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다녀와서는 그런 게 많이 없어지긴 했다. 아무리 가슴이 미어져도 현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끝까지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려는 사람이 자기가 보고 들은 것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노력했고, 언젠가부터 집회 도중에 도망치듯 빠져 나오는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콜트-콜텍, 하이텍 고공 농성장에 가서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취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2008년 10월 23일이라는 날짜를 믿을 수 없었다. 1970년대 노동운동사를 다룬 책에서나 읽을 수 있었던, 정말 한도 끝도 없이 열악한 현장에서 그들은 지금껏 일해 왔던 것이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한숨을 거푸 내쉬느라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 적지도 못했다.
송전탑을 한참동안 찾아 헤매다가 고공 농성장에 다다른 것은 저녁 여섯 시 반쯤이었다. 사위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비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한강 공원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가끔 스쳐 지나갈 뿐 거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한강과 자전거 도로 사이에 세워진 보조 시설물에는 콜트-콜텍, 하이텍 조합원들이 만든 피켓들과 현수막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비에 젖은 선전물들을 찬찬히 보다가 송전탑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이텍 지회장과 콜텍 지회장이 올라가 있다는 까마득한 높이에, 길게 세로로 늘어뜨린 현수막이 바람에 날려 펄럭거리고 있었다. 구급차와 119 차량이 송전탑 부근에서 얼쩡거렸다.
▲ 조합원들은 비닐 천막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
조합원들은 비닐 천막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는 쭈뼛쭈뼛 다가가 인사를 드리고 참세상에서 나왔다고 했다. 거센 비바람이 비닐 천막 안으로까지 마구 손톱 발톱을 들이밀었다. 말이 천막이지 사실은 사방이 훤히 트인 공간이었다. 빗물이 고여 비닐이 자꾸만 내려앉는 바람에 수시로 비닐을 들어 물을 빼 줘야 했다.
식사가 끝나고, 하이텍 공대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콜트-콜텍과는 어떻게 만나 공동투쟁을 하게 된 건가요?”
“저희와 비슷한 사정의 다른 사업장들이 많아서 전부터 다른 곳과 공동 투쟁을 계획하긴 했어요. 여기저기 접촉을 해 보다가 콜텍이 저희랑 연대하겠다는 뜻을 밝혀서 함께 투쟁을 하게 된 거지요. 지난 97년에 ‘천지’와 ‘태광’이 구로공단에서 공동투쟁를 한 이후에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공동투쟁이 없었어요. 태광은 하이텍의 옛날 이름이구요. 그래서 공동투쟁의 전통을 다시 일으키자, 그리고 콜텍과 하이텍의 요구를 관철시키자, 그 두 가지 목표가 있는 거죠. 비록 콜텍과 하이텍은 만드는 물건은 다르지만, 오랫동안 악덕 자본과 싸워 왔고,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속해있고, 또 자본들이 정말 극악무도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결국 자본가의 모습은 어디나 똑같기 때문에, 한 사업장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공동투쟁으로 그들에게 더 강한 타격을 가하자는 데에 의의가 있어요.”
“제가 들은 바로는 하이텍에서 만드는 게 무선 조종기라고 했는데요. 그게 정확히 어떤 물건인가요?”
“모형 자동차나 모형 비행기 조종해서 움직이게 하는 거 있죠? 그런 조종기를 만들어요.”
“아, 철인 28호에 나오는 그런 조종기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죠.”
“지금 싸움에 나선 조합원 분들은 몇 분이 계시나요?”
“13명이요. 처음에는 100여 명이 투쟁을 시작했는데 7년 동안 싸워 오면서 지금은 13명이 됐어요.”
▲ “13명이요. 처음에는 100여 명이 투쟁을 시작했는데 7년 동안 싸워 오면서 지금은 13명이 됐어요.” |
7년. 2002년부터 시작된 싸움이었다. 말이 7년이지 그동안 하이텍 노동자들이 해보지 않은 투쟁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희 조합원들이, 50대가 한 명 있구요. 대부분이 40대랑 30대에요. 그러니까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동안 일해 온 조합원들인 거죠. 하이텍이 태광이던 시절부터요.”
“하이텍 본사가 오창에 있다고 들었는데 오창이 어디 있는 곳인가요?”
“충북에 있어요. 청주 옆에. 원래 구로에 있었는데 하이텍 본사가 2005년에 오창으로 이전을 했죠. 생산라인만 구로에 남겨두고 몽땅 오창으로 옮겨 버렸어요. 그것도 조합원들이 수련회 간 사이에 몰래 이전했어요. 그리고 법인을 분리했죠.”
“법인 분리라는 게......?”
“음, 그러니까 다른 사장을 세운다는 거예요. 생산라인 자체가 하이텍과 별개 회사로 되는 거죠. 그래서 ‘에이치앤드앰 프로덕션’이라는 회사가 생겼는데 하이텍에서는 조합원들한테 그 회사로 전적(轉籍)을 하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했어요. 거기로 가라. 기본급은 줄 테니 일하지는 마라. 그러면서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사기휴업을 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 회사를 폐업할지언정 노조는 죽어도 인정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9월 1일에는 정식으로 정리해고 통보를 했어요. 회사는 자꾸 전적을 하라는데, 사실 전적을 하면 저희들 고용이야 보장이 되죠. 근데 고용 보장이 문제가 아니라, 전적을 하면 88년에 생긴 노조가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전적을 해 보세요. 거기서 노조 다시 만들어야 해요. 회사 자체가 달라지는 거니까. 전적을 하면 저희는 하이텍 소속이 아니게 되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회사에 요구한 게 세 가지가 있었는데, 노조 인정해라, 노조 탄압에 대해 사과하라, 전적 말고 ‘전출’을 인정해 달라. 그렇게 요구했더니 물론 사장은 받아들이지 않았죠. 전출을 하게 되면, 저희 소속은 그대로 하이텍이지만 장소만 다른 곳에서 일하는 셈이 돼요. 하지만 사장은 안 받아들였어요.”
“그러니까 회사가 자꾸 전적을 강요하는 이유는 노조를 털어 버리고 가겠다는 거로군요?”
“예. 정리해고 철회. 민주노조 사수, 해고자 복직. 이 세 가지가 현재 저희의 주요 목표에요. 전적을 전출로 바꿔 달라는 게 결국 노조활동 인정해 달라는 요구인 거죠.”
“그럼 회사에서 사기 휴업을 했을 때는 물건이 하나도 생산되지 않았나요?”
“아뇨. 그땐 비조합원들이 일했죠. 하이텍 노동자들이 국내에 총 23명이 남아있는데 그 중 13명이 투쟁하고 있고 나머지 10명이 지금 구로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저희를 정리해고 하고 나서, 남아 있는 노동자들 노동 강도가 엄청 세졌죠. 전에 구로에 노조 사무실이 있을 땐 8명이 800개를 만들었는데, 요새는 4명이 1000개를 만들어요. 엄청나죠.”
“국내.....라고 하셨나요? 외국에도 공장이 있나요?”
“96년에 처음 필리핀에 공장을 세웠어요. 지금은 생산라인 대부분이 거기 가 있죠. 그쪽에만 노동자들이 450명 정도? 국내엔 23명뿐이니 상대가 안 되죠. 국내에 있는 노동자들은 저가품만 만들었어요. 하이텍이 10년 간 계속 흑자만 내왔는데 아마 조만간 국내 공장을 폐업해 버리고 모든 생산라인을 필리핀으로 옮겨 갈 거예요.”
결국 투쟁 사업장 어디를 가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또 듣게 된 것이었다. 노조를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본가와, 죽어도 노조를 사수하겠다는 노동자들의 싸움은 늘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간다. 왜? 자본가들의 손에는 돈이 있고 등 뒤에는 경찰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맨 몸으로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취재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해 읽으며, 나 혼자 달랑 써내는 글로는 하이텍 조합원들이 그간 겪어 온 수많은 일들을 티끌만큼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진보적’인 뉴스 사이트들에 접속해서 ‘하이텍’을 검색해보자. 몇 년 전 기사부터 바로 며칠 전 기사까지 적지 않은 기사들이 나온다. 그 많은 사연과 아픔들을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 속에 몇 줄로 요약하기란 어렵고 쉽고를 떠나 참으로 죄스러운 일이다. 조합원들은 지난 8월 말에 오창 하이텍 본사에 천막을 쳤고, 구사대들에게 매 맞고 짓밟히면서도 끝까지 저항했고, 분명 법원에서는 조합원들이 마음대로 공장을 드나들 수 있다고 판결을 내렸는데 사측은 정문을 아예 폐쇄해 버렸고, 카드 같은 걸 찍어야 들어갈 수 있는 전자자물쇠를 설치했고......
기사들을 읽으며 사람살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하이텍 조합원들 전원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산재 환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7년이라는 시간동안 투쟁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콜텍이든 하이텍이든 사장들이 노조 혐오증 환자라니까요. 10억이 들든 20억이 들든 노조를 반드시 없애 버리겠대요.”
그 말이 정답이었다. 미친놈 칼춤 추듯 날뛰는 자본가들 몇 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부서지고 박살이 났을까? 말이 7년이지, 7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투쟁 시작할 즈음엔 처녀였던 조합원이 지금은 아이 둘 낳은 엄마가 되었다고 했다.
“근데 농성장에서 주무시는 분들은 어디서 주무시나요? 여긴 너무 추울 것 같은데......”
“저쪽에 천막 세 동이 있어요. 평소에 상주하는 인원이 15명에서 20명 정도 되죠. 원래는 천막을 송전탑 바로 밑에 치려고 했는데 한강 공원 관리자가 ‘외관상 안 좋다’고 못 치게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쪽에 쳤죠.”
“송전탑 위에 계신 분들은...... 춥지 않을까요?”
“바람이 장난이 아니에요. 위쪽에 전화를 걸어 보면 바람 소리가 거의 태풍 수준으로 들려요. 게다가 오늘은 날씨도 이래서...... 걱정이에요.”
“위에는 뭐가 어떤 식으로 설치돼 있나요? 두 분이서 계시기엔 좁지 않나요?”
“좁진 않아요. 철골에 나무판 대고, 매트 깔고, 위로는 비닐을 덮었어요. 두 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넓이에요.”
“천막이나 고공 농성장 침탈 시도는 없었구요?”
“아직까진 없었어요. 여기가 도심지 한가운데는 아니고 좀 외진 곳이기도 해서, 사측이나 경찰들이 ‘그래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다만 저희가 강변북로 쪽에 현수막들을 좀 걸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자꾸 도둑맞더라구요.”
“회사와 교섭은 계속 시도하고 계신 거예요?”
“고공 농성 들어가기 일주일 전에도 교섭이 결렬됐었어요. 회사는 겉으로는 우리와 교섭하겠다고 이야기하지만 막상 우리의 요구는 하나도 받아들여 주지 않고 있죠. 노조를 인정하라. 전적이 아닌 전출로 하라. 하지만 실제로 교섭에 들어가면 회사는 여전히 전적을 강요하고 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만 해요. 그나마 교섭에 나오는 것도 저희가 노동부나 국가인권위원회를 들쑤셔서 회사가 교섭 자리에 나오게끔 압박을 했으니 그런 거죠. 그래서 저희가 조만간 일본으로 원정투쟁을 가려고 해요.”
“일본에 뭐가 있나요?”
“하이텍이 미국, 일본, 독일에 판매 법인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 판매 법인이 좀 커요. 그리고 일본 쪽이 다른 곳보다 로봇 산업도 발달돼 있어서 사람들의 관심도도 높구요. 하이텍에서 만드는 게 로봇 산업이랑도 연관이 있어서, 일본에 가서 로봇 산업 종사자들에게 하이텍 자본의 만행을 알려 나가려고 해요. 지금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겉으로는 매년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기업이지만 알고 보면 노동자들을 짐승같이 대우하는 악덕 자본이다. 저희가 일본 철도노조 사람들이랑 친분이 좀 있어서 그쪽과 같이 연대도 할 계획이에요.”
24일 금요일 오후 3시에는 송전탑 고공 농성장에서 결단식이 있다고 했다. 송전탑 위에 올라가 있는 하이텍 지회장과 콜텍 지회장이 그 40미터 위에서 삭발을 한다고 했다. 삭발하는 모습을 밑에 있는 동지들이 볼 수 있도록 어떻게 생중계를 하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내게 물어 왔다. 영상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나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하이텍은 정말 안 해 본 투쟁이 없어요. 고공이고 단식이고 삭발이고 간에......”
빗발이 아까보다 가늘어졌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콜텍 사무장이 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대전 노동청을 점거했다는 기사 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콜트-콜텍은 박영호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다. 기타를 만든다. 콜트 공장에서는 전자 기타, 콜텍 공장에서는 통기타를 만든다. 콜트 공장은 인천에 있고 콜텍 공장은 대전에 있다. 콜트-콜텍 본사는 등촌동에 있다. 세계 시장 점유율 세계 3위라고 한다. 기타를 좀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콜트 악기를 갖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는 엄청나게 돈을 긁어모았다. 그러면서도 회사 사정이 안 좋아졌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작년 11월에는 해고 노동자 한 명이 인천 공장 안 천막농성장에서 분신까지 했다. 거기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사무장에게 말씀 좀 듣겠다고 한 이후부터 사무장은 그동안 속에 쌓인 것들을 모두 쏟아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내가 기사로도 읽어보지 못한 소름끼치는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수첩에 열심히 받아 적다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몇 번이고 볼펜을 내던지고는 했다. 실제로 사무장이 들려준 이야기들 중에서 많은 부분을 받아 적지 못했다. 내 잘못이다. 조혜원 씨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을 보고 콜트-콜텍의 노동 현장이 심각하게 열악하다는 사실은 대강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일들을 하나하나 듣고 있자니 내가 지금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얼른 가늠할 수가 없었다. 조혜원 씨는 대전 콜텍 공장을 둘러보고 나서 글에 이렇게 썼다.
‘이럴 수가. 30년도 넘은 이야기가, 마치 영화처럼, 하지만 생생한 현실로 내 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중략) 생산직 노동자들의 40%가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고, 59%는 유기용제 노출로 인한 직업병이 의심되며, 36%는 기관지 천식, 40%는 만성기관지염으로 나타났다는 콜트악기 노동자들의 건강 상태를 조사한 자료가 헛말이 아니라는 걸, 그 짧은 시간에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콜텍 사무장은 힘있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한 2년 정도 싸웠는데...... 꿈쩍도 안하는 자본과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집중해서 싸우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을 했어요. 자본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자는 거였죠. 근데 한 사업장으로는 투쟁이 잘 안 돼요. 사람도 많지 않고. 그래서 장투사업장들끼리 잘 해 보자, 그런 취지에서 공동 투쟁을 다른 곳에도 많이 제안했었는데 그 취지에는 다들 동의했지만 서로 여건이 안 맞아 성사가 잘 안 됐지요. 그러다가 하이텍이랑 힘을 합치게 된 거예요. 금속 차원에서 한 번 뭉쳐 타격을 가해 보자...... 지금 함께 싸우고 있는 콜텍 조합원은 30명 정도 돼요. 평균 연령이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이니 아무래도 우리끼리만 싸우기엔 어려운 점이 많았죠. 뭉쳐야 더 집중적으로 투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이텍 조합원이 말해준 대로, 콜트-콜텍과 하이텍이 힘을 합칠 수 있었던 것은 공동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너무나 비슷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괴롭히고 착취해 온 자본가들 탓이기도 했다. 단순히 힘이 약한 사업장 둘이 머릿수를 합친 게 아니라, 단위 사업장 자본가들 한 명 한 명을 각기 구분해 가며 따로따로 투쟁을 해 나가는 것이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니 더 큰 악덕을 깨부수기 위해서 더 커다란 망치를 집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콜트-콜텍 사장 박영호나 하이텍 사장 박천서나 서로 아는 사이든 아니든 결국 한통속이었던 것이다.
사무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노동법이란 게 형사법과 달라서, 법을 어겨도 벌금형밖에 없어요. 근데 금속 장투사업장들은 하나 같이 매출이 엄청나거든요. 콜트-콜텍만 해도 10년 연속 100억대 흑자를 냈고 순이익만 80억에서 90억이에요. 그러니까 차라리 벌금을 내고 말지 노조를 인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나오는 거죠.”
“공장에서 기타를 만들다 보면 소리도 엄청 시끄럽고 분진 가루도 뿌옇게 날려요. 천식에 난청에...... 더구나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니 다리가 퉁퉁 붓고...... 기타 몸체를 다듬는 기계가 있거든요. 손에 잡고 하는 건데 그게 진동이 심해서, 오래 쓰면 손바닥에 티눈이 생겨요. 너무 아프죠. 수술을 해야 하는데 산재로 인정도 안 해주더라구요.”
“공장엔 창문이 하나도 없어요. 어두컴컴한 곳에서 전등 하나 켜놓고 열두 시간을 먼지 먹어가며 일해야 하는 거예요. 창문 달아놓으면 바깥에 내다보면서 시간 보낼까봐 사방을 온통 벽으로 만들었어요.”
“이상하게도 공장이 호봉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5년 일한 사람이 1년 일한 사람보다 돈을 적게 받을 수도 있죠. 관리자 말을 잘 듣는 노동자에게 관행적으로 돈을 더 줬어요. 그러니 관리자한테 설설 길 수밖에 없는 거죠.”
“기타를 만드는 공정들이 쭉 있는데, 앞 공정이 끝나지 않으면 뒤에 공정을 진행할 수가 없는 식이거든요. 그걸 못 이으면 8시 출근인데 6시 반에도 그냥 나오라고 해요. 아침부터 아무런 수당 없이 그냥 일하는 거죠. 그리고 밤에 일이 남으면 그대로 연장 근무를 하는 거고. 어떠한 수당도 없어요.”
“관리자들이 대부분 나이가 어려요. 20대 아니면 30대인데 자기 엄마나 이모뻘 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이년 저년 함부로 막 욕해요. 전날에 연장 근무를 했으면 아침에 늦잠을 자서 좀 늦게 나올 수도 있는 거고, 늦게 나오다 보면 머리 감고 덜 말린 채로 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근데 관리자들은 그러죠. ‘이년아. 머리가 그게 뭐야?’ 나이가 몇이든 그냥 이년 저년인 거예요. ‘야, 이년아. 밥 처먹고 뭐하는 거냐?’ 새파랗게 어린 관리자들이.”
“사직서도 자기네들 마음대로 쓰라는 거예요. 관리자가 불러다 놓고 ‘이년아. 사직서 써!’ 그렇게 말해서 ‘아니 제가 왜 써야 하는데요?’라고 물어보면, ‘이년아, 네가 안 쓰면 다른 년이 써야 되는데 그래도 안 쓸래?’ 이러는 거죠. 그래서 사직서는 쓸 테니 원래 지급되는 여름 휴가비 10만원은 달라고 하니까 ‘이년아, 너 줄 돈 없으니 꺼져.’ 이렇게 말해요.”
“콜트 악기가 전량 수출이다 보니 IMF때 떼돈을 벌었어요. 근데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상여금이 200%가 삭감되고, 여름 휴가비 10만원도 안 주고, 2년 연속 임금은 동결되고...... 저희는 그걸 믿었죠. 회사가 어렵다는 소리를 믿고 더 죽어라 일했어요.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그랬어요.”
“위장폐업을 해도 2년 3년은 끄떡없을 정도로 사장이 돈이 많아요. 어떠한 손해를 보든 노조는 털고 가겠다는 거죠.”
“관리자들이 아침에 출근하면 여성 노동자들에게 첫인사로 엉덩이를 툭툭 치고 지나가요. 근데 그것도 자기네들이 보기에 얼굴이 예쁜 노동자들에게나 그러지 미운 여성 노동자들은 말도 안 걸고 상대도 안 해요. 예쁜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회식 가자 막 그러면서 치근거리는데 미운 여성 노동자들한테는 먼저 지쳐 떨어져나가게끔 괴롭히는 경우가 많아요. ‘돌림빵’이라는 게 있어요. 공장이 다섯 개가 있는데 한 공장에서 일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다른 공장으로 배치해 버리는 거죠. 일이 익숙해질 때쯤 됐는데 한 달도 안 돼서 다른 곳으로 옮기라 하고. 그러니 사람 돌아버리는 거죠. 그런 식으로 다섯 공장을 계속 뺑뺑이 도는 거예요. 돌림빵 얘기만 나오면 노동자들은 치를 떨죠. 실제로 지난 2005년에 한 여성 노동자가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뒷산에 목을 매달고 자살까지 했어요. 그렇게 괴롭히는 이유는 딱 하나죠. 미우니까.”
“처음에 67명으로 노조 설립을 했어요. 그때 당시 여성 조합원이 35명쯤이었죠.”
어처구니가 없었다. 노동운동사를 들추어 보면 나오는 동일방직, 청계피복노조, YH무역노조 같은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 어지럽게 떠다녔다. 먼지가 빠져 나갈 창문 하나 없는 현장에서 하루 종일 인간적 모욕을 견디며 아픈 몸으로 일을 해야 하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성희롱까지 당한다면? 그러고서 지급되는 임금은 노루 꼬리만 한 것이라면? 노동운동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원로 노동자가 옛일을 회상하며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촛불집회를 조직하고 손전화로 집회 장소를 연락하는 시대 한 구석에서는 정말 ‘70년대식’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탄압을 받는 노동자들이 너무나도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추웠다. 비는 멎었지만 워낙 바람이 거세게 부는 탓에 나는 외투를 더 꼭 여며야 했다. 밤에 많이 추워질 것 같으니 위에 내복을 올려다 줘야겠다고 저쪽에서 조합원들이 논의를 하고 있었다. 날씨도 이런데 송전탑에 벼락이라도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다가 너무 방정맞은 생각인 것 같아서 얼른 내리눌렀다.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여덟 시 반이었다. 강남 성모병원으로 넘어가야 했다. 저 뒤쪽에 있는 천막에 가서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삶이보이는창 르포문학강좌 수강생들을 데리고 현장 실습을 나올 토요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쯤에 더 많은 사람들 데리고 다시 오겠다 말씀드리고는 그곳을 나왔다.
나오면서 사진을 좀 찍었다. 바람이 몸을 휩싸는 통에 손이 자꾸만 흔들려 사진들이 흐릿하게 찍혔다. 송전탑 위 고공 농성장은 너무나 멀리 보이는 탓에 잘 찍히지도 않았다. 100미터 높이에 15만 4천 볼트라고 했었나? 이 시대 나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거리로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허공으로까지 내몰고 있다. 하긴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고공 농성의 역사는 나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다. 시간이 많이 흘러왔는데도 왜 자꾸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하는지 나는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 나오면서 사진을 좀 찍었다. 바람이 몸을 휩싸는 통에 손이 자꾸만 흔들려 사진들이 흐릿하게 찍혔다. 송전탑 위 고공 농성장은 너무나 멀리 보이는 탓에 잘 찍히지도 않았다. |
아직도 노조를 벌레 보듯 싫어하는 고용주들이 버젓이 살아가고 있다니! 노동법이고 인권이고 뭐고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족속들이 누릴 것 다 누리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니! 그런 인간들은 감옥이 아니라 차라리 박물관에 진열해 놓던지 아니면 옛 왕들의 무덤 속에 가두어 버려야 하지 않을까? 분노인지 슬픔인지 어이없음인지 모를 무언가가 내 가슴을 거푸 꽉 쥐었다가 놓았다. 양화대교 쪽으로 걸어가는데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이따가 집에 들어가면 나는 늘 그랬듯 따뜻한 이불 속에 파묻혀 단잠을 잘 수 있을 것이었다. 의식주를 별 탈 없이 누리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나는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