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단체탐방] 열사는 역사다, 그리고 역사는 현재다

추모사업회의 허브, 추모연대

세종로 16차선이 신호 따라 몰렸다 빠지는 차들로 가득하다. 세종로에 면한 미국대사관 주변의 전의경들에게선 늦여름 오후의 나른함이 물큰하다. 미국대사관을 지나 광화문 열린시민마당, 현대인의 바쁜 일상도 늦여름의 나른함도 숨을 죽인다. 소나무들 사이로 이어진 농성천막, 그 오른쪽으로 빛바랜 열사들의 사진과 이력이 새겨진 걸개그림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9월 16일 오후 5시, 이곳 광화문 열린시민마당에서는 제17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이하 범국민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가리켜 우주보다 더 크고 더 무겁다고도 합니다. …” 오종렬 상임대표의 대회사가 무대에 세워진 열사들의 사진을 흐리게 한다. 며칠 전 또다시 한 분의 동지를 떠나보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준호 위원장의 비장함 뒤로 각계인사들의 추모사가 이어진다. 모두들 ‘사회는 민주화됐다지만 오늘 다시 민중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맞서 열사정신을 현재에 되살리겠노라’며 열사정신을 되뇐다. 그리고 참석자들은 한 목소리로 △ 한미FTA협상 중단 △평택 미군기지 이전협정 전면 폐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민중생존권 쟁취 △올바른 과거청산 △열사정신 계승 등을 통해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와 인권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의한다.


열사여, 민중의 깃발이여


범국민추모제가 끝나고 며칠 후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이하 추모연대)를 찾아갔다. 가쁜 숨을 내쉬며 나타난 곽민 조직국장은 사무실 문을 열더니, 이성에게 정리되지 않은 방을 보여주는 사춘기 아이만큼이나 당황한다. 범국민추모제에서 사용한 플래카드 두루마리, 떡상자, 포스터, 노끈들이 사무실 입구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집행위원장까지 4명이 상근을 하지만 다들 사정이 있는지라 제대로 정리를 못했다며 주섬주섬 들어설 길을 만든다. 곽민 조직국장만해도 범국민추모제가 열렸던 광화문 열린시민마당에 설치된 하중근 열사 농성장을 지키느라 3일 만에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 길이라고 한다. 그는 범국민추모제 준비가 한참이던 9월 초 포항건설노조 파업의 올바른 대책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상황실에 파견됐다. 행사준비로 일손이 모자라고 바쁘지만 당장 당면한 열사투쟁에 소홀하다면 추모연대에게 있어 그것은 직무유기 같은 것. 30년 전이나 민주주의가 실현됐다는 오늘이나 열사를 만드는 현실은 변함없다. 나날이 뻔뻔스러워지는 권력에 진실규명의 목소리는 한층 가냘프게 들리기까지 한다. 열사들의 뜻을 기리고 정신을 계승하고자하는 추모연대-어디 추모연대뿐이겠는가마는-가 헤쳐가야 할 오늘의 모습이다. 그 속에서 8월 21일 임진각 열사거리순례사업을 시작으로 제17회 범국민추모제 ‘열사여, 민중의 깃발이여’가 닻을 올렸다. 열사거리순례는 열사들이 운명하신 거리나 연관 있는 장소를 찾아 전시물과 현수막, 무언극 등을 통해 지역민에게 열사정신을 알렸다. 전국을 돌아 광화문 열린시민마당 범국민추모제까지, 한 달간을 끊임없는 긴장 속을 걸었는데 좀 지저분한 사무실쯤이야….


민주화되었지만 진실규명의 목소리는 더욱 가냘프고


추모연대는 단체명에서 알 수 있듯 열사 추모사업회의 연대체이다. 1992년 3월을 시작으로 초기에는 민족민주열사.희생자의 합동추모제 진행이 활동의 중심이었다. 민족민주열사명예회복과 의문사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올인 한 것이 1998년. 당시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와 함께 422일 간 국회 앞 천막농성을 진행, 이듬해 두 법안이 제정되기까지 악전고투했다. 법안 제정 이후로는 올바른 법안의 시행을 위한 모니터링, 법안의 미흡함을 개선하기 위한 개정운동이 진행 중이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이하 민주화법)의 경우 2004년부터 개정작업을 벌여왔다. 민주화운동의 시기(제2조), 관련자 대상(제2조제2호), 직권재심조항신설(제5조의7) 등 여기저기 수리보수가 필요하다. 추모연대와 유관단체들은 계속적으로 국회의원들을 설득했고, 그 결과 개정안이 지난 9월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올 정기국회 통과 ‘이상 무!’라고 한다. 민주화운동관련자에 대한 사회적 예우 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한 「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도 올해 안에 통과가 낙관적이다. 이제 법제정 운동에서 제도적 기틀 위에서 법률이 얼마나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추모연대의 새로운 역할로 자리잡고 있다.


추모사업회의 허브, 추모연대


곽민 조직국장
추모연대는 대략 70여 추모사업회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 말했듯 개별 추모사업회와 연대하여 합동추모제를 지내는 것이 주요 업무다. 그것은 지난 17년간의 사업이었으면서 동시에 현재의, 미래의 운동이다. 운동, 우리사회에서 소외되어 온 사람들이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기 위한 것. 이는 곧 열사정신이다. 그래서 열사를 추모하는 것 자체가 운동이고 투쟁이다. 때문에 추모연대는 전국의 추모사업회에서 진행하는 추모제에 모두 참여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지난 한 해만해도 110여 차례의 추모제가 있었다. “주말에 쉬어 봤으면 좋겠어요. 매주 출장을 가니까… 거기다 월요일은 또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열리니까 주말 일했다고 쉬지도 못해요.” 곽 조직국장이 슬쩍 불만을 내비친다. 그러나 바로 100% 다 찾아가지 못하는 것을 죄송스러워 한다. 추모연대의 관심과 참여가 지역 소규모 추모제에 있어서 접착제이기 때문이다. 부경울(부산경남울산)열사회나 광주전남열사회처럼 독자적인 운영이 가능한 곳도 있지만 일상에 묻혀 이름만 남았거나 흐지부지 운영되는 경우도 있다. 안타깝지만 또한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활동 동력과 연대의 고리를 만들 수 있을까? 추모제를 찾아가 사람들과 공통의 고민을 나누는 것! 추모연대가 찾은 방법이다. 추모연대의 참석으로 추모사업회는 탄력 받고, 동류의 단체들과의 연대를 통해 자생과 열사정신 계승을 실천해 나간다. 아마도 추모연대는 추모사업회들의 허브쯤 되지 않을까 싶다. 올해는 보다 적극적으로 지역중심의 사업 기반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지구별로 단위를 구성하여 지역자체가 주도적, 독립적으로 추모사업을 이끌고 서울에서는 보조하는 형식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지난 6월 수도권에서도 수도권추모연대 준비위원회가 가동했고 아직 결합력이 약한 대구경북지역과 대전충청지역도 구심점을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추모제는 열사를 기리는 것에서 나아가 열사정신을 삶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추모연대가 지구별, 단위별 역량강화를 중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안에 떠밀려 ‘추모사업은 추모연대의 일’이라고 관성적으로 인지하면서 유관단체들은 점차로 무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열사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무이다. “열사는 곧 역사거든요. 역사가 아주 먼 과거는 아니죠. 바로 이 순간도 곧 역사가 되는 거잖아요.” 곽 조직국장은 열사운동이 곧 현실운동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투쟁 속에 열사정신은 살아있다. 이분화 된 것을 어떻게 다시 접목시킬 수 있을까? 추모연대는 대중단체들에게 ‘열사정신특별위원회’ 구성을 제안하고 있다. 각 집행력 있는 단위 내에서 추모사업을 진행한다면 추모사업의 활성화가 용이하다는 판단에서다. 처음 민주노총이 이 제안을 받아 ‘노동운동사정립 및 열사정신계승 특별위원회(이하 열사정신특위)’를 구성했다. 여기서는 노동열사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사 정립과 웹을 통해 노조 조합원들이 열사정신을 알 수 있도록 자료제공 등 대중적 접근을 지향한다. 이처럼 조직형태를 지구별, 부문별로 재정비하면서 열사사업의 참여주체 확대 및 각 단위조직의 연합체인 범국민추모사업회 건설을 구상중이다.


기억은 폭력에 맞서는 가장 마지막 무기다


교육과 출판은 대중과 만나는 좋은 창구다. 추모연대에서는 매년 추모사업회 활동가와 각 단위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매년 수련회, 열사학교, 광주기행을 연다. 분기별로 각 지역에서 열사학교를 진행하고 매년 1회 전체규모로 학교를 연다. 올해는 11월 중에 전체 열사학교가 열릴 예정이다. 지난해 유가협, 민주노총과 공동으로 1953년 이후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사망한 열사.희생자들을 모두 망라한 자료집 「끝내 살리라」를 출간했다. 출판기념으로 민주열사, 의인을 주제로 한 전국 초.중.고생 독서감상문대회를 열었다. 청소년/녀들에게 열사가 무엇이며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전교조 국어교사모임과 함께 독서감상문 모집 사업을 기획했다. 올해에도 현재 감상문을 접수 중에 있다.


이 외에도 민주공원 조성 추진, 통일사업을 비롯하여 열사회보 발간 등 역시나 4명의 활동가들이 얼마나 정신없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다. 단체운영을 위한 재정사업도 있잖은가. 회원단체와 개인회원의 회비 외 재정사업은 연말에 몰아서 진행하는 편. 양말 등의 후원물품을 정해 판매하거나 매년 제작하는 열사력 판매가 전체 재정의 큰 몫을 차지한다. 열사들의 기일과 주요활동을 짤막하게 담은 열사력은 재정마련과 더불어 열사를 일상생활에서 기억할 수 있게 한다.


‘기억은 폭력에 맞서는 가장 마지막 무기’라고 한다. 과거청산은 과거 국가와 공권력의 폭력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평가이자 진실규명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 하기에 인권을 보장하고 보편적인 사회규범으로 만들어 가는 출발점에 과거청산 운동은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열사를 통해 역사를, 역사 속의 열사들을 기억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인권사회로 가는 출발선에 서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사진 박김형준 |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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