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1일, 지난 4년여간 노사정간 논쟁 대상이던 퇴직연금 제도가 별다른 저항도 없이 ‘정부의 의지대로’ 시행됐다. 정부에 따르면, “1961년 도입된 우리나라의 퇴직금제도는 퇴직 후 근로자들의 노후대비책으로서 생활안정에 기여하여 왔으나, IMF 이후 연봉제의 확산, 잦은 직장이동, 퇴직금 중간정산제의 확산, 급속한 인구고령화 등 급속한 경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퇴직금제도가 근로자들의 노후생활의 보장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한다. 또한 “현행 퇴직금제도는 상시 근로자 5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1년 이상 근속한 자에게 한하여 적용되고 있고, 기업 도산 시 근로자의 퇴직금 보장이 미흡한 점도 큰 문제”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현행 퇴직금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퇴직 후 근로자들의 생활안정에 기여하기 위하여 정부가 도입 추진하고 있는 제도가 바로 근로자퇴직급여보장제도, 즉 퇴직연금제도라는 것이다.
알려진 대로 퇴직급여연금제도란 노동자들의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적립금을 현행 퇴직금처럼 사내에 모아두지 않고, 보험회사나 주식투자 등을 전문으로 하는 투자신탁회사 등에 그 기금을 운용하도록 해서 노동자 퇴직 때 적립된 금액을 연금으로 지급하는 제도로 노동자를 대상으로 사업주가 운영하는 연금제도를 말한다. 새로 도입된 퇴직연금제의 형태는 노동자가 퇴직 후 받을 연금액(급부)을 미리 정해놓는 것으로 회사가 기금의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급여형(DB형)과 월급의 일정 비율을 기여(갹출)금으로 정하고 노동자 개인이 기금 운용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되어 노동자가 퇴직 후 받을 연금액은 기금의 운용 수익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확정기여형(DC형)으로 크게 대별된다. 일반적으로 확정기여형이 확정급여형에 비해서 주식시장의 상황에 더욱 좌우돼 그만큼 위험도가 높은 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안)’에 근거하여 적극 추진되고 있는 퇴직연금제도는 정부 측에 따르면, 노사 합의가 있는 경우 일시금 위주의 현행 퇴직금 제도를 퇴직연금제도로 전환하여 퇴직 후 근로자들의 노후소득보장의 강화와 적용대상의 확대를 통한 법정복지제도의 형평성을 제고하며, 기업이 퇴직금 부담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개선을 목적으로 2005년 12월 1일부터 상시근로자 5인 이상의 사업장에 한해 먼저 시행하고, 2008년 이후부터 4인 이하의 사업장과 1개월 이상 근무자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에게까지 확대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본과 국가가 앞장서 퇴직연금을 도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자본과 국가의 공적연금 축소 의도를 들 수 있다. 한국정부는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세계은행(World Bank),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 등 초국적 세계화추진기구들로부터 공적연금을 축소하고 사적연금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연금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지속적인 ‘권고’를 받아 들여 퇴직연금 도입과 함께 한 마디로 ‘더 내고 덜 받기’를 개혁이란 이름으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축소와 보험료 인상을 동시 추진해 오고 있다. 최근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연금개혁의 연내 완수 다짐발언과 유시민 입각 파동 역시 공적연금 축소와 관련하여 불거진 헤프닝인 것이다.
둘째, 거대 연금상품 신설로 금융시장 활성화 의도를 꼽을 수 있다. 그 동안 정부는 줄기차게 퇴직연금제 도입을 주식시장 안정화 방안의 일환으로 추진해 왔다.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주식시장의 등락에 좌우되며 정부는 주식시장 활성화를 통해 경제 활성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주식시장 활성화를 위해 거대 규모의 자금이 필요하며 이를 가장 빠르게 조성할 수 있는 방안은 수백조원이 적립되어 있는 국민연금의 주식시장 투자와 도입되기만 하면 향후 실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시장이 형성될 수 있는 퇴직연금제의 도입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참고로 증권연구원은 퇴직연금 전환이 점진적으로 이뤄질 경우 한국의 퇴직연금 시장 규모는 금년 12조원, 2015년 189조 원으로, 세계적인 금융자본인 독일계 알리안츠 그룹은 “한국의 경우엔 연금개혁과 퇴직연금 도입 등으로 연금운용자산이 2004년 224억 유로(31조원)에서 2015년 2138억 유로(271.7조원)로 9배 가까이 급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셋째, 연기금 개혁을 통한 기업구조조정 강제와 노동운동의 분열 의도가 있다. 이윤율 하락에 직면한 자본은 신자유주의 공세를 통해 노동을 비롯하여 사회전반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자본의 논리, 이윤의 논리를 관철시키고자 한다. 거대규모의 연기금을 추진하는 세력은 1990년대 서구의 사례를 보더라도 금융자본 팽창에서 연기금이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관투자가의 자산비중에서 연기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질수록 이들은 단기차익 중심의 이윤창출에 적극 나설 것이고 그럴수록 기업들은 정리해고, 임금삭감 등 구조조정을 일상적으로 추진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민중의 연기금이 노동자민중을 박멸시키는 기업의 일상적인 구조조정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퇴직연금제 시행의 의미와 우리의 대응
넷째, 자본의 사회임금 전가의 의도를 들 수 있다. 이윤율 하락에 직면하여 IMF 이후 정리해고, 정기승급제 폐지, 임금피크제 도입, 중고령층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 제외 추진 등 기존의 임금체계를 와해시키고 성과급제 도입 등으로 이윤을 축적하던 한국의 독점자본들은 이러한 세계화추진기구들의 요구에 발맞춰 재정불안을 초래해 장기적으로 체제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에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공적 연금의 일부를 민간부문으로 이양해야 하며 연기금을 ‘금융시장 활성화’와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로 법정 퇴직금제도 폐지를 강력히 주장해왔다.
사정이 이러한데 우리 노동계는 퇴직연금제에 제대로 응전해 왔는가. 먼저 한국노총은 그간 노사정위 테이블에 몇 가지 조정안을 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주장의 합리적 핵심은 노동자들에게 위험도가 덜한 도입모델로서 확정기여형 보다는 확정급여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도 퇴직연금을 즉각 확대 적용하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이 관철되면 타협할 수 있다는 것으로 비춰진다. 즉 한국노총의 주장은 노동부가 고안한 도입 방안에 충분히 포섭될 수 있는 내용으로서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조합이 가능하다.
반면 민주노총의 경우, 원칙적으로 퇴직연금제가 근로자들의 노후보장책이라는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① 전체 노동자의 노후생활보장기금을 증시투입이 허용되면 퇴직금이 불안정해진다는 점 ② 영세사업장·비정규 노동자들이 배제됐다는 점 ③ 노조가 없는 88%의 사업장은 사업주가 선호하는 확정기여형을 선택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노동자 개인이 투자의 손해를 봐야 하는 매우 위험한 제도라는 점 ④ 퇴직연금제 도입은 재계와 월드뱅크(IBRD) 등 국내외 자본이 요구할 뿐, 노동계는 요구하지 않는데도 정부가 노동계 의견을 무시하고 추진한다는 점 ⑤ 아무런 사회적 합의 없이 연금체계를 이원화한다는 점 등을 들어 강력히 비판해왔다. 그리고 그 대신 현행 퇴직금 제도를 강화(연금급여의 지급보장성을 위해 퇴직보험제와 임금채권보장제를 강화)하고 적용률을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2002년에 제출한 바 있다. 그러다가 2004년 11월에는 정부안을 반대하며 ①4인 이하 사업장과 1년 미만 근속 노동자에 대해 적용 ②사외적립 법제화 ③ 임금채권 보장 강화 ④ 확정기여형 불가 ⑤ 지급보장공사 설립 ⑥ 퇴직(연)금감독위원회 신설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양 노총의 안은 각각 차별적이지만 기본적으로 한계점들을 공유한다. 먼저, 한국노총의 안은 노사정위를 통해 두 가지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확정기여형이냐 확정급여형이냐를 놓고 쟁점화시킴으로써 연기금의 금융화를 차단하는 계기를 마련하지는 못한다. 특히 한국노총안인 확정급여형은 기업의 전략적 파산에 대해 대비할 수 없는 안으로써 노동자들이 기금의 파산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경영계가 인구노령화와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대거 퇴직에 직면하면서 엔론이나 월드컴 그리고 최근의 GETKXO에서도 엿보이듯이, 경영전략의 일환으로 전략적인 파산을 통해 노동자들의 퇴직보장 부담을 회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노총의 태도는 연기금의 금융화의 폐단이 어떠하든지 조합원들에 대한 법적 보장에만 연연하는 조합이기주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노총 안의 경우, 초기에는 특히 퇴직금의 사외적립을 의미하는 퇴직보험제도 강화를 전제로 금융화 폐단의 문제를 거론했던 것과 달리, 점차 연기금의 금융화를 기업이 직접 주관하느냐 금융기업이 담당하느냐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전제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또한 작년 9월 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을 통해 나온 국내 금융계에 악영향을 끼친 투기자본의 금융사, 정경유착 등 비도덕적인 금융사, 노동탄압이 심한 반노동적 자본 소유 금융사 등에 대해 퇴직연금 불매 대상 금융사 명단을 공표하고,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양대 노총 차원서 운동을 벌이겠다는 계획이나 작년 11월 사외적립 법제화, 확정기여형 불가, 퇴직(연)금감독위원회 신설 등의 주장 역시 본의야 어떻든 사실상 퇴직연금을 받아들인 전제에서 가능한 대응논리일 수 있다는 점에서 현 단계에서 우선적으로 빼들어야 할 카드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노동자민중의 대안은 퇴직연금제 도입과 동시에 국민연금개악을 저지하고 공적인 사회보장연금 하나만을 가지고도 모든 노동자민중이 안정적인 노후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퇴직연금제도 도입과 같은 사적연금의 신설․확대는 저지되어야 하며 금융자본화를 위한 무리하고 과도한 국민연금기금의 적립 역시도 해소되어야 한다. 기업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퇴직소득대책인 현행 퇴직금제도의 개혁에 대한 노동측 대안의 경우도 물론 전체적인 사회보장연금을 위한 전략 속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그럴 때 퇴직금제도의 현재 과제는 오히려 그 자체로 지켜내고 강화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