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의 140배, 2만8천3백ha, 전체국민이 땅 2평, 담수 1평을 나눠가질 수 있는 규모. 엄청난 간척사업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새만금 물막이 공사가 한창인 신시도 앞에 배를 타고 나가면 수치로는 가늠할 수 없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새만금간척사업은 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없애는 공사라는 것을.
군산시, 김제시, 부안군에 걸친 앞바다를 모조리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인간의 무시무시한 욕심을 만날 수 있다. 군산 앞바다의 비음도에서 야미도, 신시도, 가력도 까지 33km. 광역시 하나가 넉넉히 들어설 바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바다가 사라지는 것보다 더 아픈 일은, 썰물 때면 펼쳐지는 갯벌이다. 갯벌에 서면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이곳에서 일을 해 온 어민에게는 갯벌은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너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갯벌에만 가면 행복했어. 돈을 캤잖아. 갯벌에만 가면 돈이 있었어. 한 겨울에도 물 속에 들어가도 추운 줄도 힘든 줄도 몰랐어. 갯벌만 있으면 배운 것 없어도 가진 것 없어도 아무 거리낌도 부끄럼도 없이 살 수 있어.”
갯벌에만 가면 행복했어
▲ 추귀례 씨 |
부안에 시집와서 28년을 살아 온 추귀례 씨에게 새만금 갯벌은 돈이자, 이제껏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생존의 기반이었다. “이제 행복을 맛보며 살만하니 바다를 막는다고 하잖아. 비참하게 됐어. 정말 콱 죽고 싶어.”
지난 18일부터 2박 3일간 부안에서 만난 새만금피해주민들의 공통된 말은 “죽고 싶다”나 “배와 함께 방조제 공사장 앞에 수장되겠다”는 절규다.
방조제의 길이는 33km,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까지 남은 공사구간은 2.7km다. 망태에다 돌을 넣은 돌망태 하나의 무게는 3톤. 15톤 트럭 21만대분이 바다에 쏟아져 방조제를 만든다.
“어제는 갯벌에 나갔더니 헬기가 떠서 순찰을 해. 공사장에서는 돌 붓는 소리가 계속 나지. 돌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차라리 내 귀를 막아버리면 쓰겠더라고. 내 귀를 차라리 막고 싶어. 듣기 싫어 정말 죽겠어.”
차라리 내 귀를 막아라
늦은 밤 집에 찾아가 만난 주민 한 분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판국에 이름이 어딨냐며 그냥 “피해 주민”이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부안군 계화면에서 나서 자란 아주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몸으로 자식을 키웠다.
“혼자 사는 여자가 정말 땅 한 평 없이 어떻게 자식들 대학공부 시켰겠어. 바다야. 내 삶의 전부가 바다였제. 차라리 2공구(신시도 왼쪽 공사구간)에 가서 죽어야제.”
아주머니는 이번에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무너진다. 방조제 공사가 진행되면서 갯벌에서 나는 수확량은 반의반으로 줄고, 그나마 끝물막이가 되면 갯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딸은 결국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 대학원에 진학했다.
▲ 돌망태 위로 철조망, 그 너머에는 경찰 |
“나는 돌망태라고 부르지 않아. 돌무덤이라고 하지. 나는 돌무덤을 방조제에 쌓고 있다고 해. 돌망태가 쌓이면 나를 그 밑에 묻는 것 같아. 내 가슴에 꽝꽝 쌓는 것 같아. 그것도 부족해 돌무덤 위에 철조망을 둘러놓았잖아. 삼팔선 철조망도 걷어내야 할 판국에….”
돌무덤 위의 철조망
방조제가 만들어지자 갯벌의 생명들도 사라졌다. 더 무서운 것은 이웃의 정이 사라진 것이다. 갯벌이 죽어가자 생산량이 줄어들고, 갯벌에 나가 함께 일하던 ‘이웃’은 이제 ‘경쟁자’가 된 것이다. 추귀례 씨는 사람이 무서워지고,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고 한다.
“옛날에는 우리 앞바다가 풍부했어. 이제는 고기가 얼마 안 나와. 뻘이 많이 생기고. 갯벌에 먹을 게 많을 때는 함께 나가 일을 했는데, 이제는 일 나갈 때 따라오면 욕을 하고 난리야. 많이 나는 자리를 알면 남들 다 간 다음에 몰래 뒤에 가.”
돈을 빌려달라고 해도 빌려주지 않는다. 서로 의심하고, 누가 말을 하면 이유를 달고 트집을 잡아 싸움을 하려고 한다.
“사람이 갑자기 무서워졌어. 말도 조심해야 하고, 함부로 다니지도 못해. 계화도가 살벌해졌어. 새만금 때문에, 뻘 땅만 쳐다보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고 미쳐버릴 것 같아.”
살벌해진 이웃
선주 사무실에서 만난 강승일 씨에게 정부의 4천5백억 원 보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흥분을 한다.
“보상, 보상이랍시고. 우리 어민들은 실질적인 보상 한 푼도 받은 적 없어. 이게 땅 투기랑 똑같아. 보상 이야기를 듣고 외지에서 찾아와 어장, 면허증 싹 쓸어 갔어. 외지인들이 보상 받았당께. 우리 주민들은, 맨손으로 깔꾸리 들고 갯벌에서 일한 주민들은 3백에서 천만 원 받았어. 그나마도 못 받은 사람도 있고.”
강승일 씨는 20년간 김 양식장을 했는데, 이제는 빚만 남았다. 1, 2공구 공사가 시작되자 조류 유속이 빨라져 김 양식장을 잃었다.
▲ 김지서 씨 |
“울 엄니가 내 어릴 적 이야기하면 바다에서 오리처럼 둥둥 떠서 살았다고 했어. 바다가 내 삶이여. 양식장 잃고, 이제는 작은 배하나 가지고 먹고 살아. 뭐할라꼬 늦둥이를 가져 가지고, 이제 다섯 살이야. 아직 많이 벌어야 하는 디. 막막하당께.”
강승일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연신 담배를 피우고 옆에 앉아 계시던 김지서 씨가 거든다. 그의 손톱은 휘고 굽었다. 손에는 기름때가 가득하다. 농사꾼의 손과 어민의 손은 달랐다.
농민의 손과 어민의 손은 다르다
“우린 돈도 필요 없어. 기왕에 이만큼 막았은께, 다리를 놓든 해서 바닷물이 오가게 해주면 쓰갔어. 해수유통. 그러면 예전 같지(고기 수확량)는 않지만 물이 섞지 않아 배 타고 살 수 있응께. 내 말 알 것어. 뱃사람은 논이 필요 없어. 산사람은 산사람의 줄이 있고 농사꾼은 농사꾼의 줄이 있고, 나름대로 줄이 있는 거여. 어민은 육지 나가서 사회생활도 못해. 그저 바다에 살다 바다에서 죽어야 한당께.”
▲ 어민의 손 |
20일 저녁, 신시도 2공구 공사장 바다 앞에 배에 탄 채, 새만금피해주민들은 밤샘농성에 들어갔다. 홀로 해상농성장에서 선외기라 불리는 작은 모터보트를 타고 육지로 돌아왔다. 까만 바다를 헤치며 오는 내내,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밤바다를 달리는 무서움보다는, 내가 헤치고 오는 바다를 지워버리려는 인간에 대한 무서움에 떨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