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의 유해성과 위해성의 체계적인 안전관리체계를 마련하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이 재계와 환경부의 반대에 부딪혀 누더기로 지난 달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이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고’예방이나 150여 명 노동자 백혈병 발병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삼성반도체 등의 화학물질 피해 예방과 재벌기업 규제와 관련 있는 경제민주화의 주요 법안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화평법은 심상정 진보정의당 의원이 발의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통과돼 4월 3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다. 애초 환노위를 통과한 법안(대안)은 신규화학물질 또는 연간 1톤 이상 기존 화학물질을 제조·수입·사용·판매하는 사업자는 화학물질의 용도 및 그 양 등을 매년 환경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하지만 법사위 심사 과정에서 윤성규 환경부장관은 환경물질 보고 의무에서 “환경물질 ‘사용’ 사업자”의 삭제를 요청했다. “산업계가 부담 받는 부분이 많다”는 이유였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전문위원 검토 의견과 윤성규 장관의 환노위 대안 반대를 근거로 심도 깊은 논의를 강조했다.
권성동 새누리당 법사위 간사는 “법이 빨리 통과돼 시행되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법에 전혀 들어가지 말아야 할 내용이 들어가면 국민에 큰 죄를 짓는다”며 “대기업도 국민이다. 모든 국민에게 불이익은 없어야 한다”고 대기업에 대한 공평성을 강조했다. 권 간사는 이어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법안심사 제2소위에서 검토하자”고 주장했다. 제2소위로 법안 심사가 넘어갈 경우 법안 통과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박영선 법사위원장(민주당)은 “어제 본회의에서 가습기 관련 결의안이 통과됐고, 불산 사고 부분도 안전사고 부분이라 결정하기 굉장히 애매하고 힘든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춘석 민주당 법사위 간사는 “경제5단체 부회장들이 새누리당 지도부를 찾아가 구체적으로 법을 어떻게 바꿔 달라는 내용까지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이 법이 여기서(제2소위) 그냥 눌러 앉으면 국민이나 언론은 법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재계 로비로 국회가 굴복했다고 평가할 것이다. 적어도 경제계 논리를 대변해서 소위 회부나 통과되지 않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촉구했다.
결국 정회를 거듭한 끝에 야당 법사위 위원들은 ‘사용’이라는 단어 하나를 삭제하는 안을 받아들였다. 지난 29일 경제5단체 부회장들이 직접 대 국회 로비에 나서면서 대기업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용도와 양을 보고하는 법의 핵심 내용을 거세한데 성공한 것이다.
야당의 한 관계자는 “새누리당의 반발이 심한데다 화평법이 개정 법안이 아니라 제정 법안이라 폐기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며 “‘사용’ 문구가 삭제되긴 해도 통과되지 않는 것보다는 통과되는 게 의의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암묵적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사용’ 단어 하나 삭제, 최대수혜자 중 하나는 삼성반도체
이렇게 ‘사용’이란 단어 하나가 빠지면서 최대 수혜자 중 하나는 삼성반도체가 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반도체 공정에는 수많은 화학물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장하나 민주통합당 의원은 “화학물질의 제조나 수입하는 사업자 외에 사용하는 사업자에게도 보고 의무를 부과한 것은 과거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고에서 보여주었던 대기업의 무책임한 행태를 근절하기 위한 제도”라며 “삼성반도체가 어떠한 화학물질을 사용하였는지 자료를 공개하지 않아 피해자들은 제대로 산재인정을 받지 못해왔다”고 지적했다.
화학물질 사용업체도 화학물질의 용도 및 양을 보고하도록 의무화해야 노동자의 작업환경을 보호할 수 있고, 피해발생시 그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린 다는 설명이다.
심상정 의원도 “화학물질 사용자가 법사위 심의과정에서 제외돼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재벌 대기업을 비롯한 화학물질 사용자는 화학물질 제조 관련 보고 의무를 지지 않게 됐다”며 “화평법의 핵심인 ‘화학물질 위험정보 교환시스템’도 구축되지 않아 당초 화평법의 목표였던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고’를 예방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