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관의 고질병 관료화
지난 5년간의 국가인권위원회 활동과 운영의 특성과 문제점을 추려보자면 △점진적인 인권향상 전략 △문화적 접근 △사안적 접근 △법적 기준 중시 △전문가 중심 운영 △사후적 접근 △국회 법사위의 통제 △정치적인 고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를 비틀어 말하자면 법적 권한을 가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등 지도부들이 고급스러운(?) 논의를 통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즉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아냥을 듣게 되는 까닭은 국가인권위의 논의가 '인권을 배려'하는 시혜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접근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국가인권위는 인권침해를 구조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체계를 수립한 것이 아니라 인권침해 진정사건을 접수하고 실적을 홍보하기에 급급했다. 이는 실재 인권침해 억지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현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는 것도 연구수준을 넘지 못하거나 현장성이 떨어져 탁상공론에 그쳤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한편 피해구제의 인용율이 낮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각하사건의 과반이 스스로 진정을 철회한 경우인데, 결국 피해구제를 위한 유효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마냥 기다리게 하거나, 아니면 인용된 진정사건이라도 자신의 피해구제 보다는 제도적인 접근만을 해 결국 실효성 있는 인권피해 구제기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언제나 주변과 윗쪽을 향해 있는 국가인권위의 시선
이런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우선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5년 동안 국민 또는 진정인을 섬기기보다는 권력과 상부에 안테나를 세우고 그쪽 편 눈치 보기에 열중한 것에서 기인한다. 그 결과 보수 정객들의 국가인권위원회 흔들기에 스스로 몸을 낮췄고, 국회와 사법부에 대한 의견 제출이나 권고는 거의 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역으로 진정인 등 국민에 봉사하는 마인드가 5년 전에 비해 얼마나 많이 형성되어 있는지 필자는 알지 못하겠다.
두 번째 원인은 국가인권위원회 구성원들의 인권의식, 즉 인권문제를 바라보는 태도가 편향적이거나 고귀한(?)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인권의식을 높이기 위한 사업으로 문화행사와 이벤트 또는 토론회와 해외 인사 초청강연회 등을 통해서 구체화 되었다. 또한 인권활동가들의 거리에서의 투쟁이나 인권상황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법개혁과 같은 의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기 일쑤이며, 토론과 논의 과정에서 인권 현장의 전문가나 활동가의 말을 듣기 보다는 이론에 밝은 교수와 변호사들을 초청해 간담회하기를 즐겨 결국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이로서 국가인권위원회 개혁의 방향은 분명하다. 탈관료적이고 국민친화적이며 현장지향적인 활동과 운영이 그것이다.
법과 권한에 갇힌 기관에서 실천적인 기관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서’라는 명분 뒤에 숨어 인권침해, 심지어 생명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결정을 늦춘다. 이것은 방향 자체를 잘못 설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권침해와 차별관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현장과 대화'하고 이를 극복할 인권지식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국가인권위원회가 제대로 된 인권피해 구제기관으로 거듭 날 수 있는 길이다.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와 차별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자행된다는 점을 특히 유의해야 한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실천적인 국가기관이어야 한다. 이론의 강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인권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실사구시적인 전문역량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현재의 국가인권위원회의 잠재된 의식 속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인권단체들은 국가인권위원회 설립과정에서 '실효성' 있는 '독립적' 국가기구가 우리 시대에 가장 적합한 인권 전담기관이라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법적인 권한을 의미할 뿐이다. 현실적인 운영에서 법적인 권한만을 행사하고 창조적으로 이를 적용할 인권적인 감수성이 행정에 녹아나지 않는다면 직위를 갖고 있는 '그들의' 독점적인 국가기관이 될 것이다.
첫 단추는 인적 쇄신
필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가치를 민주성과 현장성 그리고 적실성으로 본다. 국민에 뿌리내리지 않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정치권력과 언론 등의 좋은 먹잇감이 될 뿐, 국민으로부터 지지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피해구제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난 5년의 경험으로 충분히 경험했다.
각별한 반성과 성찰 위에서 국가인권위원회는 우선 인적 쇄신을 해야 한다. 인권위원의 경우 현재 추천 및 임명 절차에 덧붙여 검증작업이 있어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개정하여 인권위원들의 공개청문회와 인권위원회 추천 및 임명과정의 투명성, 공개성, 민주성을 확보하여 가칭 인권위원 추천위원회가 작동되어야 한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추천권자 또는 인사권자의 의중에 따라 겉모양만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진 자가 인권위원이 되기 십상이다. 사무총장을 비롯한 집행과 관련된 인사문제는 우선 충원과정에서 엄격한 선별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내부 인사 중심의 충원은 결국 국가인권위원회를 더욱 고립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장지향적인 역량강화를 위해서 인권단체 활동가들과의 공동 문제해결 훈련 프로그램 등을 강화해야 한다.
두 번째로 국민친화적인 운영체계로 발전시키고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열려 있는 구조를 확보해야 한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의 운영 체계에서 일반 국민이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형식적으로 의견서 제출, 정보공개 청구, 자료실 이용, (진정인의 경우) 인권상담소 상담 및 진정서 제출 등이 있다. 이러한 형식만으로는 국민 누구나가 의견을 형성하고 언제나 가까이 할 수 있는 체계로 정비되었다고 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인권침해 문제의 기준을 논의할 때에는 공개적으로 국민의 의견을 구하고 적극적으로 인권단체들의 의견제시를 요청하는 민주적인 절차가 보완되어야 한다. 또 사회적 약자들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토론회가 일상적으로 열려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정책 토론회 결과가 제도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구조와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사회적 약자의 상담을 진정 상담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화하기 위해서 각급 지방자치단체와의 연계성도 높여야 할 것이다.
한편 진정사건이나 인권문제 해결과정에서 현장중심적인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인권침해 사건이나 창조적인 발상과 접근을 요하는 진정 사건에 대해서는 활동가와 전문가들 공동의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전문위원회의 장을 언제나 국가인권위원회 내부인사가 맡는 관행도 없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존재와 운영이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진정사건들의 현황을 비롯해서 모든 자료들이 공개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 검토하여 인권분야의 발전을 위한 현장에서의 가치 있는 자료로 재탄생할 수 있다. 또 위원회 자체에서 비공개한 내용을 검토하여 다시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가칭 '시민 인권공개위원회'를 두어 국민의 알권리를 더욱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