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OO카드에서 일하는 아무개입니다. 누구 고객 맞으시죠? 부가서비스로 최고 6억원까지 보장해드리는 보험을 가입해드리고 있습니다...”
“보험? 안 해. 바쁘니까 나중에 전화해”
“보험 많으니까 관심 없으시겠죠. 든든하게 보장받으시라고, 권해드리고 있습니다. 고객님, 치킨 좋아하세요? 피자 좋아하세요?”
“......?”
“치킨, 피자 값도 안 되는 돈으로 보험 드세요.”
올해로 4년차 텔레마케터를 하고 있는 30대 김은영 씨.
그는 경력 직원답게 노련한 말솜씨로 상대방의 화난 목소리를 누그러뜨린 뒤 바로 보험상품 소개로 들어간다.
고객 한 명과 입씨름하는 시간은 약 7~10분쯤. 그 10분 안에 상품을 살지 말지, 또는 화났는지 잠자는 지 전혀 모르는 고객을 상대로 상품을 파는 텔러는 만만치 않은 직업이다.
“고객한테 끌려가서는 안되요. 주도권 싸움이죠.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밝히는 김 씨는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 물불 안 가리는 맹렬 여성이다. ‘텔러를 선택한 계기요? 출퇴근 정확하죠, 근무시간 일정하고, 월급도 웬만큼 받아가니 결혼 뒤 살림하면서도 할 수 있다’며 장점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대부분 텔러들이 그렇듯 김 씨 역시 인터넷 채용대행업체를 통해 텔러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주5일 근무, 3개월 100만원 보장, 출퇴근 정확, 실적 무관, 환수 없음’ 등 모집조건이 마음에 들어 시작한 김 씨, 가뜩이나 취업이 힘든 여성한테 꽤 ‘괜찮은’ 직업으로 비춰졌다. 실제 들어와 보니 주5일 근무에다가, 야근, 특근 없이 오롯이 하루 8시간만 일한다. 거기다 서울 한복판 빌딩으로 출근, 발로 뛰는 영업이 아닌 사무실에서만 근무하는 사무직, 월급 역시 열심히 하면 저절로 쑥쑥.
그들이 일하는 일터는 깨끗한 고층빌딩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잡상인’ 때문인지, 아님 ‘최적의 통화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소음’을 막아야 하는 업무상 필요 때문인지 출입문 왼쪽 편에 자동번호키를 붙여 놓았다. 문이 열리자 영화에서나 봄직한 이름표가 붙은 수십 개의 작은 부스들이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 수 십명의 텔러들이 머리에 이어폰을 꽂은 채 책상 앞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오로지 상대 고객의 마음을 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영업용 사무실인 만큼 벽에는 ‘실적표’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그래프를 큼지막하게 그려놓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수십 명이 한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OO카드사 정규직원이 아니다. 그렇다고 위탁 관리를 맡은 XX보험사 소속 노동자도 아니다. 물론 채용 때 ‘OO카드사 텔러’란 채용공고를 보고 왔고, 계약도 맺었기 때문에 법적인 사업주는 명백하지만, 이 회사한테 직접적으로 업무지시나 관리 등을 받지 않는다. 즉, 이들은 저마다 카드사와 개인별로 도급 계약을 맺은 ‘자영업자’들이다. 물론 위탁관리를 맡은 XX보험회사 관리자한테 직접 통제를 받는다. 이 들이 하는 일은 카드사가 거액을 들여 만들어놓은 부스 안에 앉아, 카드사가 갖고 있는 고객정보명단 가운데 하루 60~80개 정도씩 건네받아 전화로 계약을 성사시키는 일을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가?
“저희는 기본급에다 각종 회사시책에 따른 수당 등을 합쳐서 받는데, 인바운드(In Bound), 나 아웃바운드(Out Bound) 중 어디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달라요”
김 씨는 현재 홈쇼핑을 통해 광고가 나간 뒤 살 뜻을 밝힌 고객 명단을 받아 전화로 계약을 마무리하는 인바운드 일을 하고 있는데, 아웃바운드보다 일이 쉬운 관계로 고정급 120만원에 20-30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전미순 씨는 잘 나가는 아웃바운드 텔러다. 아웃바운드는 그야말로 무작위 고객명단을 받아야 하는 까닭에 계약 한 건 성사시키기 훨씬 어려운 조건임을 감안, 실적수당이 더 높다고 한다. 두 남매를 키우면서 일하는 40대 여성인 그는, “제가 이 나이에 나가서 일할 때라곤 마트나 식당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많으면 400만원도 벌어요”라며 스스럼없이 월급을 밝힌다. ‘못 받아도 200만원’이란다. 여기서 일하는 아웃바운드 텔러들은 기본급 70만원에 각종 수당을 합쳐 평균 270만원쯤 받는다.
이쯤 되면 대기업 노동자 못지않은 ‘고수입의 자영업자’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자다. 고정급으로 받는 임금 말고도, 만근수당 10만원이 있다. 하지만 지각하면 이 수당은 몽땅 날아간다. 텔러들의 근무태도를 다잡기 위해 돈으로 보상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또 있을까. 또 이들은 아침 9시10분까지 출근해 저녁 6시10분 퇴근할 때까지 관리자들의 감시와 통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일한다.
점심시간 얼추 됐을 때 관리자 책상 모니터에 올라와 있는 실적판을 살짝 엿봤다. 벌써 6건을 성사시킨 텔러가 있는가 하면, 한 건도 못한 텔러도 여러 명 나왔다. 연이어 실적 대비 자동으로 계산된 월급 리스트도 촤르르 떴다. 어느 텔러인들 이 실적판을 ‘소 닭쳐다보듯’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을까. 거기다 실제 사무공간을 옮겨 놓은 듯 사이버 부스 화면 위로 누가 ‘근무중’이고, 누가 ‘대기중’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설치한 자동프로그램은 그야말로 텔러들을 손바닥에 올려놓는 수준이다. 소름이 돋는다.
노동자 감시장치는 또 있었다. 계약을 제대로 마무리하기 위한 목적이라 하지만 텔러들이 통화한 내용은 다 녹음되고, 모니터링 되고 있었다. 허투루 시간을 때울 수도, 고객과 티격태격 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통신, 보험, 카드사부터 은행, 홈쇼핑, 백화점 등 텔러시장은 갈수록 커지면서 전국적으로 20~30만명으로 추산되는 텔러, 그러나 이들은 겉으로는 ‘자영업자’로 분류되나, 사실은 자영업자로 ‘위장’됐을 뿐 업무 지시, 통제를 받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다. 거기다 성적이 나쁘면 몇 달 못가 해고된다. 눈치 보여 못 배기고 나가는 일도 수두룩하다.
“제가 사실상 채용부터 해고까지 다 합니다. 일 못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텔러들을 관리하는 어느 보험회사 남성 관리자의 말이다. 해고당하는 자영업자도 있던가.
“월급은 높지만 체력이 딸려서 오래 못해요. 한 6개월 하면 몇 달 쉬어야 버틸 수 있어요. 지금도 한약, 홍삼, 배즙 등 몸에 좋다는 것 챙겨 먹어가며 간신히 버텨요”
“‘나도 해 봐야지’하며 오기는 하지만 오래 하는 사람 없어요”
전씨를 비롯한 다른 텔러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그러나 여섯달동안 아홉달치 기력을 다 쏟아내며 일하는 것은 건강한 노동과 거리가 있다.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봤지만 ‘주 5일근무에 야근, 특근도 없는’ 텔러들이 왜 장기근속하기 힘든지, 텔러 영업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자료가 없었다. 아픈 것은 다 개인적인 문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프다면 사회문제다.
‘얼마 전 ㅅ생명보험사에서 일하던 한 텔러가 과로로 죽었다’는 말이 나오자, 모두들 표정이 어두워진다.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노조 만들 수 있게 되면,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어요? 해고되면 복직시켜 주나요?”
하지만 이들은 모르고 있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열악한 고용조건이 사회문제가 되어 국회에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는 것을. 그리고 정부는 이들이 ‘노동자’에 속한다고 법적으로 확인해줄 의사가 없다는 것을. 나아가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가 없도록 자영업자로 못 박아 두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험텔러,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휴게실에서 들려오는 어느 텔러와 팀장의 대화에 그 답이 있다.
텔러 : “갱년기 현상 오나 봐요. 아주 죽겠는데 병원 가보면 특별한 원인이 안 나오네. 스트레스래요. 계약 안 나와서 그런 건지...”
팀장 : “휴가는 주기 어려워. 벌어야 하는데 다들 아파서 어떡해. 월차 썼어? 기운 내봐. 이번 달 어떻게든 맞출 수 없어? 버텨봐. 버티기만 하면 내년에는 벌어놓은 걸로 기본은 유지할 수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