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자본에 맞서 국내자본을 편들어야 하는가?
미국계 사모투자펀드 론스타가 외환은행에 투자한 지 2년 6개월만에 줄잡아 3~4조의 차익을 챙길 자금회수에 나서면서 외국자본 문제가 다시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한나라당을 포함하여 여/야 할 것 없이 목청을 높이는가 하면, 그동안 투기자본문제를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하기 위한 ‘불가피한 비용’쯤으로 다뤄오던 보수언론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이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창립 후 지금까지 론스타에게 두 건의 소송을 걸고 ‘한 놈만 팬다’는 심정으로 집중 활동을 펴 왔다. 우리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입의 불법성을 규명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함으로써 정부의 책임을 묻고자 노력해 왔다. 말하자면 투기자본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론스타 사례를 본보기삼아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활동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는 점에서 성과를 낸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중요한 고비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그것은 이 운동이 자연스럽게 제기한 논점이 운동 안에서 아직 명쾌한 답변을 찾지 못한 것과 관련 있다. 말하자면, “투기자본의 횡포가 문제라면, 외국계 자본을 견제하기 위해 국내 자본을 편드는 것이 대안이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외국자본에 맞서 국내자본을 육성하여 대항토록 하자는 의견은 상당히 광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국민연금 등을 동원한 ‘토종’ 사모펀드가 외국 투기자본의 대안일 수 있다는 기대는 일부 언론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 운동진영에도 있다. 말하자면 국내자본은 외국자본처럼 탈세나, 최소한 ‘국부유출’은 하지 않을 것이니, 국민경제에 이롭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하지만, 보수진영과 재계가 특히 목청을 높이고 있는 이 대안은 노동자들에게 ‘게걸음’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사태가 악화되면 악화됐지 결코 해결책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선 국내자본도 조세피난처를 이용하여 국내에서 탈세를 일삼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2002년 국세청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며, 당시 주된 조사대상은 이른바 ‘검은머리 외국인’(한국인)이었다. 게다가 외국 사모펀드에 국내자금이 상당액 들어 있을 거라는 점은 관계당국도 인정하는 바다. 또한 삼성자동차의 설립 당시 외자로 조달된 자본금이 사실은 삼성계열사의 자금이었음이 밝혀진 데서 나타나듯이 국내자본은 탈세를 위해 외자를 가장한 자금운용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탈세나 혹독한 구조조정과 같은 투기자본의 횡포는 단지 국적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탈세는 투기자본의 횡포 가운데 단지 한 항목일 뿐이다. 1980년대 미국의 사모펀드들은 세금을 내면서도, 대량해고와 비정규직을 양산해, 노동자에게 대가를 떠넘기고 막대한 차익을 남긴 바 있다.
그러므로 ‘국부유출’을 막을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의 몫을 가로채서 소수 펀드의 투자자가 독차지하는 구조가 문제인 것이다.
한편, 이른바 ‘자본유출’은 한국 노동자들의 삶이 악화된 핵심 원인도 아니다. 현재 국내 부동자금이 3백조원이 넘는다. 자산가들이 쌓아 놓은 재산은 양극화와 빈곤 심화, 비정규직 증대에 허덕이는 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그 부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외국계 투자자들을 대신해 국내 자산가들의 재산을 늘리게 될 뿐인 ‘토종투기자본 대항마론’은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개선책이 아니다.
20억원 이상 개인, 50억원 이상 기관투자가 30명 이하로 구성되는 국내 사모펀드는, 이제 본격적인 육성단계에 접어들었다. 정부가 관장하는 한국투자공사(KIC)는 국민연금을 동원하여 ‘재무적 투자’(투기자본)에 나설 계획인데, 이 역시 펀드구성원의 단기차익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에게 혹독한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투기자본의 국적이 아니라, 투기자본의 이윤추구 방식 자체가 문제다. 투기자본 감시운동은 국외든 국내든 투기적 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공격하는 사모펀드 자체에 도전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사실 투기자본의 발흥은 자본주의에서 예외적인 일도 아니다. 영국과 미국도 ‘금융 빅뱅’과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시기에 투기자본의 횡포가 극심했었다. 지금 국내에서 활동하는 주요 사모투자펀드 중에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펀드가 많다.
이윤율 저하와 실물경제 위기가 극심해지고 불황이 도래하면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나아 보이는 투기성 분야에 자금이 집중되는 현상은 하나의 법칙처럼 자본주의 경제에서 되풀이되곤 했다. 전체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과잉중복투자의 결과 저평가된 자산을 재배치하여 효율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배경에서 기업의 인수합병과 청산 등 강력한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당연히 해당 기업의 노동자를 포함하여 전체 노동자에게 그 대가를 지우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본의 숨통 트이기’이기도 한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기업주는 망하기도 하겠지만 전체로 볼 때 부담을 털어내는 과정이므로 자본주의 경제에는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거액 자산가들과 일부 기업은 이 시기에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투기자본에 반대하는 운동은 특정 국적의 자본이나 특정분야의 자본의 필요에 부응할 뿐인 정책을 대안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투기자본 반대운동은 불황기에 자본의 이익을 만회하고자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자본측의 일반적인 경향에 도전하는 데서 출발하여 보다 광범한 자본주의 이윤논리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사유화 반대투쟁이나, 투기자본 규제운동이 단지 국민국가의 케인즈주의적 규제 강화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사회적 통제권을 강화하는 운동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