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운동 길찾기] 소수자가 인권을 새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닌가

비상식 인권론 ⑦

우리 사회의 한편에서 매우 중요한 ‘인권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차별금지법안’이 국가인권위원회 안에서 많이 후퇴한 정부 안으로 국무회의에서 통과될 것이 예상되자, 지금까지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기 꺼려했던 성소수자들이 맨 얼굴로 기자회견을 갖고 차별금지 사안에서 ‘성적 지향’이 삭제된 것에 대해 항의를 하고 나섰다. 이렇게 성소수자들이 직접 자신을 드러내며 나서게 된 데는 보수기독교계에서 차별금지법안을 ‘동성애자허용법’이라고 매도하면서 대대적인 반대운동에 나섰고, 이들의 압력을 받은 법무부가 법안에서 성직 지향을 비롯한 차별사유 7개 항목을 삭제하였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이 단체들을 결성해서 공개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부터였다. 그로부터 15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나타난 이런 현상을 두고 한 성소수자 운동가는 그 유명한 ‘스톤 월’ 투쟁을 떠올렸다.


물론 소수자 중에서 선구적인 그룹은 장애인들이다. 장애인들은 6년 동안의 치열한 투쟁 끝에 지난 4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제정이란 성과를 쟁취했고, 이 법은 내년 4월에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 이 법이 시행되면, 장애인들에 대한 직접, 간접 차별이 지적되고, 차별 받은 장애인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설치되는 시정기구에 진정을 하면 구제를 받게 되며, 시정권고를 받은 국가기관이나 사인들은 권고에 따라 문제를 시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어떻든 소수자의 존재를 우리 사회에서 부각시키고, 존재자체도 잊고 있던 이 사회 구성원들은 그들의 인권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소수자는 누구인가?


‘소수자’, 인권론에서는 단지 수가 적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비주류(minority)에 가깝다. 소수자를 말할 때 수적으로는 상당하지만 권력관계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노동자나 여성을 포함시킬 때가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렇지만 이들은 노동자운동이나 여성운동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실현할 방법이 있기 때문에 굳이 자신들의 운동을 소수자 운동으로 위치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 안에서 다시 비주류의 위치에 속하는 층이 발생하게 되고, 이럴 때 그들은 소수자 운동의 위치에 설 수도 있다.


윤수종 교수는 “적극적으로 말하면 소수자는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이에 따라 소수자는 표준적인 근대 인간상인 “백인-남성-어른-이성애자-본토박이-건강인-지성인-표준어를 쓰는 사람”에 대해 “유색인-여성-어린이-동성애자-이주민-환자-무지렁이-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 이럴 때 표준화된 인간상과 거리가 있는 인간상을 모두 소수자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국가권력으로부터 배제되고”, “기본적으로 국가장치에 포획되기를 거부하는 특성을 보인다”고 정의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인권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에 나서며,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운동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된다. 그렇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긍정하고, 그 정체성 위에서 운동에 나서기까지는 극심한 소외감과 심지어는 범죄의식에 시달리고, 무수한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런 소수자들은 당사자들의 운동을 통해서 자신들을 배제하는 국가권력에 도전하고, 사회질서를 부정한다. 주류사회의 법이나 질서, 이념, 도덕 등은 이들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범죄시하게 되므로 이런 질서들을 바꾸지 않으면 소수자들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소수자운동은 다양한 영역에서 주류질서에 파열구를 내면서 운동의 주변을 확장하게 된다.


소수자운동에서는 이들만의 특이한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서 당사자들이 주체로 서게 되며, 당사자주의가 주창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장애인 당사자, 성소수자 당사자 등의 당사자주의가 소수자운동의 중심적인 이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폐단으로 당사자가 아닌 이들을 의결과 행동에서 배제하려는 역현상도 발생하여 운동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기도 한다.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허상


소수자들이 차별 받는 것은 지배세력을 구성하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서다. 소수자들이 갖는 특성을 차이로 인정하지 않고, 이를 근거를 위계화하고, 서열화한다. 지배세력들은 소수자들이 갖는 차이를 강조하여 근거 없는 편견을 조장하게 되며, 이런 편견을 통해서 마치 사회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한다.


이런 차별은 인종주의, 가부장제, 이성애주의, 정상사회 등의 이데올로기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는 백인들이 흑인이나 유색인종들보다, 남성이 여성보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유포하고, 이에 따라 차별을 받는 상대들을 열등한 존재로 비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열등한 위치에 있는 소수자들에게 폭력이 동원되는 것도 묵인되며, 오히려 사회의 안전을 위한 방편으로 조장되기도 한다.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긍정하기까지 이런 열등의식은 소수자들의 심리내면까지 지배하게 된다. 열등의식을 가진 소수자들은 지배자들의 차별을 당연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보다는 부정하면서 지배세력의 질서 안에 포섭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차별의식이라는 것이 지배세력들이 강요하는 허위의식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당연히 그 소수자들은 지배질서에 저항하게 되고, 지배세력이 파놓은 차별의 함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해방과정에 나서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노예들이 해방되었고, 식민지민들이 해방되었다. 여성들이, 장애인들이, 성소수자 등이 지금 이와 같은 해방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운동을 함으로서 인간 사회는 보다 풍부한 다양성을 갖춘 사회로 구성되게 되므로 이들의 운동은 세계질서를 변혁하고자 할 때 주목을 받는다. 따라서 일부 진보적인 지식인이나 운동그룹들은 이들의 운동에 주목하고 자본주의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운동으로 발전을 꾀하기도 한다.


차별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이나 이번 차별금지법안에도 담겨 있지만,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이나 연령, 신체조건, 성적지향 등 개인의 태생적 또는 후천적 속성을 기준으로 그 개인에 대해 불이익한 대우를 주는 것이다. 이런 직접 차별은 의도적 차별과 비의도적 차별로 다시 나뉜다. 간접차별은 중립적인 기준을 적용하였으나, 그러한 중립적 기준이 특정 소수자 집단에게 불이익한 결과를 야기하는 경우를 말하는 경우다. 폭력은 정신적, 신체적 폭력만이 아니라 괴롭힘, 조롱, 비웃음, 경멸, 농담을 포함하는 언어적, 시각적인 행위를 통한 괴롭힘도 포함된다. 또 개인적인 차별만이 아니라, 제도적 차별과 구조적 차별 모두가 포함된다. 이와 같은 차별 시정을 위해서는 시정명령, 집단소송제도, 입증책임전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등이 도입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앞의 법률이나 법안에서는 시정명령과 일부 입증책임전환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차별 시정 조치에 따라 차등대우를 하는 것은 차별행위로 보지 않는다.



소수자의 관점에서 변화시키는 것


지금까지의 이와 같은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전략을 보통 ‘동등화’ 전략이라 한다. 남성과 여성, 비장애인과 장애인,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의 비교대상이 있는 경우에서 이들 간에 동등한 위치, 동등한 수준의 대우를 해주면 차별은 시정될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럴 경우 대부분은 소수자들을 정상성이라는 기준에 맞춰 끌어올리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장애인의 경우 한때 ‘정상사회이론’에 의해서 재활치료 등을 통해 장애인들을 정상인의 생활과 행동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현재는 이와 같은 정상화이론은 수정되고 있다.


또 문제는 배제 받는 집단에서 개인을 분리하여 그 개인의 차별을 시정하는 방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럴 때 개인의 차별이 시정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집단에 대한 배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러므로 차별의 구조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차이를 위계화시켜서 차별하는 사회다. 하기에 차별의 구조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사회라는 보다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차별의 원인에 대한 규명과 그 원인의 제거 없이 단지 한 개인에게 정상 수준만큼의 대우를 해준다고 하는 것은 겉의 상처나 치유하다가 결국은 안에 심각한 병을 키우는 꼴이 되고 만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부닥치는 대부분의 차별 시정이나 해소라는 것은 차별을 낳는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서만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따라서 개인들의 권리 구제 차원을 넘어서야만 차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우선, 소수자들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오히려 그들에 맞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그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드는 길이라는 관점의 이동이 필요하다. 차이를 인정한다면, 그 차이를 이른바 ‘정상’에 맞게 교정하려 하지 말자는 것이다. 장애인을 재활치료시켜서 억지로 비장애인처럼 만들어야 하나? 성소수자들을 교정하여 이성애자로 만들 것인가? 오히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으로 다양한 교통약자들의 이동권이 증진되는 사례에서처럼 소수자의 관점에서 소수자들을 중심으로 놓고 사회와 생활의 구조를 만들어간다면, 인간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그 다양성으로 인해 더욱 우리사회는 풍부해지지 않을까.


현재 국제사회에서는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개별인권조약들이 제정되었거나 제정되고 있다. 양대 국제권리장전이라고 하는 자유권조약과 사회권조약이 제정되어 차별금지를 인권의 원칙으로 규정하였다. 그런 위에 다시 인종차별철폐조약, 여성차별철폐조약, 어린이.청소년권리조약, 이주노동자에관한권리조약, 장애인권리조약 등이 제정되었다. 이미 양대 국제권리조약들에 차별 금지의 원칙이 담겨 있음에도 이런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차별금지 관련한 국제조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권의 재구성의 필요성


현재는 일반법에 대한 특별법적인 방식으로 이들 차별금지조약들이 만들어지고, 시행되는데 이런 추세로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기본적인 국제조약들이 나중에 발전된 이들 조약들에 의해서 재해석되고, 재규정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은 특수한 원칙들이 개별 조약에서 논의되지만, 이들 특수성이 보편적인 원리로 포섭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국제인권조약도, 그 원리도 수정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때가 오게 된다. 그럴 때 소수자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존재 그 자체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차별의 의미 규정도 달라질 것이라 본다. 또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인권의 역사는 다시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


이제 우리 사회로 돌아와 보자. 앞서 설명했듯이 차별금지법안을 두고 성소수자 집단과 보수기독교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아무래도 보수적인 성향의 관료집단들이 지배하는 정부는 성소수자 집단에 불리한 방향으로 차별금지법안을 만들려고 한다. 아니 어쩌면 관료집단 자체가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반대 움직임을 일으켜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의 구조에 비춰보면, 파격적인 법률이 제정되려는 상황이다. 그런데 만약 이 차별금지법이 성소수자 진영을 비롯한 소수자 단체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제정되었다고 한들, 뿌리 깊은 차별의 구조와 사회 구성원들의 차별의식은 그대로라고 한다면, 그 법률은 시행도 되기 전에 유명무실한 법률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소수자 집단에서는 그 법률을 근거로 자신들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저항을 지속해야 하고, 그런 저항운동을 통해서 실절적인 차별을 해소하고, 평등한 상태를 만들려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법률의 제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률이 담고 있는 의미와 철학, 그로 인해서 우리 사회가 야만성을 벗어 버리고 보다 인간화된 사회로 갈 것이라는 희망을 사회구성원들이 동의하도록 하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뒷받침 없이는 얼마든지 껍데기만 차별금지법인 형식적 법률로 전락될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실질적인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사회구성원들의 지지와 동의 속에 그 법률이 제정될 수 있도록 보다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호에서는 소수자, 그리고 차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다음 호에서는 인권의 관점에서 평화권과 발전권을 생각해 보도록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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