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내목소리] 감시통제의 세 가지 속성과 잘 사는 문제

웹에서 프라이버시는 실종되었다

<참세상>은 선거실명제를 거부하며 선거시기에 기사 덧글을 포함하여 게시판을 모두 폐쇄하였고,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런 조치를 실명제 위반으로 보고 이행명령을 내려 1천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습니다. <참세상>은 “민중언론으로서는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루더라도 정부의 조치를 그대로 따를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권력관계 위에 이루어진다. 제도와 장치를 갖춘다. 외부에서 만들어지지만 궁극적으로 내면화된다. 감시통제의 세 가지 속성이다.



1. 아이가 부모를 감시한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감시한다? 잘 성립하지 않는다. 이처럼 감시통제는 권력의 불평등 관계를 반영한다.
2. 감시통제는 외부의 규율로 시작되지만 곧 내면화로 전화한다. 프라이버시 침해와 표현의 위축 효과가 나타난다. 자기 검열을 뜻한다.
3. 파놉티콘에서 RFID까지, 국가보안법에서 인터넷실명제까지 제도와 장치 구축이 선순환관계를 이룬다. 감시통제는 스스로 진화하지 않는다. 누군가 있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 사회구성원들은 ‘경제’ 즉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강한 욕구를 분출했다. 보다 잘 먹고살기 위한 욕구가 아니라 먹고살기 만만치 않은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한 희구라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소득 2만 달러와 각종 지표, 선진국 수준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불안하기만 한 동요 심리가 폭발한 거다.



감시통제 쯤이야?


불평등한 권력관계, 익숙한 지 오래다. 군사독재권력 때도, 민주화권력 때도 그랬다. 사회적 경험을 통해 숱하게 학습해왔다. 자본권력이 세상을 움직이는 추동력을 갖는 오늘날, 한국 경제의 스펙타클과 자본권력이 보여주는 위용 앞에서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따른 불편함 쯤이야 일시적으로 감수할 수 있다는 심리가 팽배한 건지도 모른다. X파일 폭로에서, 황우석 열광에서,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비자금 폭로에서, 이명박 동영상에서 살아있는 권력관계를 보았다. 하지만,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불편하긴 하지만, 성공, 일류, 선진화에 대한 욕망에 환호하고 기대는 편이 고단한 현실을 드러내고 인지하고 학습하는 것보다 훨씬 아늑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감시통제 쯤이야, 표현의 자유 쯤이야 당장에 불편에 비하면 저 멀리 있는, 한가하고 성가신 일로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시통제를 위한 제도와 장치 구축의 선순환관계라고 했는데, 말의 유희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런데 제도란 게 그렇다. 제도는 삶의 규율을 의미한다. 만들 때는 사람이 제도를 주무르지만, 만들고 나면 제도가 사람의 삶 전체를 규정한다.


60년 된 국가보안법은 남쪽에서 반세기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반공과 불온, 금서와 금지가요, 보도지침 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검열 체제를 상징한다. 청소년 보호를 명분으로 음란한 것에 대한 감시는 불온 시대를 대체했고, 사회적 환란에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감시통제의 필요는 끊임없이 제기됐다. 미국 애국법을 벤치마킹한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가 그러하고, 국가보안법을 인터넷 상에 온전하게 옮겨놓은 정보통신망법 44조 7의8 ‘불법정보의 유통금지’가 그러하다.


오프에 대한 감시는 CCTV, RFID, 전자여권 등과 같은 수단이나 장비의 발달과 함께 확장된다. 장비나 제도는 스스로 진화하지 않는다. 무엇인가에 의해 고안되고 추동된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파놉티콘이 죄수 감시에 대한 효율적인 방안 구상의 산물이고, 공적, 사적 영역에서 증가하는 CCTV의 설치는 범죄 예방의 필요가 과잉 적용된 결과이다.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환기해보자. 초기 인터넷이 출현했을 때 쌍방향성, 인터넷 대의제, 직접 민주주의 실현 등이 이야기될 수 있었던 배경, 그건 무엇보다 ‘익명’에 있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신분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표현하고 싶은 만큼 표현하는 데 누군가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가능했다. 인터넷실명제는 정확히 이를 불온시하고 부정한 전자파놉티콘의 요체다.



기만적인 ‘제한적 본인 확인제’


정보통신망법 상의 실명제는 ‘제한적 본인 확인제’라 불리는데, 말이 우습다. 사실상 90% 이상의 네티즌이 사용하는 대규모 포털,언론이 대상인데 ‘제한적’이라니 기만이다. 공직선거법 상의 실명제는 1,400개가 넘는 인터넷언론을 대상으로 한다. 선거운동 시기에만 일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라고는 하나, 민주공화제 하에서 선거운동 시기만큼 표현의 자유가 더 절박한 시기는 없다. 아주 고약한 일이다. 언론은 여론의 다양성을 본연의 속성으로 하는데, 인터넷실명제는 명백히 시민사회 여론 형성의 순방향을 역행한다.


예상이 맞았다. 인터넷실명제의 경우 2004년 3월에 입법되고, 2006년 지자체 선거 시기 처음 적용된 후, 이번 대선에서 톡톡히 효과를 봤다. UCC 생산과 유통에서, 정치토론에서, 담론과 의제의 측면에서 네티즌의 참여는 확실히 위축됐다. 중앙선관위가 10월까지 온라인 선거법 위반으로 2만5,135건을 적발했다. 11월 29일까지 경찰청은 1,224명을 입건했다. 2002년 57명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되는 규모다. 옆 사람이 올리는 글이, UCC가 위반으로 판명나는 순간, 표현은 위축된다. 글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온라인에서의 참여 이전에 혹독한 자기검열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회구성원 전체의 자기검열의 내면화, 이는 시민사회 전체에 대한 감시체제의 구축으로 이어지는데, 분명한 건 누군가는 이를 즐기는 쪽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실명제 찬성론자들은 인터넷실명제의 본질이 인터넷에서의 발언의 사회적 책임을 따지는 데 있다고 강변한다. 그렇지 않다. 인터넷실명제의 본질은 주민번호를 내 놓고, 누구인지를 밝히고, 그리고 나서 표현하고 싶은 걸 표현하라는데 있다. 익명의 악플과 비방과 같은 표현은 시민사회의 자정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걸러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타당하다.



시나브로 웹에서 프라이버시는 실종되었다. 뉴스를 소비하고, 전자금융을 이용하고, 인터넷몰에서 물건을 사는 모든 기록이 남는다. 정부나 사용자가, 수사기관이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추적 가능하다. 인터넷 감청 기술에 대한 국제 표준 논의도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 전자파놉티콘의 간수들은 일일이 수색영장을 들이밀며 범죄를 추궁하지 않아도 된다. 온라인에서의 감시통제의 기술적 준비는 완료 단계로, 신호만 기다리고 있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은 이 맥락위에 있다.


잘 먹고사는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해결해줄 지 모른다. 48.7% 국민의 마음과 한결같이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잘 살고싶은 문제가 있는데, 하고 싶은 표현을 하고 싶은 만큼만 하며 사는 문제가 그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개념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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