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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집으로 떠난 글쟁이들

[리얼리스트 작가 선언](4) - 작가들의 동맹을 외치는 시인 권혁소

이른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우리 현대사를 ‘민주화’시켰을 때, 그 힘으로 ‘문민’이라는 이름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을 때 나는, 박수를 치거나, ‘몸으로 때우던 시대는 갔도다 이제는 도를 닦을 때’라고 산에 들어가거나, 환경운동을 한다고 전원으로 돌아가거나, 이제는 통일이라며 ‘무모한’ 방북을 결행하기보다는 습작집의 이름을 그렇게, ‘문제는 다시 리얼리즘이다’로 바꿔 적는 일을 먼저 했다.

습작집으로 쓰던 노란 서류철 날개에 그렇게 견고딕으로 박아 붙이고, 절대로 잊지 말자는 주술을 걸듯 책꽂이에 꽂아두고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이름 아래 구속되어 있던 시들을 모아 두 권의 시집을 더 냈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더 악랄해졌고 더 양극화되었으며 더 우울해졌다.

나는 참여를 선택했다

80년대 초반, 민주주의니 뭐니 ‘이상한 시’로 등단이라는 걸 했을 때, 내게 시를 가르쳐주신 고등학교 때 선생님은 ‘외도를 했다’라는 표현을 썼다.

선생님이 외도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하였던 것은 우선은 시의 내용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다음은 등단매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랬다. 순수니 참여니 논쟁이 아직 뜨거울 때 나는 ‘참여’를 택했다. 아니 택했다기보다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운명이었고 필연이었고 원죄와 같은 것이었다. 살아있는 한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리고 아직도 거기 매달려 있으며, 적어도 시 쓰는 일을 멈춘다 할지라도, 사는 방식이나 사유의 틀까지는 바꿀 의향이 없다. 적어도 이십 년 이상 다져온 각오다.

산으로 간 글쟁이들

YS-DJ-노무현으로 이어지면서, 그 때의 수많았던 ‘글쟁이들’은 산으로, 전원으로, 황토집으로들 떠나갔다.

그들은 아주 급진적 우파가 되어 갔다. 우파로 사는 것에 멈추지 않고 좌파들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때론 그 공격이 치명적이기까지 했던 것은 그들이 획득한 ‘명성’이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그랬다.

혹자는 권력을 혹자는 명성을 혹자는 부를 얻었다. 학사는 석사를, 석사는 박사를 향해 질주했다.

그러는 사이 많은 이들이 죽었다. YS 때보다는 DJ 때에, DJ 때보다는 지금,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그래서 환경이니 생태니 평화니 통일이니 민족이니 자주니, 그렇게만 쓸 수가 없었다.

애만 쓴 꼴이 됐지만 가족주의로 귀결되는 삶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사회적 책무

리얼리즘의 사전적 우리말 해석이 ‘사실주의’라거나, 리얼리스트를 ‘사실주의자’라고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이라고 쓰는 것은 그 한 마디가 포괄하는 의미가 너무 크고 넓기 때문이다. 아직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세상이 지속되는 한 리얼리즘은, 적어도 ‘생각’ 있는 사람들이 글 쓰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행위가 세상의 변혁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깊어져야 한다.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 보다 날카롭게 벼리는 일, 그것이 작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늘 작가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고민한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모름지기 정답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작가 자신이다. 그래서 작가의 사회적 책무는 엄중하다. 그렇게 느끼는가 느끼지 않는가, 그것이 우파와 좌파를 나누는 하나의 경계가 되어야 한다.

나는 내가 속한 노동조합 내의 소위 ‘좌파그룹’에 속해 있다. 내가 좌파가 되고자 하는 것은 ‘내 입으로 말 한 것이나 내 손으로 쓴 글의 절반이라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책무 때문이다.

리얼리즘 문학은 좌파 작가의 필생의 과제여야 한다. 이제 문학이 곧 실천인 작가들만이라도 모여서 이 반민중적 자본의 역사를 멈추는 일에 나서야 한다.

작가들의 동맹이 필요할 때

작가들의 취약점은 이름이다. 작가들은 돈 되는 일에는 좀 등한해도 이름 내는 일에는 기꺼이 얼굴을 감추지 않는다. 그래야 ‘리그’가 형성된다. 그래서 꼭 경계해야 한다.

실천하는 작가들의 모임은 친목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단에 하나의 파벌을 만들거나 또 다른 권력으로 형성되어서는 정말 안 된다.

작가로서, 분명한 사회적 역할을 감내해 낼 수 있는 작가들의 동맹이어야 한다.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연대여야 한다.

분명한 노동계급적 관점을 가지고 글을 쓰는 작가들의 모임이 필요한 때이다. 이 때 오래된 논쟁, 이른바 NL이냐 PD냐의 시비가 있을 수 있겠지만, 논쟁이 격화된다고 해도 이것은 결코 무모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들의 연대를 통해서 천만을 향해 치닫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피폐한 삶을 내 문제로 껴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들의 현재 고민은 내일의 실천으로 형상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해방문학을 들춰본다

80년대에 경쟁적으로 노동을 팔고 민중을 팔아 작가가 된, 명망을 얻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가. 표지는 나달나달하고 속지는 누렇게 빛바랜 ‘노동해방문학’을 다시 들춰본다. ‘삶과 노동과 문학’이라는 부제를 단 ‘실천문학’을 다시 펼쳐본다. 격세지감이라고 묻어두기엔 작가들의 변화가 너무나도 무쌍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에 대한 기억에만 머물지 말고 남미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새김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리얼리즘 작가들의 포부여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으로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힘든 까닭은 남들과 똑 같은 노동현장을 살아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지면 위에 옮겨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해야 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이 땅 구석구석 삶의 나락에 처박혀 신음하고 있는 뭇 민중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아야 할 의무를 지녔기 때문 아니겠는가.

이 개 같은 세상

노동과 노동자를 대상화하는 글쓰기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연대로 함께할 때라야, 이 땅 리얼리즘 문학은 그 동안 못다 한 죄 값을 치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오류를 정정하지 못할 영영 돌아오지 못할 우파의 길로 떠나간 작가들을 대신하여 사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다시 리얼리즘이다. 날 선 작가들의 자기 선언을 기대한다.

최근 읽은 가장 감동적인, 삶에 힘이 되는 시가 있다. 김호철 ‘동지’가 자신의 글에 곡을 붙이고, 박준 ‘동지’가 입으로 부른 시 ‘이 개 같은 세상을’이다.

얼마나 내공을 닦아야 이런 글 한 줄 세상에 쏟아놓을 수 있을까···.


노동자의 피눈물 고여 붉게 물들여진 땅
죽도록 일만해야 목숨 붙여 사는 땅
생존을 위해 해방을 위해 노동자 피를 뿌리니
역사여 큰 소리 내어 답하라 이 개 같은 세상을

가녀리게 움틀거리는 야윈 풀잎의 노래
어둠 깊어갈수록 온몸으로 타올라
산맥을 넘어 성벽을 깨고 해방의 불을 사르니
역사여 큰 소리 내어 답하라 이 개 같은 세상을
덧붙이는 말

권혁소 시인은 1984년 [시인]을 통해 작품 발표를 시작하였으며 1985년[강원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논개가 살아 온다면](1987), [수업시대](1990), [반성문](1991), [다리 위에서 개천을 내려다보다](200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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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 , 권혁소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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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심

    잘 읽고 갑니다

  • 지너가가

    요 개같은시상을 뿌살버릴 글 써주삼

  • 열받아

    요즘 시인들 소설가들 열 받은 일이 있나
    비정규직 아픔과 함께하는 민중문학을 열어갈 작가들의 동맹 기대합니다

  • 개보다 못한 세상

    작가의 치열한 고민에 동지적인 애정을 보냅니다. 개같은 세상이 아니라 개가보다 못한 세상입니다.

  • 지나가다

    참세상에 와야 작가다운 작가를 볼 수 있네요.

  • 변절

    글의 힘은 무섭다. 일제시절 변절의 앞잡이가 누군가. 문인들이 아닌가. 전쟁터로 정신대로. 문인들의 선언보다는 반성과 회개가 앞서야 한다.

  • 노해만

    글의 전반적인 내용에는 공감합니다. 글쓴이가 '개같은 세상'을 칭찬하기 위해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개같은 세상을 읽고 그리 잘 쓴 글이라고 보여지지는 않고 심오한 내공이 필요하지도 않은 그저 운동가요의 가사로써 읽혀집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비유에 있어서 적절성 여부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유사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개는 충성심이 강하죠, 그래서 김남주 시인을 개는 밥주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충성심의 다른 이름은 복종입니다. 개의 무조건 복종하는 습성을 나쁘게 보고 있습니다. 그건 개가 인간이 아니라 개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거의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개가 사람물어 죽이는 뉴스가 들리긴 하지요. 엊그제가 복날이었습니다. 개는 인간의 배를 불리며 죽어갔습니다. 개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같이 나쁜 놈들이 없는거죠. 원래 개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았다면 개들은 자유롭게 무리를 지어 잘 살고 있을 겁니다. 늑대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늑대같은 세상' 이라고는 욕하질 않죠. 그런데 개에게는 욕을 마구잡이로 해 댑니다. 도대체 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길래 갖은 나쁜 비유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사실 개를 개답게 길들인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개가 인간에게 해롭게 하는 것과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을 비교해 볼 때, 인간이 인간에게 훨씬 더 해롭습니다. 특히 자본주의라는 세상에서 착취하고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자본의 인격체인 자본가들이 정말 해악적인 존재입니다. 개와 자본가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이며, 이 둘 중 어느 것이 사회에 더 해롭습니까? 제가 보기엔 '개같은 세상'을 아이러니 기법으로 했다고도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가사가 내가 읽기에는 추상적으로 읽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추상적이다보니 당연히 큰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리얼리즘은 구체에 있습니다. 이 가사는 구체가 아니라 대강의 추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평에 선뜻 동의할 수 없군요. '개같은 세상'을 시로 본다면, 썩 좋은 시는 아닙니다. 그게 솔직한 나의 평입니다. 세상에 대해 욕만 한다고 다 좋은 시로 분류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리얼리즘과 먼 거리에 있는 것 아닐까요?

    또 흔히들 좆같은 세상이라고 욕을 합니다. 좆이 어때서요? 좆은 인간의 꼴림에 반응할 뿐입니다. 좆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사랑을 나누는 기능도 하고 생산의 수단도 됩니다. 좆이 좆같은 세상에서 좆만 같아도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은 낯설기 하기가 됩니다. 개같은 세상, 좆같은 세상 이런 표현들은 관습에 찌든 너무나 상투적인 표현입니다. 낡아빠진 세계관이라고 보아도 전혀 무리가 아닐겁니다.

    저는 세상이 좆만 같아도 좋겠습니다. 저는 세상이 개만 같아도 좋겠습니다.

    거시기


    세상 참, 거시기 같으면 좋겠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공평하게 하나씩 달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루만지면
    일어나 끄덕이는
    더러는 함부로 일어나 민망하기도 한
    마음 통하지 않으면 결코 함께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사랑할 땐 밤꽃 향기 나고
    버림받을 땐 조팝나무꽃 냄새 내는
    짧거나 굵거나
    생산의 수단으로
    배출의 도구로 살아 온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세상을 향해 빳빳하게 봉기하는 그런

  • 글좋아

    리얼리즘을 이야기 하시지만, 너무 관념적이시네요!
    정파적이기 까지 하시구요!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고통은 작가들의 혹은 운동가들의 급진적이고 선명한 주장을 정당화 시키는 수단이 아닙니다. 사회적 실천의 이유가 되는 인식해야 할 대상이며 대중들에게 인식시켜야 할 것이지요!

  • 글좋아

    작가로서 민중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실에 대한 원인과 처방은 다를 수있지요!변혁운동의 경로 혹은 핵심과제등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작가로서 선명한 이념적 글쓰기를 통한 문예운동을 할 수도 있지만, 내 깜냥으로는 지역과 내 주변을 먼저 변화 시키기 위한 작은 실천에서 시작할 수도 있는 겁니다.
    동맹이라! 선명한 이념을 가지고 전선에서 싸우는 동맹도 좋겠지만, 문학을 무기로 또다른 민중인 우리들의 어렵고 힘든 삶을 이런 식으로 치유해 보자고 모인 글나눔의 가치도 결코 작다고 할 수없겠지요!

  • 노노노

    노해만님은 정말 '좆나게' 남성중심적이네요. 누구나 공평하게 하나씩 달고있다니.. 여성은 없는데..흠.. 좆이 욕이 된 이유중 하나를 추측해 보건데 수많은 '좆'들이 수많은 여성들을 폭행하며 몹쓸짓을 해온 역사가 그 이유중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개를 욕으로 쓰는건 당연히 인간 중심적인 시각이겠지만.. 자본가(지배계급)가 노동자(피지배계급)에게 개가 인간에게 하는 것 같은 복종을 강요하는 이세상을 '개같은 세상'으로 비유하는게 아주 부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네요.. 저는 그래도 인간이라 인간중심적 사고에 편향되서 그런지 몰라도 '개'라는 욕이 장애인이나 성매매여성을 비하하는 '병신' '지랄' '씹팔' 같은 다른 널리 쓰이는 욕보다는 낫다고 생각되네요. 물론 되도록이면 동물, 가축 비하도 안하고 욕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리고 특정 '욕'의 단어의 원뜻과 어원 등을 파헤쳐 보고 그 단어의 욕으로써의 쓰임새의 타당성 등을 따져보는 것은 나름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그렇게 분석적으로 다룬다고 그게 과연 구체성을 띤다고 할수 있는 건지는 의심스럽네요..

    현실에서 널리 민중들에게 쓰이는 욕인 '개'를 시에 그대로 갔다가 썼는데 그게 현실적이지 않다고 하며 '개'라는 가축의 역사에 대해 파해쳐보는 것이 왠지 저에겐 더 추상적으로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