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미래를 제120호
너부리
여이연 정신분석 세미나 팀,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 (도서출판 여이연 2005)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구미호 이야기: 남성들의 불안
구미호 이야기. 이 이야기도 재현(이야기 맹글기, 역사쓰기)에서 누가 ‘두목’인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실은 지배계급에 픽업(‘간택’)당하고 싶은 남성들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남성성이 훼손되므로 성을 바꾸어 여성욕망인 듯 풀어낸 이야기이듯, 구미호 이야기는 남성들이 무서워하는 여성들은 이런 것일 것이라는 남성 판타지 이야기이다. 구미호 이야기는 꼬리 아홉달고 남자들의 간과 심장을 파먹음으로써 사람되고 싶어 안달난 여우가 실은 남자들이 만들어낸 여성이라는 점을, 즉 가부장적인 제도가 만들어낸 착각속의 여성이란 점을 잘 보여준다. 구미호 이야기는 ‘여자들이여 남자가 (‘우월’한 존재이므로 남자가) 되려고 애쓰라, 그렇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너의 운명’이라고 ‘가르친다.’
혜화동에 있는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다락방의 ‘여우’(女友)들은 여우라는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재미나게 비틀어 쓴다. 그렇지만, 이 여우들은 분명히 알고있다. 남자들이 만들어낸 구미호 이야기는 결국, 밤중에 온갖 난리를 떤다고 인간이(man 즉 남자가) 될 수도 없거니와 남자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교훈’을 ‘하사’하는 이야기란 점을. 이런 교훈질을 하는 남자들이 사실은 여우들한테가 아니라 자기 침대 밑에 사는 악어들한테 잡혀먹는 불안에 벌벌 떨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점을. 이 여우들의 열 세 개의 시선은 지배계급으로서 남성이 어떻게, 왜 시달리는지를 다른 시각으로 본다.
이 ‘여우’들이 다락방에 모여 낸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도서출판 여이연)는 페미니스트 무림의 새로운 내공과 신기를 가르쳐주는 페미니즘 무협이자, 대중문화 텍스트(주로 영화) 분석의 탈을 쓴 페미니스트 정신분석 지침서요 쉽고 재미나게 배우는 페미니즘 이론서이다.
타자들에 대한 집단적이고 의지적인 무시에 맞서서
제도와 권력에 의해서, 자기들의 힘을 믿고, 혹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발동되는 무지, 이에 수반되는 사회적 집단적 무시를 의도적 무지/무지(willing ignorance)라고 한다. 심리적으로 의도적 무지는 성찰하는 의식을 가동시켜 바라본다면 자신의 어떤 부분들이 너무나 아프기 때문에 거의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혹은 의식적으로 가동되는 심리기제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의지적 무시는 자기방어기제의 일부다. 하지만, 이런 심리기제가 집단적으로 사회적으로 가동될 때는 부정의 폭력이 되곤 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맥락에서, 특히 제국주의가 서구의 선진 문물을 통해 가동한 인식틀적 폭력을 두고, 스피박은 이런 종류의 의지적 무지/무시를 “인가받은 무시/무지”(sanctioned ignorance)라 쓴 바 있다.
보려 하지 않고 인정하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척을 떠는 그런 무지. 이런 무지는 특정한 진리체제의 일부이다. 즉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 혹은 사회의 어떤 부분들과 측면들에 대해서 망각에의 의지를 발동하여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 혹은 그것들에 대한 무지와 무시를 당연시하고 자랑하는 집단적 공모. 그리하야 무지가 역설적이게도 어떤 지점들에서 앎의 특권으로 가동되도록 하는 체제.
타자의 정치, 타자의 유머
이런 체제에 다락방은 여유와 유머로 대응한다. 이 책은 “어이 거기, 우리도 인간이여. 우리도 좀 봐주셔!” 하고 찌질대고 징징대지 않는다. 대신 이런 집단적인 남성중심적 “의도적 문맹”을 촌철살인하는 기예는 다름아닌 여유와 유머라고 말한다. 연애질의 모든 것을 파헤치는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이 이론 및 분석적 발효, 숙성상 약간 뜹뜨름한 맛을 지닌 다소 거칠지만 재미난 책이라면, 다락방은 5년간 숙성된 페미니스트들이 사회집단무의식을 징후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분석한 탁월한 예를 보여준다.
보다 미세하게는 이런 종류의 의도적 무지와 무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들 스스로에게, 노동자와 여성,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매일 직접적으로 가동된다는 점을 대중문화에 숨어있는 집단 무의식들을 섬세하게 분석함시롱 까발리는 장들이나(예컨대, <올드보이>, <봄날>, <아일랜드>, <바람난 가족>, <영매>, <여고괴담>, <친절한 금자씨> 분석 장들),
“저렇게 될까바 두렵다”는 심리기제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지배이데올로기들에 ‘저주’와 ‘비체들의 유머’로 고단수 대응하는 방식들(예컨대 <영매>, <김약국의 딸들>, <일요일의 스키야키 식당>, <얼굴없는 미녀> 등)에 대한 분석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합리적 논쟁이니 합리적 핵심 대신에 이 책은 의도적으로 사회적 무의식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유령으로만 떠도는 그런 주체들이 남기는 그림자를 ‘바리하기’로 불러낸다. 그림자가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그림자가 아니다. ‘타자’지만 주체다. 이런 ‘타자’들이 보여주는 것은, 1) 알고보면 ‘타자들’ ‘비체들’에 대한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들(‘나 그렇게 될까바 무섭다야’하면서 부정하는 것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밤의 연회를 열어 무언가 (가부장제가 알면서 알기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비밀’을 모의하는 마녀집회마냥 삐딱하고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가동시키는 또다른 리비도적 무의식들, 3) 창조적이며 능동적이기 때문에 억압되어 온 거대한 무의식들이다. ‘바리하기’라는 새로운 신공에 대해서는 <영매> 장을 잘 읽어보실 것.
이런 무의식들을 찾아 나서고 분석해서 대체 무엇에 쓰자는 것인지 왜 하자는 것인지가 궁금하다면 두 편의 서문(머리말과 서문)을 직접 읽어보시라. 머리말은 따로 또 함께 폐끼침시롱 공부하고 모의하는 일의 즐거움을, 날나리 여우되기 신공의 과정을 스냅사진처럼 보여주는 글이고, 서문은 페미니즘의 자기성찰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한편의 진지한 유머다.
찌질대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웃겨서 낙후시켜라. 이 책이 권하는 페미니스트 유머 신공이다.
타자란 배제와 주변성의 표식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자면 강력하고 대안적인 주체 위치들을, 다른 식의 주체 형성을 탐색할 수 있는 지점들이기도 하다. 이 책이 분석하고 있는 다양한 대중문화 텍스트들에 나오는 타자들은 대중문화에 의해서 ‘팔릴 만한’ 상품으로 가공되기도 하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들 안팎을 가로지르며, 고통을 말하고 그 고통들을 가로질러 정치적 윤리적 변혁의 거점들과 결정적 지점들을 시사한다.
“소통, 경합, 횡단의 정치, 페미니즘”
2005년에 출판된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우리들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에, 당하면서도 무시하고 넘어가지만 상처가 되는 경험들에, 우리 역시도 자행하는 미시적 폭력에 대해 성찰적이고 해방적인 언어, 해방의 언어, 다른 사유를 선사해주는 책이다. (상황의) 복잡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익숙한 지배적인 관념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책.
여성의 전화에서 10년 넘게 활동해 온, 성폭력 문제 전문가이자 페미니스트-여성학자인 정희진은 그녀의 이력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현장, 실천, 운동 대 이론, 공/사, 정치/사생활의 “경계를 깨는 것”을 운동으로 삼는 활동가이자 분석가이다. 그녀의 논의를 통해서 ‘진보’, ‘변혁’ 개념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다시 급진화된다. 물론 밀착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은 들러붙는다). 소위 (자칭) ‘진보’진영이 여성운동을 향해서 보이는 여러 가지 윽박지르기들(예컨대, 진보/혁명/민족이 먼저냐, 여성이 먼저냐는 자지중심적 헛삽질)의 비논리성, 뿌리깊은 남성중심성을 밀착해서 파고드는 저자는 여성을 영원히 피해자로 고정시켜 놓고서 ‘진보’정치에 동원해 먹는 ‘진보성’을 심문한다. 이러한 사이비 진보성은 여성들이 “남성 주체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희생자, 피해자이기를 욕망한다(39). 말할 수 있는 권력은 남성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런 날강도같은 주장의 역사가 수천년이라면 그 누구도 이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 . . 또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정신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40-1).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협상의 도구로서 여성주의는 “이제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는 것”(70)이며, 주변화된 타자들을 배려할 수 있는 윤리와 정치학이자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67)이다. 여성의 몸과 경험에 기반한 유물론적 정치학으로서 페미니즘.
“한국사회 일상의 성정치학”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이 책은 우리의 일상에서 촘촘하게 실행되면서도 “그 까짓꺼”하고 무시하도록 훈련시키고 강요하는 성정치학의 작동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사회 변혁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려는 거대 서사들은 좌초한지 오래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붙들고 있는 거창한 이데올로기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자는 일상을, 평범한 삶의 문제들에 천착한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쓰여진 이 책의 다양한 논의들을 따라가다 보면, 왜 우리 사회의, 확장하자면 20세기의 (실패한 혁명들을 포함한) ‘진보’가 언제나 파편적인 것(즉 남자들끼리의 권력투쟁에만 머무르는 ‘변혁’)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머리는 변해도 몸이 구태의연한 탓이다. 20세기적 ‘의식화’의 한계랄까. 세상을 변혁시키겠다면서 자기 자신은 그 변혁에 저항한 것이다. 저자 말로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를 못한 것이다.
페미니즘과 소수자들의 정치적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된 소중한 통찰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변태”의 핵심은 자기변화(self-transformation)이며,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279). 남을 억압하면서 혁명을 하려는 자들은 결코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하여, 저자에게 페미니즘은 “우리 자신을 나날이 새롭게 만드는 매력적인 참고문헌”(26)이며, 끈질긴 비판이 몰고오는 생산적인 불편함을 신진대사적으로 소화해 내는 행위이자, 그 결과 차이들, 복잡성, 내 안에도 중층결정적으로 착종된 타자들이 주는 상처에 끊임없이 취약해지는(vulnerable) 것이다. 안다는 것,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종종 고통을 유발한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전까지라면 못보던/안보던 것들을 보이게 한다. 부정의 경험, 고통의 인식에서 출발하는 철학(인식)-윤리(‘변태’행위)로서 페미니즘.
“변태”하며 유목하기: 재배치-유통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내는 권력과 남성지배 기제들을 보다 정합적으로 분석하고 여러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의 성과들 중 하나다. 정희진 역시 구체적인 물적 조건들과 사회적 관계들에 따라 여성들 역시 차이를 띠기 마련이며, 다른 운동들이 그러하듯 여성운동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하나의 방식으로 통합되지 않는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여러 (집단적) 차이들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을, 사안이나 관계성에 따라 복수적인 입장을 띠는 한 개인들이기도 한 여성들을 싸잡아 “여성”으로 호명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억압이라고 일갈하는 저자에게, 예컨대, 정체성, 진보, ‘운동’이란 경합에 열린 대화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보편으로 화하지 않는 특수, 차이들을 구체적으로 맥락화하고, 내부의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대화와 소통은 시작될 수 있다. 즉, 보편화, 동질화, 자연화, 민족화가 주는 편안한 '순수'나 (알고보면 사이비인) '본질'보다는, "자신을 '오염'에 개방하면서" "소통가능한 보편"을 지향하는 횡단의 정치를 추구하자는 것(20). “소통, 경합, 횡단의 정치, 페미니즘”이라는 정희진판 페미니즘의 핵심에는 인식론적 투쟁이 페미니즘 이론과 정치의 심장부를 차지한다는 온당한 인식이 있다.
구닥다리 보편주의를 거부하면서 “정황적 지식들”과 복잡성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는 이 책에서 페미니즘은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퍼져나가는 재배치-유통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즉, 물질적, 제도적 사건들, 투쟁들과, 상징적 혹은 비가시적인 효과들을 텍스트 삼아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 넣어 다른 의미들과 가치들을 뽑아내고 새로운 관계성의 양상들을 유통시키는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 몇 가지만 예로 들자면,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은유로서 모성, 아줌마가 폄훼적 용어로 쓰이는 맥락과 성정치적, 사회적 함의, 말과 성차별, 여관의 성경제학, ‘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다이어트와 섹스, 진보 및 인권이라는 의문스런 개념들,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성역할, 여성으로서 늙는다는 것, 군사주의 등 각각의 분석‘텍스트’들은 한 여성의 입장에서 본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시/다르게 보았을 때, 다른 의미들을 드러낸다.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다름 아닌 폭력이었으며, 폭력이 권력으로 둔갑하는 것은 남성지배에 유리하게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는 인식-권력 네트워크를 통해서라는 것. 성, 젠더, 성적 실천, 섹슈얼리티, 나이 등이 사회적 의미와 가치들을 규정하는 권력 관계의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남성)권력의 복잡하고 미세한 작동 네트워크를 포착하는 또 다른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은 지배적인 의미들을 생산하는 주조틀을 비틀고, 넘의 둥지에 알을 낳아 키우는 뻐꾸기 마냥 권력 네트워크 안팎에서 지배적 의미망들에 균열을 내고, 다른 의미들을 산출하고 대안적 세계관들을 바이러스처럼 확산시킨다.
성매매는 권력 네트워크로서 성에 의한 폭력이다: 분석범주로서 젠더의 중요성
페미니즘의 도전은 앞서 소개한 이성숙의 논의를 보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진전시킨다 (특히 3부의 두 장, “‘성판매 여성’의 인권”과 “성매매를 둘러싼 ‘차이’의 정치학”). 이성숙이 2002년 책에서 간명하게 논의하고 있는 성매매 근절논리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정희진은 지금 여기 우리의 맥락, 즉 성특법 실행 이후와 성노동자 운동 출현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정희진은 성매매를 어떻게 할 것이냐 보다는 성매매를 어떤 문제로 구성하느냐가 더 유의미한 문제제기라고 본다. 그간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젠더 권력에서 ‘여성’으로 환원되었지만, 성특법과 성노동자 운동의 출범은 지금 여기 페미니즘(이론이자 실천으로서)에 여성들 간의 차이를 핵심쟁점으로 등장시켰다. 이성숙이 1장에서 성매매 여성에 대한 단일한 정의가 불가능하며 성매매 여성과 ‘일반 여성’의 경계는 지극히 애매하고 유동적이라고 지적했듯이, 정희진도 “성판매 여성”에게 부과하는 고정된 경계를 문제삼는다.
성노동자들의 인권이 유린되는 현실을 빙자하여 성매매 근절론을 펴는 것은 남성지배를 강화하는데 봉사하기 쉽다는 이성숙의 논의를 정희진은 젠더(권력)의 견지에서 급진적으로 확장한다. 이성숙이 서구 페미니스트 성매매론과 정치학들을 탈도덕성, 역사성의 견지에서 비판한다면, 정희진은 지금 여기 한국 사회의 성정치학의 핵심으로서 성매매를 분석한다. 우리 사회에서 도덕이나 계급의 문제로만 이해되어 온 성매매는 “가장 성별화된(gendered) 사회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몰성적(gender blind)으로 이해되어 왔다”(221). 정희진은 성매매 문제를 우리 사회의 젠더 맹안과 성적 실천에 대한 의도적인 무차별화(deliberate indifferentiation)이자, 여성과 남성에게, 그리고 여성들 사이에서도 불균등하고 불평등하게 작동되는 성-젠더-섹슈얼리티-성적실천-남성지배의 복잡한 네트워크의 문제로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이런 점에서, 성특법의 제정과 시행은 성매매 문제를 “공적인 문제로 만드는 가시화의 첫 출발점에 불과하”며(222), 성노동자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게 함으로써 여성들 간의 차이들을 냈다는 점에서 “한국의 여성운동과 여성학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226).
성매매 ‘피해’ 여성이나 성매매 여성이라는 용어가 ‘진실’을 호도하거나 반만 전달한다고 보는 정희진은 “성판매 여성”을 대안적인 용어로 제안한다. “여성은 성을 매매(賣買)하지 않는다. ‘팔기만 한다.’ . . . ‘성매매 여성’이라는 말은, 가정폭력, 배우자폭력, 부부폭력이란 용어가 아내폭력의 성별권력 관계를 은폐하는 중립적 용어이듯이, 성매매의 명백한 남성 권력을 안 보이게 한다”(227). 성매매는 성별 권력, 성차별, 섹슈얼리티 위계화가 복잡하게 착종된 문제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피해자화를 반대하는(“희생자화는 가장 세련된 타자화의 방식일 뿐이다”[39]) 저자는 “여성의 입장에서 성매매가 왜 문제인가, 누구의 무엇을 침해하는 문제인가”를 따져본다. 성매매 분석에 가장 강력한 범주로 젠더(권력)를 도입한 것. 남성지배가 여성을 착취하는 방식은 전방위적인데, 공적인 영역에서는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며, ‘사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가족, 이성애 관계, 성매매에서는 관계성을 혐오하고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감정 노동에 무임승차한다. 성매매 ‘근절’이 ‘불가능’하지만, 여성주의 정치 최후, 절대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남성의 의식과 무의식, 그들의 24시간을 혁명하지 않고서는 사라지지 않을 남성 젠더 문제다”(218-9).
이렇게 중층결정된 문제인 “성매매는 성폭력과 다르지 않다”(229)는 저자의 주장은 권력네트워크로서 젠더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의 양상을 가장 뚜렷하게 말해주는 명제다. 저자가 여기서 말하는 “성폭력”은 일상적인 의미의 성폭력이라기 보다는 성을 그 핵심 매개로 하는 젠더폭력을 일컫는다. 이 명제는 이론적 위험부담을 무릅쓰고서 주목하여 보다 복잡하고 정치하게 전개시켜 볼 만한 대목이(지만 아쉽게도 이 책에서 진전되지 않았)다. 1) 자발적인 성노동자들의 주체성(agency)을 지지하고 따로 또 함께 확대하면서, 즉 피해자화의 함정을 피하면서, 2) 여성의 몸에 대한 다양한 형식의 착취들이 근본적으로 젠더권력 관계 속에서 성에 의한 폭력이라는 점, 그리고 3) 성적, 정치적 주체들은 이미 언제나 구성되어 있기보다는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들에의 진입에 따라 유동성을 띤다는 점, 4) 여성들이 계급뿐 아니라 섹슈얼리티 혹은 성적 실천에 따라 다르게 위계화 된다는 점. 페미니즘의 도전 3부 두 장의 논의는 성정치학의 견지에서 성매매, 성노동을 접근하면서 그 핵심분석 범주로 젠더를 도입하고, 사랑, 감정, 섹스 등이 ‘노동’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정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보다 엄밀해졌지만, 성적 실천에 따라 여성들이 위계화된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최소한 이 네 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보다 변혁적인 성매매/성노동 이론이 필요하다.
“성판매 여성”?
대중적/학문적인 글의 경계를 부수면서도 문제의 복잡성을 놓치지 않는 이 책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이론적인 면에서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희망컨대, 위에서 저자가 지적한 온당하고도 날카로운 관찰들은, “성매매는 성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테제와 함께, 곧, 좀더 정치하게(minutely) 이론화될 것이다. 또 다른 예를 하나만 들자면, 담론(정치)에서도 누가 말할 것인가, 누가 듣는가가 중요하다. 본질이 아니라 구체적 물질적 현실에 따라 차이를 띠는 여성들 각각의 입장은 정황적 지식이며 부분적 진실이다....∞ 온당한 지적들이다. 내 소망투사적 욕심으로는 이론적으로 좀더 엄밀하고 구체적으로 진전되었으면 하는 지적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정희진의 후속 작업들이 기대된다.
여성은 성을 매매하는 것이 아니라 팔기만 한다는 의미에서 쓰고 있는 “성판매 여성”이라는 저자의 용어는 이론적 개념으로 쓰이기에는 좀 모호하고 (가부장적 남성지배 자본주의에서 모든 여성은 잠재적으로 성판매 여성이지 않은가), 페미니스트 정치적으로는 지나치게 현상기술적(literal)이다. “성판매 여성”과 같은 현상기술적 표현들이 개념적 용어로 사용될 때 발생하곤 하는 이론적 정치적 문제점들 중 하나는 기술되는 현상과 현상기술(description)에 개입되기 마련인 권력관계가 다시 은폐되기 쉽다는 점이다. 성매매, 성노동 문제를 다루는 3부의 두 장이 꽤나 설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판매 여성”이라는 용어는 정작 저자의 주요 논의, 즉 권력관계로서 젠더, 성매매의 성폭력성, 그리고 섹스판매가 다름 아닌 노동이라는 점을 부분적으로 가리는 효과를 낸다. 이런 점에서 이론적 용어 혹은 개념으로서 “성판매 여성”은 기술적인(descriptive) 수준에 머문다. 무엇보다, 내가 보기에 “성판매 여성”이라는 용어는, 애초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성매매 문제를 다시 여성만의 문제로 귀속시키는 효과를 낸다.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는 성에 의한 폭력, 젠더-섹슈얼리티 권력 네트워크를 통한 여성노동의 착취 문제를 은근슬쩍 다시 가린다는 점에서는,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치명 직전까지 간다. 문제를 거론하면서도, 정치적 이론적 입장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인, 거론되는 문제의 핵심 쟁점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용어랄까.
페미니즘은 유쾌하고 해방적인 바이러스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서론-본문장들-결론으로 이루어진 위계적 구조가 아니라 뿌리줄기처럼 퍼져나간다. 그러면서 정희진판 페미니즘의 언어와 사유를 바이러스처럼 내 안에 전염시키고, 그간 무어라 똑 부러지게 설명절합할 수 없었던 일상적 경험에 대한 분석적 언어와 해방의 경험을 선사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평’하기 어렵다. 읽고 정보를 얻는 책이 아니라 경험하는 책이다.
일상의 성정치학이라는 정희진의 주제와 분석은 바이러스처럼 나를 (그리고 독자들을 행복하게 그리고/또는 불편하게) ‘감염’시켜 다른 눈을 선사한다. 바이러스는 억압적 단결통합이나 융합 대신 확산시킨다. 이 바이러스에 저항을 할 수는 있겠지만 박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는 형태가 바뀌더라도 박멸되지는 않는다. 바이러스는 미세하게 파고들기 때문에 기동전이나 진지전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포착되지 않는 수법의 전투를 수행한다. 또한, 한 번 파고들면 그 파고든 것을 부지불식간에, 때로 급속도로 변형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변형되기 때문에, 치고 흔들고 빠지는 게릴라전과도 다르다. 바이러스는 그 침투를 두려워하는 ‘수호자’의 입장에서는 근본적으로 괴물적인 존재다 (자본과 남성지배에게 괴물되기를 두려워 말라). 발터 벤야민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론이자 실천으로서 페미니즘은 남성들(과 여성들)의 반발 속에 역사를 뒷걸음치며 미래로 가고 미래를 현재로 열었던 진보의 폭풍이었고, 그 움직임은 진지전, 기동전, 게릴라전이 아니라 바이러스와 같은 밀착침투전인 것.(http://blog.jinbo.net/neobu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