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에 에너지요금 일괄 인상은 어떤 의미인가
지금 사회가 안정적 상태이고 평화로운 시기라면 일시적 요금 인상은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공공요금 인상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다른 복지 시스템이나 제도적 완충장치들이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기후위기, 금융위기, 경제위기에서 전쟁위기까지 모든 위기가 중첩돼 발생하고 있고, 위기가 위기를 가중시키며 날로 심화하고 있다. 사회복지는 계속 후퇴하고, 사적·공적 사회안전망들도 계속 와해돼, 사회적 연대가 해체되고 개인들의 삶이 고립되는 시기에는 작은 충격도 직격타가 된다. 지금이 그런 시기다. 장기 인플레이션과 대공황의 경고등이 켜지고, 고물가 고금리가 전망되는 상황, 노동권은 공격받고, 실질임금은 감소하며, 일자리는 사라지고, 겪어본 적 없는 기후위기까지 도래했는데, 정치는 희망을 보여주기보다 불신과 불안을 가중시키고, 그 속에서 사회 붕괴의 심리적 위기감도 나날이 커져만 가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떨어진 ‘요금 인상’이다. 어떤 이들은 ‘폭탄’이란 표현이 과장이라 비난했지만, ‘전기요금 및 가스 요금 폭탄’은 앞으로 우리 머리 위에 어떤 폭탄이 더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회를 전쟁터로 만들 수많은 폭탄 투하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요금의 일괄 인상은 위기 시기에 정부가 취해야할 사회보호조치를 위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에너지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감축 수단이다
그런데도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소비를 줄이도록 요금으로 시그널을 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위기 정세를 보지 않는 교과서적 논리다. 요금 인상이라는 채찍(시그널)은 분명 개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계급적으로 그 영향력은 다르게 나타난다. 소득 상위 10%가 에너지 소비량과 탄소배출량의 50%이상을 차지하지만, 하위 50%는 10%도 쓰지 않는 않는다. 이런 구조에서 일괄적 요금 인상은, 가장 많이 줄여야할 계층에선 가장 강제력이 없고, 이미 절약하며 줄일 데가 없는 계층에선 소비량은 줄이지 못하면서 고통과 비참만 가중한다. 에너지 소비 감축 효과는 확실치 않으면서 오히려 에너지 불평등과 기후부정의를 더욱 심화하는 역진적 정책인 것이다. 20대 기업이 전 국민이 쓰는 가정용 전기량과 맞먹는 전기를 쓰고, 삼성전자 1개 기업이 서울시민 전체가 쓰는 가정용 전기량의 두 배에 육박하는 전기를 쓰고 있다. 정책이 목적의식적으로 개입해야 할 감축 대상은 어디인가. 부유층의 에너지 소비는 사치와 낭비, 오락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서민들의 에너지 소비는 생존과 생활을 위한 것이다. 산업용 전기는 가정용 전기보다 더 극적으로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 많이 쓰는 집단부터 사용량을 감축하고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 전체 소비량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불평등 시정 없는 시혜적 복지는 선의로 위장한 제도적 폭력이다
물론 요금 인상을 지지하는 이들도 빈자의 고난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너지 바우처나 주거 개선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며, ‘값싼 에너지가 아니라 따뜻한 집을’ 요구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은 위기의 책임 주체를 은폐하고, 에너지 기본권과 주거권을 분리해 전도시켜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하며, 결정적으로 시혜적 선별 복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과거 학교 무상급식 투쟁 당시 왜 당시 시민운동이 힘을 합쳐 교육운동주체들이 빈곤층에 대한 식비 지원이나 급식 바우처 제도를 거부하고 ‘모두에게 무상급식’을 끝까지 요구했는지 상기해보면 좋겠다. 무상 급식을 ‘공짜 밥’이 아니라 ‘평등한 밥’으로, 교육 기본권과 평등권, 공공성의 관점에서 바라봤기 때문이다. 에너지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일괄 요금 인상 후 구매력 없는 집단에 선별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재로서 모두에게 평등하게 공급한 후 대량 소비 집단에 징벌적 과세를 하는 방식이 에너지 소비량과 불평등을 동시에 줄이는 더 효과적이고도 정의로운 방법이다. 분류와 선별은 그 자체가 누구를 선별하고 누구를 드러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이며 계급적인 투쟁의 장이다. 보편 복지 위에서 낭비에 대한 과세는 부자의 책임을 드러내지만, 선별 복지 하의 구빈정책은 빈자를 수혜자로 드러낸다.
에너지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공공성은 탈환의 과제이지 재화에 부착돼있는 고유한 성질이 아니다. 무엇이 공공재냐는 것은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결정의 문제다. 교육은 언제부터 공공재였고, 돌봄은 언제부터 필수노동으로 인식됐으며 왜 이제야 사회화 논의를 시작하게 됐는지 생각해보자.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에너지는 원료이자 상품이고 자산이며, 선물시장에서 거래되는 투기적 금융상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로 인한 문제들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지금은 에너지의 공공적 성격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청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후위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에너지가 무엇이어야 하느냐’를 두고 치열한 정치적 경합을 다시 요청한다.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국면은 에너지의 공공성을 탈환하고 탈상품화할 수 있는 절실하고 소중한 기회다. 지금이야말로 이윤을 위한 착취적 에너지 체제를 화석연료와 함께 퇴출시키고, 민주적 통제와 공공성에 기반한 대안 에너지 시스템으로 구축할 수 있는 제도적 관행적 경로를 만들어가야 할 때인 것이다. 화석연료 체제에는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갔지만 전환 시기 생태적 에너지 체제는 다르게 시작할 수 있다. 지금 에너지는 전환의 방향을 둘러싼 두 힘의 싸움, 자본과 민중, 독점과 민주적 통제, 사유화와 공공화의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는 장이다. 기후정의운동이 에너지 공공화 투쟁을 최우선적으로 강력하게 요구하고 쟁취해야만 하는 이유다.
사회적 공공성과 생태적 공공성은 충돌하지 않는다
생태적 전환을 위해서라도 공공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기후정의운동의 에너지 공공화는 서구 복지국가나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장체제와 국가개발체제 하에서 화석연료를 노동자들에게 저렴하고 고르게 공급했던 모델을 답습하는 분배정의 실현 요구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생태사회적 공공성은 전환 과정에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노동자 민중이 참여하는 민주적 경로로, 자연도 인간도 착취하지 않는 생태적 에너지 시스템을 만들자는 요구다. 사회 커먼즈와 자연 커먼즈를 공통의 커먼즈로 재구성하는 생태 커먼즈를 구상할 때, 새롭게 구성된 ‘공공성’의 틀 안에서 사회적 공공성과 생태적 공공성은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태적이며 사회적인 공공성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의 에너지 독점체제를 해체하고 사유화, 시장화, 상품화를 저지해야만 한다.
급박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힘과 시장 수단을 활용(?)해서라도 우선 탄소배출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고, ‘생태적 관점’에서 사회공공성과 민주주의를 일시 후퇴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다. 환경주의자가 자본을 활용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자본이 환경주의자들을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환경과 노동, 생태와 사회, 자연과 인간을 대립시키는 것은 기후위기의 진짜 주범을 은폐하고, 책임을 분산시키며, 노동자 계급과 지역주민을 환경주의와 반대의 이해관계자 집단으로 위치 짓는 잘못된 대항 전선을 만들어낸다. ‘생명 대 자본’의 대항구도 속에서, ‘사회공공적 관점’과 ‘생태적 관점’은 모순적 긴장관계나 대립적 관계가 아니며, 사회공공성과 민주주의만이 생태적 전환을 실현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원가주의’ - 한번 뚫리면 걷잡을 수 없는 공공성 파괴의 폭탄
우리가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다면, 기꺼이 전기 요금 인상의 부담을 질 수 있다는 사람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선한 의도일지 모르지만, 사회적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 개인의 선의를 믿는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공공부문에서 ‘원가주의’의 수용이 가져올 위험성이다. 공공요금에 일단 원가주의가 도입되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고 나면 그 후과는 걷잡을 수 없다. 원가가 오를 때마다 공공요금 인상은 당연한 것이 될 것이고, 이것은 ‘공공재’의 개념과 ‘공공성’이란 가치 자체를 박살낼 것이다. 에너지에서 원가주의 원칙이 수립되면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일례로 그동안 대학(사학 자본)은 원가 인상(물가 인상)을 근거로 등록금 인상을 계속 요구해왔다. 에너지 요금의 원가주의 수용은 에너지 상품화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비롯한 다른 영역에서도 그동안의 사회적 합의와 원칙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전체 공공부문에 일격을 가할 것이다.
공기업 적자를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하는가 –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90년대 이후로 우리는 국가를 기업처럼 보는 방식에 익숙해졌고, 기업의 적자를 경영 실패로 보는 것처럼 국가의 재정 적자도 국가 운영의 실패로 여긴다. 하지만 사기업과 공기업, 기업과 국가의 재정구조를 똑같은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국가 운영에서는 재정 적자가 나더라도 감내해야 하는 재화가 있고, 시기가 있다. 정부의 적자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팬데믹 사태에서 보았듯이 비상한 시기에는 정부가 지출을 확대하고 적극적으로 적자를 떠안아야 할 필요도 있다. 적자 노선을 폐지해버리면 취약지역과 교통약자의 이동권은 어떻게 되겠는가. 사기업은 그렇게 해도 공기업은 그래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우리는 ‘착한 적자’라고 부른다. 에너지 부문도 마찬가지다. 공기업의 손실이 공공의 편익으로 전환된다면 정부는 그 적자를 다른 재원과 수단으로 보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공기업의 재정은 개별 기업과 달리 정부 전체 재정의 일부로서 보는 ‘총량주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오히려 한전 적자의 원인을 제대로 보려면 ‘절반 가까이 민영화된 공기업’ 구조를 살펴야 한다. 현재 한전은 국가가 51%, 민간자본이 49%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주식회사다. 이에 따라 투자자들은 공기업에 흑자와 투자수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흑자가 나면 매년 투자자에게 배당되지만, 적자가 나면 공기업의 채무로 누적된다. 한전채로 자금이 몰려 기업이 자금난을 겪으니, 공기업 적자를 채권 발행 대신 은행 차입과 요금 인상으로 해결하라는 금융 시장 요구도 이번 요금 인상의 배경 중 하나다. 이런 근본적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면, 환경운동가들이 금융자본과 투자자 요구에 명분을 입혀 정당화하는 스피커가 될 것이 아니라, 에너지 공기업의 소유구조와 지배구조의 근본적 개혁과 공사 전환이나 공기업 국유화 등의 재공공화 방안을 적극 논의하는 것이 먼저다.
진보정치와 기후운동이 요구해야 할 것은 ‘요금인상’이 아니라 ‘정의롭고 평등한 에너지’
에너지요금 문제는 기후위기와 불평등한 사회체제의 연관성을 폭로하고 에너지를 시장에서 구매하는 상품으로 규정할 것이냐, 확고한 공공재로 정립할 것이냐를 판가름할 중요한 이슈다. 지금 요금 인상 정책에 평범한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기업과 부자들은 이익을 챙기고 고통과 책임은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우파는 대중의 정당한 분노를 호시탐탐 노리며 낚아채 분노의 방향을 약자에게 돌리고 민중이 서로 혐오하고 불신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미 기후위기 최일선에서, 위기에 당면해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면 ‘가격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전문가 집단의 목소리는 어떻게 들리겠는가.
우리는 풍요와 편리에 익숙한 소비적 생활방식을 바꿔야하고, 한계에 도달한 지구 위에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설득해야 한다. 평범한 이들의 동의와 공감, 노동자 민중의 지지와 주도가 없이는 생활과 체제의 거대한 전환은 불가능하다. 정의로운 전환은 민주적 과정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 그러려면 민중을 가격 수단으로 행동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집단으로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 기술관료적 관점부터 버려야 한다. 기후정의운동도 에너지요금 체제에 개입하고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태적, 공공적, 민주적 전환’과 ‘정의롭고 평등한 에너지’라는 대전제 하에서 수립돼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에너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