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플까마는, 가게가 문을 닫고 공장이 망했다거나 카드 돌려막기에 실패했다거나, 그도 아니면 연대보증을 섰다가 하루아침에 빚쟁이로 몰린 수백만 ‘과중채무자’들이 떠안은 크나 큰 빚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먹고 사는 또 다른 고달픈 노동자들이 있다. IMF를 거치면서 크게 늘어 난 ‘00금융’ ‘00신용정보’, ‘00자산관리’ ‘00캐피탈’ ‘00크레디트’ 등 여러 이름의 채권추심회사 노동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한 때 채무자를 상대로 욕설은 물론, 협박, 감금 등 불법적 방법으로 돈을 받아내는 ‘폭력배’와 동일시 된 뒤부터, 채권추심직 노동자들은 여전한 주위의 편견 때문에 지금도 회사 이름을 떳떳이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가입되어 있는 4대 보험으로부터도 소외 받고, 고정급 조차 한 푼 없이, 오로지 채무자를 독촉해 돈을 받아낸 데 따른 실적수당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하는 ‘목멘 인생’, 목 안 잘리고 붙어 있는 것을 다행이라 위로하며 혹독한 업무환경을 참고 살아야 하는 ‘계약 인생’의 속내를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 있을까.
봄을 시샘하듯 전국에 폭설이 내려 길이 질척거리는 지난 2월 8일, 서울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만난 30대 중반의 남성 김 아무개 씨(ㅎ채권추심회사 근무)는 회사 명함조차 못 내밀었던 첫 직장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하던 사업이 쫄딱 망해서 오갈 데 없던 시절, 한 대기업에서 추심 일을 시작했죠. 그 때는 기업체에서 제품을 판 뒤 돈을 안낸 소비자를 주로 찾아가 받아내는 기업체 소속 ‘수금사원’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실제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뽑기도 했어요.”
다시 바라본 김씨 인상은 몸집도 작고 서글서글해서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보여서 어떻게 뽑혔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다들 먹고 살기 위해 업무상 이 일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우리를 정도 없고,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좀 억울합니다. 누가 법을 어기게 만들었는데요?”
가슴 속에 응어리가 하나씩 터져 나온다. 그럴밖에 그도 처음에는 잘 나가는 ‘수금사원’이었다. 처음 입사해서 두 달까지는 월급이 한 푼도 없었다. 순전히 실적을 올려야 수당이 나오기 때문에 업무 파악하는 기간이라고 해서 월급이 나오질 않았단다. 그러나 이 두 달만 빼고 그만 둘 때까지 3년 동안 매달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기본급이 한 푼도 없고, 4대보험 혜택도 전혀 받지 못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채무자한테 달려들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보면 ‘나쁜 짓’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됩니다.”
‘의정부 부부’사건이 있은 지 한 참이 지나 잊어버릴만 한데도 김씨 머릿속에는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채무자한테 어떤 ‘나쁜 짓’을 했길래...
날품팔이 하며 근근이 먹고 사는 45세 부부가 의정부 용현동 두 평 남짓되는 허름한 방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한테는 평생 허리 부서져라 일해도 갚기 어려운 2억 빚이 있는데, 그 중 김씨 손으로 받아 내어야 할 액수는 2천만원쯤 되었다.
“제가 그 돈을 받아내기 위해 무슨 일을 한 지 아십니까? 돈과 진급에 눈이 멀었지.. 아침, 저녁으로 매일 두 번씩 한 달 동안 하루도 안 거르고 찾아갔었죠.. 긴 말이 필요 없어요. ‘출근했어요!’ 똑같은 안부인사만 했고요.”
기어코 일이 터졌다. 그 부부가 야반도주를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당신 얼굴을 도저히 볼 수 없어서’ 도망 갔노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 부부가 괴로워서 자살을 시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씨는 ‘나만 잘 살자고 사람들을 이렇게 괴롭히면서까지 일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밀려왔고.. 그 때부터 김씨의 인생은 바뀌었다.
“나는 완전히 회사의 유도작전에 말려 들었던 겁니다. 채무자는 죄인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회사는 직원들로 하여금 그들을 족쳐 돈을 받아낼 때라야 수당을 주니까, 어쩔 수 없이 ‘사기죄’로 협박한다든지, 방에 아예 드러눕는 등 비인간적 수단, 법 테두리를 넘는 일도 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추심회사로 자리를 옮긴 김씨는, 이 날도 채무자들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파일을 챙기고 있었다. 채무자 주소와 약도, 빚 현황 등을 두루 챙긴 김씨는 사무실을 나와 자동차에 탔다.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채무자들을 만날까
첫 번째 찾아간 곳은 송파구 삼전동 주택지였다. 인터넷에서 약도를 뽑아왔지만, 집 주변만 나와 있어 쉬이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 회사 동료한테 휴대폰으로 길 안내를 받았다. 서울에서 번지수만 들고 집 찾기는 쉽지 않음을 새삼 느꼈다. 집이라면 당연히 눈에 띄게 번지수가 적혀 있어야 하고, 같은 번지수는 모여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고정관념일 뿐 이었다. 상가는 아예 없고, 거기다 배열순서도 뒤죽박죽이라 동네 사람한테 물어보면서 한 블록을 몽땅 뒤지다시피 했다.
눈이 녹아 바닥이 질퍽거리는 길을 걸어 어렵게 지상2층 단독주택을 찾았다. 김씨는 머뭇거림도 없이 계단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 뒤 현관문을 두드렸다. 묵묵부답... 다시 “계십니까?”를 되풀이하며 주인이 나오길 기다렸으나 인기척이 전혀 없다.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본 뒤 포기하고 내려왔다. 허탕이다. 함께 간 사진기자도 처음에는 상기된 표정으로 뒤를 쫓아 올라가 기다렸으나, 아무도 없자 김이 샌 얼굴이다. 혹 채무자가 거기 있었더라면, 안 그래도 2억이나 넘는 빚과 생활고에 심사가 불편할텐데 추심회사 직원과 예고 없는 기자들까지 들이닥쳤을 걸 생각하니 불현듯 아찔했다.
김씨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없네요. 배고프시죠. 밥 먹으러 갑시다.”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털어냈다. 아는 식당이 있다며 찾아간 집은 개인택시 차고지 옆 기사식당이었다. 생선 조림 냄새가 모락모락 나면서 입맛을 돋우길래 고등어조림과 게장백반을 시켜 먹었다.
다시 두 번째 채무자 집인 삼전나루길에 있는 단독주택을 찾았다. 이번 채무자는 28세 여성인데 1억원이 넘는 빚을 지고 있었다. 십중팔구 카드를 써서 진 빚인데, 실제 원금은 얼마 안돼도 다른 카드로 돌려 막으면서 버티다 보면 연체 이자까지 붙어 1억 되기는 시간문제라고 일러 준다.
김씨는 먼저 우편함을 살펴보았다.
“이 분이 여기에 사는 지 먼저 확인을 해야 돼요”
엽서 한 통 없다. 안 좋은 징조다. 반지하 방부터 두루두루 돌아보고 서류를 검토한 뒤 내린 결론은, 지금은 채무자가 안 살고 대신 다른 주소로 되어 있는 채무자의 어머니가 여기서 사신다는 것. 꼭꼭 숨어있는 채무자를 만나기도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채무자들 형편도 가지가지다. 2003년 ‘LG사태’로 표면화됐 듯, 카드 남발에 따른 개인 파산이 급증한 탓에 소속 회사에 들어오는 채권 가운데 99%가 개인 채권이고, 무담보 대출이나 신용대출금을 갚지 못한 채권은 소수라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특히 ‘다들 죽는다’며 한숨이 절로 나오던 IMF 때는 기업, 개인의 도산으로 업무 물량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바람에 추심직원을 많이 뽑았고, 그 뒤 회사들도 여럿 생겨나게 되었다. 꼭 필요하지만 행, 불행이 엇갈리는 아이러니가 이 세상에 여기만 있으랴. 장례식장, 병원, 렉카, 정비소 등 숱하다.
“오늘 찾아간 채무자 둘 모두 카드사, 은행 등 십 여 군데에 걸쳐 몇 백에서 몇 천만 원까지 빚으로 깔려 있는 경우에요. 그런데 요즘은 옛날과 달리 ‘부동산 가압류’, ‘경매’ 등 지극히 합법적인 수단으로 채무자들을 몰아 부치니까 궁여지책으로 주소를 전부 바꿀 뿐만 아니라, 실제 가족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어 얼굴 보기조차 힘들어요.”
그러나 채무자가 겪는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기 힘든 경우도 많다. 특히 부모 잘못으로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따로 살거나 먹을 것도 없이 방치되는 등 고통을 겪는 것은 심각한 사회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번은 마약중독자인 아빠와 가출한 엄마 탓에 초등학생, 다섯 살짜리 아이 둘이 하루 종일 밥도 굶고 집에 방치되어 있는 거예요. 큰 애는 학교가면 급식이라도 먹을 수 있는데도 동생 돌봐야 하기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말입니다.”
아이들을 만나면 그저 명함만 내밀고 온단다.
“당장 집세를 못 내서 거리로 쫓겨날 채무자들도 수두룩해요. 또 삶을 포기해버리려는 채무자들도 있어요. 이럴 때는 가족 중 신용이 ‘깨끗한’ 사람 앞으로 전세자금 대출을 받으라고 방법을 일러주기도 하고, 자포자기하지 않도록 인터넷 구직사이트나 ‘신용회복위원회’ 같은 개인회생제도가 있다는 정보들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김씨는 잘 아는 건설현장 소장한테(그도 신용불량자였다) 과중채무자 한명을 소개해 취직시켜주는 등 적극적으로 ‘직업 알선’까지 해 본 적도 있단다.
지난 ‘의정부 부부사건’을 계기로 삶의 방향이 바뀐 김 씨, 그러나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설명이다. 김씨가 채권추심직 노동자한테 쏟아지는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해서 가급적 민원을 불러 일으키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른 회사에 비해 안정적인 고정급과 복지제도가 ‘틈’과 ‘기회’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그 과정에서 무척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나마 얼마간의 기본급과, 4대보험 혜택도 있어요. 노조가 생기면서 마냥 회사 지침만 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회사와 싸우기도 하고 해서 점점 나아지고 있고요, 직원들 간에도 서로 이해하고 돕는 일이 전 보다 많아 졌어요.”
그렇다고 실적위주의 인사노무관리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회사는 대부분 ‘악성채권’을 아주 싼 값에 사온 뒤 직원들을 시켜 채무자들을 닦달해서 이윤을 남겨야 한다. 이러한 재무구조상 직원들의 실적은 회사가 숨을 쉬는 데 절대적인 필요 요소다. 그리고 그 ‘유효한 수단’이 바로 계약직 채용과 인사고과 반영 등 통제시스템이 아니겠는가.
이 회사 역시 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이 있는데, ‘6개월 계약직’ 인생이다. 인사규정에 6개월마다 계약갱신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실적을 점수로 매겨 인사고과에 반영해, 하위 몇%는 해고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 계약 갱신을 하고 있지만, 고무줄이다. 회사가 구조조정 할 때 이 규정을 활용, 대규모로 해고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언제 잘릴지 모른다. 그것도 실적 순으로 해고되기 때문에 속이 탈 수 밖에 없다.
김 씨는 “우리 사회에 천민, 평민, 중인, 양반 등 조선시대 신분처럼 계급이 있는데, 이 기준으로 가른다면 추심직원들은 평민보다도 더 밑인 하류층”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불법채권 추심이 사회문제로 떠올랐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추심은 우리 사회 상규를 아는 사람이 해야 맞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사회 상규에 맞도록 엄격하려면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가 먼저 충분하게 확보 되어야 한다.
신용불량자 사이트에 누군가 올려놓은 글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은행이니, 보험회사니.. 잘 사는 놈들은 모두 나 몰라라 하고 점잔빼며 나 앉아 있고.. 채권추심직 해서 먹고 사는 놈들이나 돈 못 갚아 쫓겨 다니는 놈들이나 모두 못 사는 놈들 아녀.. 못사는 놈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게 해 놓고는.. 웃고 앉아 있는 세상..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