치기(bashing)와 억압으로 생긴 상처(wounds)를 보듬고자 나름의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네트워킹을 통해서 열망을 증식함으로써 저항과 전복의 에너지를 충전한다. 내부의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존중, 조율하는 다양한(versatile) 소통능력을, 불협화음들로 화음을 맞추는 연대의 합창기술을 키운다. 열망에 따라, 쟁점에 따라, 위계없는 횡단적 접속, 네트워킹이 그 방식이고 그 핵심에는 집단적 저항 주체로서 나와 우리가 있다. 물론 이 ‘나’와 ‘우리’에 고착적인 본질이란 없다. (‘단결’ ‘융합’보다 결연alliance과 연대solidarity가 더 중요하고 더 파급력이 큰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숱한 패배, 반복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세상을 섬세하게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감수성 계발에 게으를 틈이 없다. 또한, 타자들과의 직면, 소통, 앎이 주는 고통(pain)에 스스로를 개방할 줄 아는 감응성, 자부심과 실력이 날로날로 는다. 지배를 위협하는 말을 할 때, 이들은 응당 스스로의 위험부담을 피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비판과 고통에 열어놓는다.
주류를 치지 못하는 비주류, 주변(margin)에서 약간의 떡고물과 그 써클 내의 인정에 안주하는 주변인/운동가/지식인(outsiders)은 주류/중심의 억압적 지배의 통합적인 일부이다. 반체제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저항하고 자 한 바로 그 체제를 더 공고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들을 보여주는 예는 숱하다. 또한, 이런 순응적 비주류, 주변인들은 종종 지배를 용이하게 하는 포섭정책(소위 구색맞추기)에 따라 지배에 부역하게 된다(tokenism; 공모). 지배에 저항하면서도 지배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기 ‘몫’을 알아서 정해놓고 그 ‘역할’에만 충실하려고 하니, 그 역할마저 주어지지도 않거니와 쟁취할 뻔하다가도 금새 빼앗기는 것이다. 발목을 남들이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기 발목에 족쇄 채우는 격. 신자유주의적 전지구적 자본주의 반대가 좌파들만의 몫이라는 역할게임의 함정에서 벗어나라.
이론과 실천으로서 페미니즘이 해 온 바이러스식 밀착침투전, 강력한 투쟁 방식들 중 (내가 보기에) 핵심은 이렇다. 지배의 주류가 주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바깥에 머물며 주변성(맑스주의라면 “계급성”) 강조나 외치면서(일부 좌파들의 계급성 강조는 열망에 불지를 속알맹이 없이 스스로의 무능력에 대한 심리적 알리바이로 기능한다) 무력하게 중심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적극적으로 중심에 연루시키면서 밀착해서 그 중심을 주변으로 만들 정치가 어떤 모습일지를 따로 또 함께 탐지하고 바지런히 실험하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서는 어떤 세상이 열릴 지 알 도리가 없거니와 다른 세상을 열 수도 없다. 그리고, 스스로를 변혁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변혁하려 한, 20세기 실패한 혁명들이 후에서야 일러주듯(by hindsight), 변혁이란 새로운 감수성, 감응성, 관계맺기로부터 시작되기에, 때로 공략하기보다는 낙후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