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부리
<편집자 주> 아래 너부리 들들은 다음과 같은 편집자의 의도로 블로그에 올라온 너부리 글들을 모아서 편집하였습니다: 변혁운동은 변화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에 무엇보다도 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움직임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샅샅이 뒤져서 그들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파해 내고 그들의 의도를 작살냄으로써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변혁운동, 노동운동 진영은 어떻습니까? 노동조합운동은 비리사건들로 얼룩져 있고 노동자 투쟁은 정권과 자본의 각개격파 전략에 무력합니다. 자본과 정권은 눈 돌아가게 변화되고 있는데 변혁운동은 자본과 정권의 재빠른 변신전략들에 뒤쫓아 가기에도 바쁩니다. 그러다보니 투쟁하는 노동자민중들이 경찰과 군대의 테러에 죽어가도, 집단적으로 내팽겨 쳐져도 열은 받지만 그렇게도 소망스러워하는 전국적인 들불같은 투쟁을 만들어내고 있지 못합니다. 1996,97년 총파업투쟁 이후 10년째 제자리걸음입니다. 자본과 정권은 앞서가고 있는데 진보진영 변역운동 진영은 제자리걸음(정체)이라면 자본과 정권에게 진보/변혁운동 진영은 대체 얼마나 뒤쳐져 있다는 걸까요? 물론 ‘노동해방’ ‘변혁운동’ 기치는 여전히 높이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과 권력은 깃발만이 펄럭이는 진보진영, 변혁운동진영을 계속 깔아뭉개는 듯 날이 갈수록 기세등등합니다. 자본과 정권에 의한 일상적인 ‘사회적 전쟁’은 지금 평택 대추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군기지 확장저지 평화쟁취 투쟁, KTX 승무지부(비정규직 여성 승무원들)의 투쟁, (한미) FTA 저지 투쟁 등으로 노동자민중여성 투쟁의 전선들을 확대시키고 있으며, 투쟁전선은 만개하는 꽃봉우리처럼 한 가지에서 열 가지 스무 가지로 펼쳐져 있습니다.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투쟁은 물론이거니와 FTA 반대투쟁과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 등 날로 확대되고 있는 투쟁전선들 속에서 변혁운동 진영은 허덕이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적들이 너무 강한 것일까요?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변혁운동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색과 새로운 변혁전략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여기에 한 가지 다소 느닷없는 토론제안을 드립니다. 이를테면 가령 ‘여성총리 1호’ 탄생을 우리는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요? 한국에서 최초로 여성이 총리가 되었습니다. 우선, 여성이 총리가 됐다는 사실은 어떤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더욱이 현 정권은 이라크 파병, 미군기지 확장, 비정규직 양산,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촉진 등등 노동자민중을 옭죄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권입니다.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전개하는 와중에 신자유주의 정권에 발탁(?)되어, 총리가 된 한명숙 총리 임명이 변혁운동 진영에 넘기고 있는 과제는 무엇일까요? 너부리의 통찰을 계기로, 우리사회의 ‘진보’와 ‘변혁’에 대해 그리고 변혁운동 진영에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심각하게 함께 생각해 봅시다. - 편집자 -
한명숙 총리
한명숙 의원 총리 지명에는 물론 그녀가 여성이라는 상징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총리 1호가 될 뻔 했던 장상 전 이대총장의 경우와는 확실히 달라지는 지점들이 있다.
한명숙 의원이나 강금실 전장관의 경우는, 그 전에 여성이라는 상징성을 업고 온통 남성들뿐인 지배집단의 "구색맞추기"를 위해서 여성들을 잠시 활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다른 단계에 진입했음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 토론회(참세상 기사 참조)에서 아무개가 민노당을 두고 "남성적 패권주의"에 쩔은 "아빠 정당"이라고 한 비판은 새겨들을 만한 데가 있다.)
한명숙 총리지명자는, 비록 부르주아 페미니즘 어쩌고 하는 겁나게 남성 중심적인 X같은 비판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여성들이 오랜 동안의 고되지만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서, 싸움을 통해서만 증강될 수 있는 실력에 의해서, 총리자리까지 갔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유의미하다. (물론 전윤철이나 김병준이 아니라 정치인을 이번에도 총리도 지명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그녀의 개인적 편력은 장상 전 총장의 그것과도 다를 뿐더러, 바끄네(박근혜)나 아시아의 공주-대통령, 명예남성 알고 보면 여자판본의 마초 전여옥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늬만 여성인, 소위 여성주의 의식을 검증받지 못한 여성들의 정치참여가 과연 여성운동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비판은, 부분적으로는 한명숙 총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비판이거니와, 이 논쟁은 이미 2002년 대선을 두고, 고은광순과 같은 순진해서 멍청한 여자들의 바끄네 대통령 운운하는 삽질이 불러일으킨 사건들로 이미 한 번 정리가 된 바 있다.
전여옥, 바끄네 같은 자들이야 명예남성-여성마초이므로 논외로 치거니와, 설사 한명숙 총리가 무늬만 여성이라 칠지라도 여성 관료들의 양적증대는 중요하다 (우리나라 여성인권은 세계 최하위권-3등-이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것은 무시해도 좋을 만한 사소한 항목이 아니다. (진보정치 조직/연구소들의 여성활동가/이론가들이 종종 보여주는 안타까운 행태처럼) 몸이 여성인 것을 애써 외면하고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여성혐오증의 뒤집힌 형태이자 (여성일 경우) 내면화된 형태이기 십상이다.
여성관료, 여성활동가들이 조직 내 중요한 자리를 차치하는 것이 늘어나면, (밤늦게 보란 듯이 룸살롱에 가서 지배집단들, 자본가들과 난리부르스를 떠는 등의) 부패와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틈새가 늘어날 것이다.
이는 여성들이 원래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여성들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되어왔으므로 부패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만들 기회가 적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성관료나, 진보조직들에서 여성대표/지도부의 증가는 소위 '보스'정치, 학맥, 지연, 혈연, 계보, 정경-정언유착 등에 바탕하여 권력구도를 재생산해 온 기존 남성들의 방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한명숙 총리 지명자가 60세가 넘어가는 동안 '부르주아'에 해당할 수입과 재산을 가지게 되었으며 (쁘디)부르주아 계급이라 할지라도, 여성운동이 여성의 지위와 권익을 향상시키겠다는 <젠더 당파성>을 분명히 표방하고 나온 정치운동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여성운동에 대한, "남성 패권/주도주의"에 쩔은 남성중심적 비판들의 단골메뉴의 논리는 매우 빈약하며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다. 그 단골메뉴란 여성운동의 중산층화이다. 남성중심적 진보진영들은 자기들의 존재가 잊혀질만하면 혹은 영향의 불안에 스스로 잠식당할 때마다, 2002년에 삐급꼴통좌파 김규항이 그랬던 것처럼, 페미니즘의 중산층화를 "우려해주신다." 즉, 여자들을 힐난하고 남성우월주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쫀쫀하고 찌질시렵게스리 자기들의 진보성을 확인받고자 한다.
남성 패권적 진보진영의 비판은 이렇다. 여성운동은 계급당파성으로 돌아오라. 즉, 젠더당파성을 그 핵심으로 하는 여성운동에게 그 스스로이기를 포기해야만 진정한 여성운동이 된다는 협박질. (이런 협박성 판단이야말로 겁나게 남성중심적이지 않은가? 이들은 젠더권력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기 때문에, 젠더권력에 관해서는 지배자의 시각밖에는 가질 수가 없다. 맑스가 피지배자들의 시각은 최소한 이중적이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피지배자는 지배의 시각에서 뿐만 아니라 피억압자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여성들의 시각들은 계급뿐만 아니라 젠더를 통해서도 세상을 본다. 한 마디로, 세상을 보는 눈이 여러 개인 것이다.) (2006년 3월26일)
용의 눈: 가부장제 내에서 비판마비의 지점들
거기서 거기, 그거나 이거나. 변화의 열망을 한사코 배신하는, 느린 변화 속도에 대해서 나오는 실망(혹은 패배감)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한 미련시련 열망의 표현이다. 누가 이길까? 그건 우리 자신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명숙과 바끄네. 거기서 거긴가? 결코 그렇지 않다(물론 이건 나의 사심가득한 해석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에서 그치는 발언이 아니라 다른 해석들을 들이대시라). 좌파 인터넷거리에 여성문제에 대한 좌파 특유의 노동강박적 무관심과, 무엇보다 젠더 유물론의 부족을 봄시롱, + 해방적 관점에서의 사회변화가 열라리 장구할 뿐더러 달팽이 걸음마냥이기도 하다는 점(물론 끊임없이 이윤을 창출해야 존재할 수 있는 자본의 견지에서 변화는 거침이 없으며 그 물결은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빠르다)을 생각함시롱 든 생각들….
바끄네는 여자라서가 아니라 ‘각하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정치 전면에서 활용된 카드다. 딴회창(이회창)의 권위주의적 정치질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패하자 갱상도 인심을 중심으로, 딴회창의 대쪽같은 (이건 남근이미지 그 자체다) 이미지가 아니라 다른 부드러운 이미지가 필요했다. 여기에 ‘대통령의 딸!’(아들이 아니라. 사실 조지고 부시는 머저리처럼 아들이었다면, 딴날당의 최근 헛삽질은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터이다)이라는 점이 여성들을 잠시 현혹했다.
여성들은 아직도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정의되고, 특히나 아직도, 너무나 오랜 동안, 여성이 금기시되는 영역인 제도 정치에서는 (과학도 여성이 금기시된 영역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남자들끼리의 권력다툼의 어느 지점에서 여성들이 ‘활용’되느냐에 따라 여성정치인이 평가되기 땜시롱, 이런 점에서 바끄네나 한명숙이나 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바끄네는 ‘여자’라서가 아니라 ‘각하의 자식'이라서 박정희 향수산업을 통해 헤게모니를 쪼끄미나마 유지하고자 한 세력들에게 활용된 경우다. 즉, 바끄네는 여자가 아니다. 바끄네가 여자가 되는 순간은 딴날당의 중진 세력들이 설칠 때뿐이다. (즉 딴회창이나 최틀러(최병렬)가 시절이라면 딴죽을 피지 못했을 딴날당 중진들이 여자 대표 바끄네를 만나서 더욱 세력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이런 중진들의 권력화는 딴날당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몬한다. 딴날당이 살길은? 무조건 권위주의적으로, 대표가 까라면 까 식으로 가야만 걔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 왜? 걔들은 독재시대의 유물에 기대지 않고서는 아무런 호소력도 아무런 동력도 없기 때문이다.)
한명숙 총리의 경우는, 여성들이 사회적 압력을 행사함시롱 국가와 ‘결탁’하는 방식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어제인가 그제인가 사회진보포럼에서 조이여울은, 여성단체들과 국가의 결탁 과정에서 드러난 여성운동의 보수성을 열라리 비판한 바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해 보겠다. 말이 '결탁'이지 어찌 보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진보연구소/조직들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이 남성들 눈치나 봄시롱under men's eyes 알아서 남자들의 관습, 아비투스, 언어를 흉내냄시롱 때로 여성들을 알아서 먼저 폄훼함으로써 인정받을라는 작태를 보라. 이건 한명숙총리활용껀과 비교하자면 한 백만배는 심각한 문제다. 열린당이 눈치나 봄시롱 우왕좌왕하면서 지지를 다 까먹듯, 여자들도 이렇게 남자들 눈치나 봄시롱 알아서 기면 머 얻을 게 있는 줄 아는가. 하나도 없다. 결단코 없다. 술자리에서 술은 잘 따라줄 수 있을지 몰라도, 권력의 견지에서는 언제나 따당한다. 차라리 저항하라. 저항할수록 권력을 쥐는 모순카드를 활용하라.)
한명숙은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여성단체 활동을 통해서, 여연대표질을 하다가 초대 여성부 장관이 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여성을 활용해 먹는 영악함(과 여성문제에 대한 약간의 열린 자세)에서는 좌파들보다 시대 흐름을 앞서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후로 여성부가 여성가족부가 된 사건은, 가부장적 남성지배가 여성들을 통제하고 활용해 먹을라는 수작을 고대로 드러냈으며, 남자들 속에서(under men's eyes) 일하는 여자들이 얼만큼 비굴을 떪시롱 협상해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운동들이 변혁이라는 패를 손에 쥐고서 제도 속으로 스며드는 과정에는 언제나 딜레마가 있기 마련이며,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언제나 변질(변혁이 아니라)을 거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나 정치) 제도 속으로 스며들어 내부로부터 파열시키는 과정은 (차라리 차에서 내려 걷는 게 더 빠를 만큼) 속터지게스리 느리다.
이건 딱히 여성총리 1호 탄생 과정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바, 민노당 의석 10석(이제는 9석)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라. 민노당 10석도, 지역구 2석을 제외하면, 정당투표제라는 부르주아적 정치개편을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 얼마나 느린 과정이었으며, 노동자 투쟁의 축적이 그 물밑 힘(저력)을 이룬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제도적 "배려"가 없었더라면 부분적으로 불가능한 성과였다.
여성운동/정치의 성과와 한계들은 노동/계급의 잣대로만 해서는 포괄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성, 섹슈얼리티, 젠더, 계급 등이 권력 네트워크로서 동시에 복잡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민노당 10인의 의원들이 일당백은 아니더라도 일당십!은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여적까지 응원중이다. 그런데? 일당십!은 커녕 개뿔이나. 그리고? 열라리 언론탓만 한다. 열심히 하는디 부각을 안 시켜준다고.
(민노당에 관심많은 나도 10인 의원을 다 외질 못한다. ‘불판 가는 전교1등’ 노회찬, 10인 중 젤로 똑똑해 보이고 강단있는 심상정, 그리고 남근 이미지 그 자체인 X대가리 권영길, 한심한 사법권력의 엉뚱한 화풀이 + 노동자들의 자기배신으로 죽어버린 조승수, 보수적인 정치모리배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천영세, 농민대표, 노동자 대표의 상징성에서만 놀고자빠졌는 강기갑과 단병호..........)
다시 바끄네 이약으로 돌아가 보자면, 바끄네에 관한 우리 사회의 비판 무능력은 이미 <효자동 이발사>에서 드러난 바 있다. <효자동 이발사>는 확실히 웃기는 코미디도 아니요 그렇다고 날선 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징글징글헌 집요험이 있는 것도 아님시롱 스타 배우 하나에 의존허는 밋밋한 영화같음시롱 별 정보도 얻을 것이 없는 그런 영화지만,
우리 사회가 왜 바끄네를 비판하지 몬허는지를 징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분석할 만한 점이 많은 영화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
이 영화는 우리가 이미 포스트독재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불고하고 독재시대의 유산들에 대해서 주인공 송강호(극중 아버지, 성한모)만큼의, 딱 그만큼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독재시대의 사회적 억압을 온 몸으로 겪은 피해자, 아들 낙안은 화려한 등들로 설치된 전기고문기를 크리스마스 트리쯤으로 생각하므로 고문을 고문이라 여기지 못한다. (이것은 독재의 유산으로 남겨진 미시적 파시즘, 미시폭력들에 대한 우리의 둔감성을, 그라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 본성상 똑같은 국가 폭력을 권력으로 둔갑 인지하는 우리의 또다른 둔감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독재의 피해가 극복되는 방식을 보여주기도 하는 이 영화는 이 지점에서 매우 문제적이다. 전기고문으로 서서 걷질 못하는 낙안의 불구는 아들을 낫게 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부정(夫情. fatherhood)에 의해서 고쳐진다는 점은 자못 시사적이고 징후적인 데가 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청와대 잔디밭에서 박지만으로 상정되는 애새끼에게 자기 아들이 대들자 자기 아들을 위해서 먼저 알아서 자기 아들을 후려치는 인물이다.
풀어서 이야기 해보자. 아버지로서 성한모(송강호)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아들을 낫게 하기 위해서 행한 모든 행동은 어린 아들(딸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 (이 영화의 화자는 낙안, 즉 아들이다.)
낙안은 사실 성한모가 낙안의 어머니 처녀시절에 성폭력을 휘두름으로써 태어나게 된 자식이기도 하다. 즉, 성폭력과도 다름없는 행동은 아들의 어머니를 만들어주기 위한 행동으로 정당화된다.
무엇보다, 군사독재가 희생시킨 피해자, 낙안은 ‘용’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는다. 전국을 떠돌며 아들의 다리를 고치려던 차에 ‘용의 눈’을 먹으면 나을 거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죽을 용기로 박정희(‘용’)의 장례식 영정 그림에 있는 용의 눈에 칠해진 물감을 물에 타서 아들에게 먹이고 아들은 낫는다.
다시 말하자면, 낙안(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독재 폭력에 희생되고, 역설적으로 눈물나는 부정(fatherhood)을 통해서 불구의 다리를 고친다.
이렇게 아들로서 존재하는 낙안이 어떻게 독재의 폭력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독재시절과 그 억압적인 유산들을 낙안을 통해서, 즉 ‘용’의 찬양자였던 아버지를 다시금 매개로 해서 독재의 폭력이 남긴 흔적(불구의 다리)을 없앤 아들의 시선을 통해서, (그럼으로써) 독재와 그 유산을 마주하는 한, 우리는 바끄네를 비판할 수 없다. 바끄네에게 아버지는 비명에 죽어간 존재다.
바끄네 그리고 진보운동의 청맹과니
우리가 가부장적 질서와 가치체계를 문제시할 길을 찾지 못하고, 남성지배의 (때로는 영악한) 여성 활용법의 딜레마에 적극적으로 대면하지 않는 한, 그 위에서 군사독재를 기억하는 한, 가부장인 박정희와 그 아버지를 상실하고 (그 후광으로 정치 전면에 나선) 바끄네의 정치를 비판할 길은 없다.
이것이 바로 독재정권의 폭력성과 그 억압적 유산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바끄네에 날로달로 우호적이 되어가는 ‘우리’의 청맹과니같은 시각을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다.
낙안이 전기고문을 받으며 크리스마스 트리같이 반짝이는 전구들을 봄시롱 고통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바끄네를 통해서 독재시절의 섬뜩함을 기억하지 못하며, 바끄네를 통한 ‘부드러운’ 독재(독재보다 더 무서운 독재의 유산)의 시껍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에 발표된 <효자동 이발사>는 부정(夫情 fatherhood)를 통한 절절한 호소력을 통해서 가부장제를 옹호하고, 그럼으로써 독재시절의 ‘가부장’/아버지의 폭력과 그 유산에 대해 문제삼지 못하게 한다. (성한모/송강호와 박정희는 둘다 부정 절절 넘치는 아버지! 였던 것이다.)
바끄네는 우리 사회에 가장 비민주적인 지표이다. 바끄네는 여성도 아니거니와 누구나와 평등한 한 명의 시민이 아니라, ‘혈통’, ‘각하의 자식’이라는 ‘신분’이라는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들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활용해 먹음시롱, 등장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란 서구에서도 우리 사회에서도 혈통이나 신분과 같은 태생적 지표들을 해체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지속되었다. (바끄네는 민주주의가 그토록 해체했던 바로 그 지표, 혈통을 업고, 민주주의를 활용해 먹는 비민주적인 것들의 대표상징이다.)
민주주의란 끝끝내 완성, 완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진행시키는 동력이다. 즉, 민주주의란 자신의 합법성을 끊임없이 심문하고 성찰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근본은 정치권력과 정치질의 한계를 가시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갈등하는 세력들이 구체적이고 특수한 맥락에서 서로 경합할 때, 특정한 제도적 행위의 우연성(원래 그런 것도 아니었거니와 필연적인 것/제도도 아니었다는 점. 즉 바뀔 수 있고 바꿀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남성패권적 좌파 운동들과 여성운동들의 [중첩지점이 아니라] 길항 관계이리라.)
바끄네는 우리 사회의 확고하고도, 전복은커녕 흔들기조차도 어려운 무의식까지 파고든 가부장성(김일성 수령님. 노조없는 삼성신화가 가능하게 맹그는 이씨집안 가부장들에 대한 삼성맨들의 자부심, 무비판적 존경과 숭배), 가부장제의 확고하고도 유효한 작동 없이는 등장할 수 없었던 정치인이다.
우리는 민주화 이행과정에 있다. 바끄네들이 날뛰기도 하며, 자칭 개혁 세력들이 알아서 먼저 개혁을 져버리고 자본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독재시절 절대 권력이 아니라 ‘관습’과 ‘향수’를 타고 여전히 행사되는 폭력에 둔감하다면, 우리는 더욱 미세해지고 더욱 강해진 또다른 파시즘의 횡행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낙안의 딜레마, 아버지에 의해서 독재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다시 아버지에 의해서 독재폭력의 상처를 치유받음으로 해서 독재폭력과 그 유산을 비판할 수 없는 청맹과니의 딜레마.
이 딜레마는 가부장제의 작동과 모순을 꿰둟는 시각들을 통해서 돌파될 수 있다. 즉, ‘아들’(바끄네는 딸이 아니라 아들이다)이 아니거나 아들과 다름없는 존재(이런 점에서 여성인 바끄네는 명예아들이다)가 되길 거부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시각들에 의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시각들은 최소한, 이런 폭력과 비판무능력한 착시의 그 핵심에 있는 젠더권력, 가부장제가 있다는 점을 본다. (2006년 3월 28일)
관념들, 언어들의 물질성
푸코가 말한 "관념들의 물질성"이란 "사람은 자기 발언의 실천을 지배하는 권력 구성체들과 진리의 네트워크를 추상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지식-권력의 네트워크 속에서 관념들은 우리의 사유에 틀을 지워주며 언어를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물질적"이다. (물질적 효과를 낸다.)
성주류화. 요짐 인터넷에 떠도는 말들 중에 이 말만큼 언어, 관념의 물질성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 또 있을까.
말 그대로 보자면, 여성을 주류로 편입시키는 것이라는 뜻일텐데. 일부 여성들이 (여성 억압을 은폐하는데 동원됨시롱) 주류로 편입되는 것은 근대 이후로 드문 일이 아니었다. (물론 부분적으로 이것은 여성들의 지난하고도 장구한 투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성주류화란 아마도 토크니즘tokenism일텐데, 토크니즘이란 ‘고분고분한’ ‘위험하지 않은’ 여자들만 일부러 골라서 ‘여성적 성공의 전형’으로 ‘인정’해줌으로써, 그녀들을 "상징"으로 맹글어, 여성억압을 은폐하고(즉 여성억압적 현실에 아무런 의문을 표하지 못하게 함시롱), 여성들을 이간질하는 것.
토크니즘의 폐해는 여성들 사이에 ‘나도 할 수 있어!’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킴시롱 ‘남성중심적 사회 진입 경쟁’(알고보면 이간질)을 부추긴다. 토크니즘의 이데올로기적 전리품은, 특권을 누리는 토큰 여성들로 하여금, 확장하자면 사회로 하여금 자기들보다 ‘특혜’를 덜 누리거나 누릴 특혜라고는 없는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게 맹근다는 것이다.
(주변의 저항성과 정치성을 탈색함시롱 ‘고분고분’해질 수 있는 주변의 일부를 포섭하여 주변 전체를 억제하는 전략. 즉 포용-억제containment 전략은 자본의 탁월한 (혁신)전략이기도 해왔다. 이런 토크니즘도 이런 포용-억제전략들 중 하나다. 흑인을 포함한 인종적 소수자들에 대한 포용-억제 전략도 인종적 토크니즘을 열라 잘 써먹는다. 즉, 토크니즘은 딱히 여성에게만 가동되는 것이 아닌, [남성]지배와 자본의 영악한 전략들 중 하나다.)
성주류화라는 말은 열라 남근중심적인 허위의식을 이 단어 하나로 퍼뜨리는 효과가 있으며, 이 효과는 그 어떤 지배이데올로기들의 위력에 뒤지지 않거나, 심지어 더 강할 것이다.
성주류화라는 말은 여성<도> 주류가 되고 될 수 있다는 관념을 반영하고 있지만, 현실은, 여성이 사회의 많은 영역들에서 주류를 점하기에는, 한참 멀었다.
한마디로 여성 억압적 현실을 은폐하면서 동시에 여성억압을 열라 정당화함시롱, 그나마 열라 조금씩 나아지는 현상유지는커녕 겁나게 퇴행시키는, 물질적 위력을 발휘하는 말이다.
또한, 성주류화라는 말이 진보진영에서 회자된다면, 그것은 진보진영의 온갖 부분의 무기력과 총체적 무능력, 그리고 불안을 여성에게 거꾸로 투사한 말이기도 하다는 것이리라. 진보진영의 진보성을 꼭 여성(문제)을 통해서 확보해야 하는가? 여성문제를 대하는 진보진영의 태도에는 자기불안이 배어있다. 왜 불안할까? (이 질문은 각자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리라.)
여성과 계급, 젠더와 계급은 중첩되는 부분도 있고, 계급으로 포괄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
진보임을 사칭하는 사이비 진보인 양성평등연대, 한국인권뉴스 등이 여성계를 여성"권력"계라고 부르는 것을 보라. 딱 맞는 것은 아니지만 유비(analogy)를 쓰자면, 이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권력’계라고 이름붙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가부장적,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의 ‘권력’이라니?
한명숙 총리 건을 두고 진보진영이 꼭 한 마디 해야 한다는 것. 강박 아닐까? 진보진영 내부의 남성중심성을 내부로부터 밀착하여 비판하고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만약에 민노당의 전 대표 김혜경 혹은 심상정 의원이 여성총리에 지명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여성보다는 진보성이 강조될려나? 아니면 여성과 진보를 모두 강조하는 쌍끌이 효과?
여성총리를 자본과 묶어, 여성총리 1호의 상징성을 훼손하는 것보다는 나로서는 그녀를 적극 최대한 활용하여 여성들의 공간을 보다 넓히고 보다 여성해방적인 문화를 맹글려고 하는 게 나은 것 같다. 여성문제는 자본/노동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전 민노당 대표 김혜경의 경우, 왜 그녀의 ‘여성’임은 부각되질 않았나? 이것이야말로 진보진영의 젠더(성별)맹안(성인지적 의식의 부재)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내가 진보진영의 노동계급중심성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들을 좀 더 복잡하게, 좀더 유물론적으로 보자는 거니깐.)
우리는 ‘강박’으로부터 어떤 문제를 제기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 강박은 문제제기를 엉뚱하게 하기 십상이다. 강박 대신에 밀착하고 천착하라.
무엇보다, 출발점으로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개의 눈을 갖는 것이고. 여러 개의 입구들과 출구들, 들뢰즈가 말한 천개의 고원을 자유로이 유영하는(물고기처럼 물=현실 속에 있으면서 그 속을 움직여 가는 것) 테크닉을 <습관>화하는 것이다.
변혁은 습관(아비투스)에서부터.
성주류화라는 말. (진보주의적인 척하지만 실은) 여성혐오증에서 나온 말이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말에 대한 의식적 비판과 검토 없이 진보는 시작되지 않는다. 진보란 자기의식self-criticalness에서 싹트고, 진보를 견인하는 정치적 협상이란 자기비판적/성찰성을 지닌 의식 위에서라야만 가동될 수 있는 것이기에. 말의 권력이란 <누가> 말하느냐, 누가 <듣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점 또한 다시 기억하고 유의해야 하리라.)(2006년 4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